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향곡 5번] C단조의 의미에 대해서는 베토벤 자신이 그 열쇠를 제공한 바 있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는 첫 악장 시작 부분의 악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렇게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
#2
“내가 [피아노 소나타(17번 D단조)]를 해석할 수 있는 힌트를 달라고 하자 베토벤은 ‘이 곡을 이해하고 싶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말했다.”
#3
“[현악사중주 F장조(16번)] 마지막 악장의 악보에 베토벤이 써넣은 ‘그래야만 하는가?(Muß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ß sein!)’라는 말은 주급을 달라는 하녀의 요구를 듣고 고민을 적은 것이다.”
‘음악의 성자’로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주요 작품들에 대해 안톤 펠릭스 신들러(Anton Felix Schindler, 1795~1864)가 남긴 기록들이다. 신들러는 베토벤의 사후 그의 첫 전기를 썼으며,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12년 동안이나 이 대작곡가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고독한 악성(樂聖)의 면모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기록 대부분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부정되고 있다. 1970년대까지 [교향곡 5번] C단조에 따라다니던 ‘운명’이라는 제목도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음반 목록과 작품 해설에서 사라졌다. 과연 그래야만 한 것일까(Muß es sein)? 신들러가 남긴 방대한 기록은 어떻게 신뢰를 잃은 것일까?
“12년 동안 곁을 지켜? 길어야 그 절반”
신들러는 빈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했으며 바이올린을 직업 연주가 수준으로 다룬 음악광이었다. 27세 때인 1822년 법을 내려놓고 케른트너토어 극장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이 해 그는 8년 전 알게 된 베토벤의 집에 들어가 ‘무보수 비서’ 생활을 시작했다. 비서 활동은 1825년 중단되었다가 1년 뒤 재개되어 베토벤이 죽은 이듬해 1827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 사망 후 그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뮌스터, 아헨 등으로 옮겨 다니며 극장과 지역사회의 음악감독 활동을 이어나갔다. 베토벤이 죽고 13년 뒤인 1840년, 그가 쓴 베토벤 전기가 출간되었다. 신들러는 평생 이 책의 교정과 증보에 몰두했으며, 죽은 뒤인 1871년 네 번째 교정판이 나왔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이미 전기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고독한 성자’ 베토벤의 모습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으며, 저자와 베토벤의 관계도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들러는 11~12년 동안 베토벤을 곁에서 보좌했다고 주장했지만 자료를 꼼꼼히 검토한 결과는 2년에서 4년, 길어야 6년을 넘지 않는다)
신들러의 진실성에 이의가 제기되는 데는 동시대인들이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유가 되었다. 1825년 그가 베토벤의 곁을 잠시 떠나게 된 것도 그 전해 [9번 교향곡] 초연 이후 수입 내역에 대해 베토벤이 ‘비서’의 정직함을 의심했던 것이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의 지인들도 베토벤이 그를 곧잘 “신들러… 성가신 녀석, 정직하지 않은 녀석”으로 불렀다고 전했다.
일상 대화가 낱낱이 기록된 드문 예술가
오늘날 신들러가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베토벤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핵심 자료인 ‘대화록’에 덧칠을 했다는데 있다.
베토벤은 난청으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죽기 9년 전인 1818년경부터는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책 모양으로 제본한 백지 묶음을 들고 다녔다. 대화 상대방과 둘만 있을 경우 상대방이 큰 소리로 말하면 베토벤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는 이런 의사소통 방법이 불필요하게 남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상대방이 백지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베토벤에게 보여주면 그가 말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대화록을 만든 것이다.
베토벤이 차츰 이 대화록에 익숙해지면서 그도 말로 답하는 대신 글로 적어 대답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대화록에 담긴 정보가 늘어났고, 특히 베토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정보가 뚜렷해졌다. 베토벤은 이 대화록을 메모장으로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조카 칼의 양육권과 관련한 법정 공방이나 칼의 자살미수 사건, [장엄미사곡]과 [9번 교향곡] 및 후기 현악4중주의 작곡 및 초연 진행과정, 작곡가 자신의 건강 상태 등도 상세하게 기록됐다.
대화록에 필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체르니를 비롯한 제자와 가까운 지인들 외에도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나 피아노 신동으로 떠오른 리스트 등도 있었다. 플라톤이나 호머, 셰익스피어, 루소, 괴테 등에 대한 언급은 베토벤의 독서 범위가 방대했음을 보여준다. [장엄미사곡]과 관련된 대화에 베토벤은 칸트의 유명한 ‘실천이성비판’을 인용해 “내 마음 속에는 도덕률,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 - 칸트!”라고 적었다.
당시의 정치적 억압상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다. 한 번은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베토벤이 큰 소리로 정치적 발언을 했던 모양이다. 대화 상대는 대화록에 “나중에 얘기하죠. 정보원이 근처에 있어요.”라고 적었다. 베토벤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예술가요.”라고 썼다.
