음악의 선율

음악사 속의 위작 - '카치니 아베마리아'는 카치니의 곡이 아니다

히메스타 2017. 12. 6. 14:14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카치니의 곡이 아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알비노니의 곡이 아니다. 놀랍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우리가 즐겨 듣는 명곡 중 여럿은 이처럼 작곡자가 잘못 알려져 있다.

새로운 곡을 쓴 작곡가가 ‘옛 작곡가의 곡을 발견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단지 실수나 잘못된 추정에 의해 우리가 작곡가를 잘못 아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를 ‘음악적 위작(, Musical Hoax)’이라고 부른다. ‘음악적’이라는 표현은 주로 ‘선율처럼 부드럽게 들린다’는 관용어로 쓰이므로 ‘음악사 속의 위작’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알비노니 아다지오는 전기 작가의 작품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이탈리아의 음악학자인 레모 자초토(Remo Giazotto, 1910~1998)는 독일 드레스덴의 작센 주립도서관을 뒤지고 있었다. 도서관은 몇 달 전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책 일부는 안전한 장소로 옮겨졌지만 일부는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에 천착(穿, 깊이 파서 살피다)했던 자초토는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바로크 시대의 악보와 자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드레스덴을 찾았던 것이다.

토마소 알비노니 초상화

오래된 서가를 뒤지던 그의 눈에 중요한 무언가가 보였다. 악보였다. 인쇄된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육필 악보였다. 완성된 것도 아니었고 시작 부분의 선율 몇 마디와 베이스 라인, 화음 표시만이 적혀있었다. 악보를 살펴보며 자초토는 이 악보가 그에게 친숙한 바로크 시대 베네치아 작곡가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의 것임을 깨달았다. 이상은 자초토 자신의 회상에 따른 얘기다. 그는 이 악보가 알비노니가 1708년에 쓴 트리오 소나타의 느린 악장 스케치라고 추정했다. 완성된 작품은 찾을 수 없었다.

자초토는 이 악보를 되살리고 싶었다. 그는 남아있는 멜로디와 베이스라인에 기초해 8분 남짓한 악보를 완성했다. 1958년 출판된 악보에는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 토마소 알비노니의 주제 두 개와 숫자저음에 기초함’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애상적인 선율과 신비한 분위기를 가진 이 곡은 곧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지휘자 이노 사비니는 1967년 이 곡을 대편성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뒤 야나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1973년에 발매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아다지오’ 음반이 이 곡을 첫 곡으로 내세우면서 이 작품의 대중화에는 불이 붙었다. 1981년 [갈리폴리]를 비롯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사용되었고 리차드 클레이더만을 비롯한 팝 음악가들도 이 선율을 콘서트와 음반에 차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 토마소 알비노니의 주제 두 개와 숫자저음…’이라는 긴 제목은 잊혀졌다. 단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라얀의 앨범에도 ‘아다지오 G단조, 레모 자초토 편곡’으로 표기되었다. 자초토는 공식적으로 이 곡이 ‘알비노니가 남긴 단편()들에 의해 자신이 쓴 작품’임을 밝혔지만, 어느 순간엔가 ‘알비노니의 작품, 자초토 편곡’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타인을 속인 ‘위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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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의 지휘로 발매된 [알비노의 아다지오]가 포함된 앨범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 자초토가 생전에 알비노니의 육필 악보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현재 악보가 남아있는지 여부도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조수를 지낸 음악학자 무스카 망카노는 “선율 여섯 마디와 숫자저음이 쓰여 있는 악보 오른쪽 상단에 드레스덴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내는 도장이 찍힌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회상했다. 이를 믿는다면 자초토가 선율을 ‘조작’해낸 것은 아니라는데 힘이 실리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증언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알비노니의 곡’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음악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자초토는 음악평론가로 시작해 음악저널 『이탈리아 음악 리뷰(Rivista musicale italiana)』의 편집장, 이탈리아 국영방송 음악 PD, 피렌체 대학 음악학 교수를 지냈다. [알비노니 아다지오]의 실제 작곡자라는 점 외에도 학자로서 알비노니 연구에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알비노니와 같이 베네치아 출신 작곡가였던 비발디도 그의 주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의 삶에 깊이 침입한 두 세기 선배 음악가 알비노니는 「신포니아와 협주곡집」을 비롯한 9권의 기악곡집을 남겼다. 카드(트럼프)를 제작하는 부유한 상공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생계 걱정 없는 반() 아마추어 작곡가로 일생을 보냈다. 바흐도 그의 작품에 매혹되어 알비노니 주제에 의한 푸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소련에서 음반을 내기 위한 전략”

