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협주곡을 찾아 연주하라
1933년 3월, 런던 주재 스웨덴 대사 에릭 팔름스티에르나(Erik Palmstierna)는 자택에서 교령회 (交靈會)를 열고 있었다. 교령회란 이 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모임 또는 의식으로, 오늘날의 이른바 ‘분신사바’ 놀이처럼 유령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는 회합을 말한다. 이날 모임에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딜라 파치리(Adila Fachiri, 1886~1962)와 옐리 다라니(Jelly D'aranyi, 1893~1966) 자매가 참석하고 있었다. 언니인 아딜라는 지명에 따라 글자판 위에 앉았다. 유리잔을 엎어 움직이다가 멈추면 그 위치에 있는 알파벳을 읽어 의미를 조합하는 식이었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 아딜라가 살짝 손을 댄 유리잔이 움직이면서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찾아 연주하라.’
사람들은 ‘유령’에게 누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뜻하는지 물었다. 유리잔이 다시 움직였다. ‘R-O-B-E-R-T-S-C-H-U-M-A-N-N’(로베르트 슈만). 좌중은 경악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한 말에 따라 재구성한 모습이다.
얼마 뒤 다시 교령회가 열렸다. 아딜라 파치리와 옐리 다라니 자매에게 ‘나타난’ 유령은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요제프 요아힘이라고 ‘밝혔다’. 자매는 요아힘의 조카 손녀였다. 자매에게 전해진 새 메시지는 ‘너희가 찾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를린 대학박물관(Hochschule Museum)에 있다’고 전했다. 박물관에 편지를 보냈지만 회신이 오지 않았다.
교령회를 주최했던 팔름스티에르나 스웨덴 대사가 직접 베를린으로 찾아갔다. 박물관 직원이 ‘슈만’이라고 적힌 봉투를 내밀었지만 엉뚱한 악보가 들어있었다. 실망한 대사와 직원의 대화를 옆에서 들은 누군가가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가보시죠.”
프로이센 국립도서관 직원은 ‘요아힘’이라고 적힌 봉투를 내보였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올린 협주곡의 악보가 들어있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단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탄생 8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의 작품”
교령회에서 거명된 이름, 그리고 자매의 큰할아버지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은 이 일화로부터 80여 년 전 슈만에게 바이올린 협주곡을 써달라고 직접 부탁한 인물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밀봉’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 오스트리아와 독일권의 현악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다. 1853년 당시 20세에 불과했던 브람스가 슈만을 찾아가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살 위인 요아힘의 소개장을 가져간 결과였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한 그 해, 슈만은 요아힘의 부탁에 따라 작품 두 곡을 썼다. 하나는 [환상곡 C장조] 작품 131, 또 하나가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였다. 요아힘은 [환상곡 C장조]를 받은 즉시 마음에 들어 했고 평생 연주했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은 슈만이 보는 앞에서 한번 오케스트라와 맞춰본 뒤 이 작품에 손대기를 주저했다.
이듬해인 1854년,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 여러 해 동안 그를 괴롭혀 온 정신이상이 중증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요아힘의 부정적인 인식을 굳게 했다. 한마디로 ‘광증(狂症)에 빠진 사람의 작품’으로 여긴 것이다.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아힘은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있는데, 이 작품은 영적인 힘이 소진된 사람이 간신히 마지막 영감을 짜내서 만든 ‘고갈’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전했다. 요아힘의 이런 의견은 슈만이 죽은 뒤 부인 클라라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클라라는 슈만이 죽은 뒤 그의 작품 목록에서 바이올린 협주곡을 제외했다.
슈만의 육필 악보를 갖고 있던 요아힘은 이후 베를린의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악보를 보내면서 “작곡가 사후 100년 동안 공개하지 말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사후 100년 뒤는 1956년이었다.
초연을 둘러싼 쟁탈전
요아힘의 조카 손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두 자매는 이렇게 발견된 협주곡의 초연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새로 집권한 독일의 나치 정부가 끼어들었다. 나치는 집권 후 멘델스존을 비롯한 모든 유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금지한 상태였다. 그동안 사랑 받아온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대체할 ‘낭만주의 시대 순수 독일 음악가’의 작품이 필요했다. 나치는 자신들의 비호와 선전 아래 이 ‘새로운’ 작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싶어했다.