베토벤의 사후 이 대화록을 손에 넣은 사람이 그의 비서를 자임했던 신들러였다. 그는 대화록 외에 베토벤의 편지와 다른 문서들도 사들여 전기 집필에 활용했다. 베토벤 전기 초판을 출판하고 6년 뒤인 1846년, 그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왕립도서관에 대화록 137권을 넘겼다. 이밖에 신들러가 갖고 있지 않았던 두 권을 오늘날 본의 베토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두 권을 합쳐 현재 세계에 알려진 베토벤의 대화록은 모두 139권이다.
대화록을 프로이센 왕립도서관이 관리하게 되자 미국 서지학자 알렉산더 휠록 세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를 비롯한 다른 연구자들도 이 귀한 문헌을 연구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화와 메모만으로 이뤄진 노트에 생생한 일상의 역사를 입히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책의 순서와 메모가 쓰인 시기를 알아내야 했고, 베토벤 외 각각의 필적이 누구의 것인지를 확인 또는 추정해야 했다. 1924년 처음으로 발터 놀이라는 연구자가 1819년 3월부터 1년 동안 쓰인 대화록을 정리해 펴냈다. 1943년 경 게오르크 쉬네만(George Schünemann)이 1823년까지의 대화록을 세 권으로 정리해 펴냈다. 전후 동독 음악학자 칼하인츠 쾰러(Karlheinz Köller)가 작업을 이어받았지만 1968년에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권을 낼 수 있었다.
대화록을 버렸다는 얘기는 누명이었다
기약 없는 작업을 참을성 있게 이어나가던 쾰러 연구팀은 훨씬 곤란한 문제와 마주치게 되었다. 1977년 베를린에서 열린 베토벤 연구 포럼에서 역시 동독 음악학자인 다그마 베크가 “안톤 신들러는 베토벤의 사후 대화록을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놀에서 쉬네만, 쾰러로 이어져온 대화록 연구 성과에 찬물을 끼얹는 얘기였다.
베크가 대화록에 쓰여 있는 베토벤과 다른 지인들의 말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베토벤이 죽은 뒤 신들러가 대화록의 여백 곳곳에 자기의 필적을 새로 끼워 넣었다고 분석했다. 베토벤의 생애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부분을 확대 과장하고, 전기에 집어넣은 일화들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쾰러는 ‘조작을 발견하지 못한 실수’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했다. 결과는 신들러의 위조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나온 8권부터 쾰러 팀은 신들러가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따로 모아 출간하기 시작했다. 11권부터는 신들러의 진실성에 의심을 제기했던 베크 팀의 연구자가 쾰러 팀에 합류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신들러는 베토벤의 대화록을 ‘조작한’ 인물일 뿐 아니라 상당 부분 ‘파괴한’ 인물로서도 한동안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미 신들러의 생전에 그의 정직함을 의심했던 미국 학자 세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는 1854년 신들러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세이어는 신들러가 “베토벤이 죽은 뒤 약 400권의 대화록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이 ‘짐’이 너무 많다고 여긴 신들러가 대부분을 파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원래 있던 대화록의 3분의 2 가까이를 신들러가 버린 것이 된다. 실제로 1821년에서 1822년까지 등 곳곳에 통째로 대화록이 없는 시기가 발견된다.
그러나 켄트대 교수인 테오도어 알브레히트가 2002년 ‘대화록 파기설은 오해의 결과’라고 설명함으로써 신들러가 귀한 기록을 버렸다는 의심은 해소되었다. 알브레히트에 의하면 1822년 베토벤이 빈 시내에서 이사할 때 부주의로 대화록을 비롯한 상당 부분의 짐이 분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세이어가 ‘400권(Vier Hundert)’이라고 신들러에게서 들은 말은 아마도 ‘100권 이상 많이(Viel Hundert)’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를 조작하는 데 가책이 없던 사람”
‘대화록 파괴자’라는 누명은 벗었지만 1977년 베를린 포럼 이후 신들러의 기록이 갖는 신빙성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화록에 가필을 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가 쓴 전기에 상당한 부분의 허구가 섞여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무리가 아니었다. 2000년대 초 영국 음악학자 배리 쿠퍼는 “신들러가 쓴 베토벤에 대한 모든 기록은 조작됐거나 미심쩍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지 그가 한 말을 뒷받침할 다른 근거가 있을 때만 그의 기록은 유효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쿠퍼의 시각은 오늘날 대부분의 베토벤 연구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또 다른 베토벤 연구자인 윌리엄 킨더만도 “신들러는 역사를 조작하는데 아무런 가책이 없던 인물”이라고 규탄하며 “베토벤이 [장엄미사곡]과 후기 피아노소나타를 쓸 당시의 객관적인 정황과 신들러가 베토벤 전기에 남긴 기록을 비교해도 신들러의 기록들은 신빙성이 없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신들러가 남긴 모든 기록은 그 당시의 정황을 추정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보조 자료는 될지언정, 객관적인 사료(史料)로서의 자격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베토벤이 [현악사중주 16번] 악보에 남긴 필체 - ‘그래야만 하는가?(Muß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ß sein!)’