블라디미르 바빌로프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1970년 러시아의 류트 연주자이자 기타 연주자, 바로크 음악 연구가였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 1925~1973)가 발표한 노래다. ‘오페라의 발명자’ 중 하나로 알려진 이탈리아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바빌로프 역시 이 곡을 카치니의 것으로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 아무런 ‘속임’의 의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빌로프는 1960~70년대 국영 악보 출판사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당시 소련의 고음악 연구를 주도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1970년 국영 멜로디야 레이블로 ‘16~17세기 류트음악’이라는 음반을 내놓았다. 대부분은 ‘작곡가 불명’으로 표기된 연주곡과 노래들이었다. 이중 한 곡이 ‘아베마리아’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역시 작곡가 불명이었다.

바빌로프가 죽고 2년 뒤인 1975년, 소프라노 이리나 보가체바가 이 곡을 다시 멜로디야 레이블로 내놓았다. 이번에는 ‘카치니’가 작곡가로 표시되어 있었다. 바빌로프의 음반에 참여했던 오르가니스트 마크 샤킨이 이 곡을 ‘카치니의 것’이라고 설명한 데 따른 것이다. 이 곡은 1987년 메조소프라노 이리나 아르키포바가 다시 음반으로 내놓으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5년 발매된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음반은 이 곡을 ‘월드 히트’로 올려놓았다.

왜 바빌로프는 자신이 쓴 노래들을 ‘작곡가 불명’으로 내놓았을까? 그의 딸 타마라 바빌로프는 이유를 ‘자신이 쓴 곡에 대한 지극한 애정 때문’으로 설명한다. “당시 음반을 내놓으려면 국영 레이블인 멜로디야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들이 ‘바빌로프’ 같은 무명인의 음반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고 아버지는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이 곡들이 세상의 빛을 보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하고 싶었던 나머지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 무명 작곡가들의 곡이라고 써넣으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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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줄리오 카치니(좌측)와 야코포 페리(우측)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다.

바빌로프의 아이디어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의 동료였던 오르가니스트 샤킨이 이 노래에 ‘카치니’라는 작곡가를 써넣은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카치니는 야코포 페리(Jacopo Peri) 등과 함께 16세기 말 피렌체 바르디 백작의 집에서 ‘카메라타’란 모임을 만들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에우리디케]는 오늘날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 작품으로 꼽힌다. 기교적인 높은 성부와 화려한 꾸밈음을 강조했던 그의 성악 스타일은 바빌로프의 ‘아베 마리아’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크라이슬러 “작품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타르티니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비슷한 시대 두 작곡가의 이름을 제목에 갖고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와, 역시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주세페 타르티니(1692~1770)다. 그러나 이 곡은 실제 타르티니와 관련이 없다. 이 변주곡은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명장이었던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가 지은 수많은 위작 중 하나다.

프리츠 클라이슬러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크라이슬러는 빈음악원을 거쳐 파리음악원에서 수학하였으며 1차 대전 이전 유럽의 과도할 정도로 도취적인 후기 낭만주의 연주법과 작곡 스타일을 익혔다. 1차 대전이 벌어지자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각국에서 연주하며 ‘가장 세기말 빈 스타일을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랑받았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등 앙코르용으로 사랑받는 수많은 소품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음악사상 대가들이 쓴, 알려지지 않은 바이올린 곡을 발굴해 연주하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보케리니의 알레그레토], [쿠프랭의 프로방스 풍 오바드], [포르포라의 미뉴엣], [푸냐니의 전주곡과 알레그로], 심지어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C장조]도 ‘발견’해 초연했다. 그런데 만 60세가 된 1935년, 돌연 그는 “이 작품들은 사실 내가 쓴 것”이라고 고백했다. 타르티니의 [코렐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그 속에서도 가장 알려진 작품 중 하나였다. 놀란 평론가들은 분노에 찬 비난을 쏟아냈지만 그는 태연했다. “곡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이미 그 가치는 당신들이 인정한 대로 아닌가?”

인정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라이슬러가 왜 굳이 타인의 이름을 빌어 작품을 발표했을까? 리사이틀 레퍼토리를 풍요롭게 만들면서, 자신이 사랑한 의고적인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후 타인의 이름을 빌린 그의 작품 여럿이 표준 레퍼토리에서 사라졌지만 ‘타르티니’와 ‘코렐리’ 두 거장의 이름을 빌린 변주곡은 그 화려한 기교와 다채로운 악상 덕에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한편으로 그가 발표한 [비발디의 협주곡 C장조]는 당시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비발디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띄워낸 계기로도 평가되고 있다.