글 서두에 언급한 [교향곡 5번]이나 소나타 [템페스트], [현악4중주 16번] ‘그래야만 하나?’와 관련된 일화들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에도 흔히 [교향곡 5번] 음반에 병기되던 ‘운명(Schicksal․Fate)’이라는 부제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템페스트] 역시 믿을만한 증언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관행상 이 제목은 대부분 계속 표기되고 있다. 테오도어 알브레히트는 “이 작품들과 관련된 신들러의 기록을 보면, 최소한 신들러가 자주 특정 작품의 동기에 대해 베토벤에게 질문했으며 베토벤이 이에 대해 딱 부러진 답을 주기 난처해했다는 사정은 드러난다”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으로 신들러의 ‘조작 가필’ 혐의는 베토벤의 대화록에 그치지 않는다. 베토벤이 남긴 악보 원고 곳곳에도 신들러의 필적이 더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한 예로 베토벤의 [헝가리 광시곡풍 론도 Op.129]는 오늘날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악보 원고에 쓰여 있던 말이 더 친숙한 제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베토벤이 아닌 신들러가, 아마도 베토벤 사후에 적어 넣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불멸의 연인은 누구인가
안톤 신들러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널리 각인된 데는 전기영화 [불멸의 연인](1994)이 큰 역할을 했다. 영화에서 신들러는 베토벤의 유품 속에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세 통의 편지를 발견하고, 이 편지를 받아야 할 수신자를 찾아 나선 끝에 편지의 수신자가 베토벤 동생의 부인이자 조카 칼의 어머니인 요한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베토벤이 동생의 부인을 사랑했다는 얘기는 현재까지 규명된 사실과 연관이 없는 ‘영화적 허구’다. 신들러가 편지의 수신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그의 주장일 뿐 음악사가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단, 베토벤이 쓴 세 통의 연애편지를 그가 확보한 사실은 맞다. 신들러는 죽을 때 이 편지들을 누이에게 주었고, 누이는 1880년 편지를 베를린 국립박물관에 넘겼다.
편지는 1812년 7월 6,7일에 쓴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엄격하고 외골수인 베토벤상을 깨는 절절한 사랑의 표현들이 담겨있다. “침대에 누워 내 불멸의 연인인 당신을 생각하고 있소. 행복했다간 다시 슬퍼지곤 하오. 운명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온전히 당신 것으로만 살 수 있거나, 아니라면 살 수 없소….” 편지의 절박한 내용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영원히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실현 여부를 타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의 결합이 실현되지 않았음은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다.
당연히 ‘수신자’의 신원에 대해 연구가 집중됐다. 신들러는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였던 줄리에타 기차르디(Giulietta Guicciardi)를 지목하며 “베토벤이 줄리에타의 남편에 대해 ‘그는 나의 연적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줄리에타는 베토벤이 오늘날 ‘월광 소나타’로 알려진 [피아노소나타 14번]을 헌정한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1801년부터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1812년의 시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관계는 없었으리라는 것이 생전 지인들의 증언이었다.
대신 새롭게 ‘불멸의 연인’으로 거론된 여인들도 대부분 줄리에타처럼 귀족 신분으로 베토벤과 교유가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장 유력한 후보는 헝가리 귀족인 요제피네 브룬스비크(Josephine Brunsvik, 1779~1821)이다. 본 대학교수인 요제프 슈미트괴르크는 1957년 베토벤이 쓴 연서 12통을 추가로 발견해 공개하면서 편지의 텍스트에 나타난 표현과 요제피네 가족의 일상 정황을 비교 분석한 결과 이 편지들 및 신들러가 보유했던 편지 3통의 수신자가 요제피네라고 주장했다. 당시 요제피네는 두 번째 남편과 별거 중이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결국 베토벤과의 결합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슈미트괴르크의 분석은 설득력이 충분했지만 다른 ‘불멸의 연인’ 후보들의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로 결정적인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만약 1812년 당시 42세였던 베토벤이 귀족 여성과 행복하게 결합했다면, 이후 그의 예술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한층 온화하고 행복한 말기의 걸작들이 출현했을까? 또는, 안락함을 얻게 된 악성의 창작력이 오히려 쇠퇴했을까?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 놓여있다. 다만 온 영혼을 담아 절절하게 써 내려간 베토벤의 문장이 안타깝게 다가올 뿐이다.
“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내가 온전히 당신의 것이 아니고, 당신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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