헨델 바흐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두루 써낸 형제

1901년 프랑스에서는 ‘고악기협회(la Société des instruments anciens)’가 창립되었다. 주동 인물은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 Sans)와 바이올리니스트 겸 비올리스트 앙리 카자드쉬(Henri Casadesus, 1879~1947)였다.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쉬의 사촌인 앙리는 협회 소속의 5중주단을 창단해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을 발굴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카자드쉬가 발견한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비올라 협주곡 D장조]는 특히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다리우스 미요, 세르게 쿠셰비츠키, 유진 오먼디 등의 지휘로 협연하였으며 오먼디와는 음반도 남겼다.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나 헨델의 비올라 협주곡도 발굴해 연주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들 작품은 의심할 바 없이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고악기 협회. 앙리 카자드쉬, 마리우스 카자드쉬, 루세트 & 레진 카자드쉬, M. 드비에 등이 보인다.

‘옛 비올라 협주곡 발굴의 거장’ 카자드쉬의 신화가 깨진 것은 그가 죽고 30년이 넘은 뒤인 1970년대 후반이었다. 레이첼 웨이드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이 면밀한 검토 결과 ‘이들 작품은 실제 옛 작품이 아니며 카자드쉬가 이들의 이름을 빌려 발표한 것’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그가 작곡가로서의 명성보다는 옛 음악에 천착한 선각자로서의 명예를 중시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작품들은 오늘날 [카자드쉬에 의한 C P E 바흐 협주곡], [카자드쉬에 의한 헨델 협주곡] 등으로 불린다.

카자드쉬의 이름은 모차르트의 이름과도 연관을 맺었다. 앙리 카자드쉬의 동생인 마리우스 카자드쉬가 1933년 발표한 ‘모차르트의’ [아델라이데 협주곡] 때문이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열 살 때 쓴 것으로 알려졌으며 프랑스왕 루이 15세의 장녀인 아델라이드에게 헌정했다고 해서 ‘아델라이데 협주곡’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모차르트 작품 번호로 쾨헬 K.Anh.294a라는 숫자까지 부여되었다. (Anhang이란 ‘별첨’ ‘부가내용’을 뜻한다)

이 작품도 1977년, 당시 85세가 된 마리우스 카자드쉬가 “사실은 내 작품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이미 그 당시에도 널리 퍼져있던 위작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저작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사건은 형 앙리 카자드쉬가 다른 작곡가들의 이름으로 발표한 협주곡들의 진위 논란도 가열시켜 결국 이 작품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도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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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자드쉬 1900년경

주르주 뒤아멜(소설가, 앞쪽)과 마리우스 카자드쉬(뒤쪽)

왜 바로크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널리 알려진 음악사상의 위작은 주로 바로크 시대에 집중되어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이 시대에 쏟아진 호기심에 비해 문헌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멘델스존이 바흐 [마태수난곡]을 발굴 초연하는 등 바로크 붐을 일으켰으나 이후 바로크에 대한 관심은 다시 식었으며 남은 관심도 바흐와 헨델 등 일부 작곡가에 한정됐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낭만주의 완숙기에 이르자 관현악의 확대, 조성과 리듬의 확대, 지역음악 탐구 등 음악 어법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의 일환으로 ‘옛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었다. 특히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친숙한 선율과 화성 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생상스와 카자드쉬가 창립한 ‘고악기협회’ 또한 이런 일련의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옛 대가들의 새로운 작품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이런 문헌의 부족이 ‘위작’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분석된다.

음악사에서 위작 논란은 바로크 시대 작품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으로 의심이 가는 악보나 자료가 조작된 것임을 증명할 문헌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조작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도서관 이용의 편의성이 높아지고 고음악 연구가 본궤도에 이르면서 환경은 변했다. 새로운 위작의 시도는 불가능해지다시피 했고 이미 대가의 작품으로 목록에 오른 작품들도 새롭게 분석의 시험대에 올랐다. 카자드쉬 형제의 일련의 협주곡도 이런 과정을 통해 본래의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제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제기한 항변을 다시 상기해보자. ‘위대한 옛 작품’이 결국 위작이었을 알게 될지라도 그 작품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위대한 작품은 그 배경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올바르게 수용되는 것이다. 감상자는 악보의 해석 과정에서 들리는 음악뿐 아니라 그 성립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까지 함께 수용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온전한 감상이다.

그러나 위작이란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휴지통에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2차대전 직후의 작품’으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감상해보자. 70년대 구소련의 풍경을 연상하며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들어보자. 20세기 바이올린 대가의 재기 발랄함으로 타르티니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다른 재능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소리는, 이전에 듣던 것보다 오히려 더 풍요로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