4년 뒤인 1937년,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게오르크 쿨렌캄프(Georg Kulenkampff)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이 곡을 처음 연주했다. 두 번째 연주의 권리도 자매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독일의 쇼트 출판사가 젊은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에게 이 곡의 악보를 검토해달라고 맡겨둔 상태였다. 메뉴인은 옐리 다라니와 초연권에 대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상태였지만 나치와 쿨렌캄프가 이미 초연한 마당에 더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메뉴인은 쿨렌캄프의 연주 한달 뒤 뉴욕 카네기홀에서 이 곡을 피아노 반주로 처음 연주했다. 이 곡을 ‘찾아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옐리 다라니는 이 작품의 런던 초연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전 세계가 기대 속에 맞이한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지만 반응은 떨떠름했다. 오히려 비평계의 반응은 대체로 80여 년 전 요아힘의 판단과 비슷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메뉴인은 “이 곡이 베토벤과 브람스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에 해당하며, 베토벤과 브람스에 값하는 인간적 온기, 부드러움, 대담한 남성적 리듬, 절묘한 음형, 주제와 화음의 풍부함과 고귀함”을 갖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연주를 본 뉴욕타임스의 비평가는 “약점이 많은 곡으로, 슈만의 영감이 다해 가는 모습이 느껴지며 강력함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가장 유명한 정신이상 음악가
80여 년의 세월을 뚫고 세상으로 나온 이 작품에 대해 세간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은 역시 ‘슈만이 정신병을 앓던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예술가의 정신병이 그 예술세계에 오히려 독특한 색채와 매력을 부여한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작곡가 후고 볼프, 작가 모파상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슈만의 정신질환은 이들과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언급한 다른 예술가들처럼 그의 삶이 이로 말미암아 불운하게 마감되었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슈만은 23세 때인 1833년부터 심한 조울증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 정도가 지나쳐 환희와 같은 행복감에 휩싸여 있다가도, 상태가 나쁠 때는 누가 독을 먹이고 있다거나 날카로운 물체로 위협한다는 등의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클라라와의 행복한 결합 이후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정신이상이 그를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1853년, 브람스가 그를 찾아와 머물렀다가 간 직후였다. 귀에 한 음이 길게 들리는 이명(耳鳴)이 시작되더니 이내 머릿속에 음악이 들렸다. 슈만은 “천사가 내 귀에 음악을 불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가는 슈베르트, 또는 6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 멘델스존이 음악을 불러주는 것이라고 뇌까렸다. 이때 이미 그는 판단력과 기억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이 ‘불러준다’고 말한 선율은 그가 바로 10월 초에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 주선율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현악사중주 2번]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선율을 사용한 바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 채 슈만은 이 선율로 다섯 개의 변주부가 붙은 변주곡을 썼다. 이른바 ‘유령 변주곡’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마지막으로 출판된 곡이 됐다. 8년 뒤, 브람스도 이 주제를 인용해 [네 손을 위한 변주곡] 작품 23을 썼다.
해가 바뀌어 1854년 2월, 슈만의 상태는 한층 악화됐다. 환상 속에 나오는 천사들이 순식간에 악마로 바뀌곤 했다. 그는 아내 클라라에게 “내가 당신을 해칠지 몰라 걱정이야”라고 말했다. 2월 27일, 그는 라인강의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내렸다. 지나가던 배의 선원들이 그를 발견하고 배로 끌어올렸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나를 가두어 주오”라고 말했다. 그는 본 근교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클라라의 면회가 허용됐다. 오랜만에 아내를 만난 슈만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나는 알아”라고 웅얼거렸다. 이틀 뒤, 그는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슈베르트, 멘델스존이 불러준 선율?
요아힘의 조카 손녀들이 ‘유령이 알려주었다’고 주장한 [바이올린 협주곡]에 작곡가 슈만 자신이 ‘유령이 불러주었다’고 말한 선율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슈만이 언급한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은 그가 강력한 정신적 연대감을 지니고 있던 낭만주의 대가들이었다.
더군다나 슈만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80여 년이나 잠들어 있다가 햇살 아래로 나온 것처럼, 슈만도 슈베르트의 잊혀진 대작을 햇살 아래로 끌어낸 일이 있었다. 바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그레이트’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이 40년 이상 잠들어 있다가 재발견된 것처럼, 이 작품도 슈베르트가 죽기 2년 전인 1826년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헌정했지만 한 차례 비공개로 연주된 뒤 ‘너무 길다’는 이유로 잊혀져 버렸다. 이후 12년 뒤, 슈베르트가 죽고 난 뒤 10년 뒤인 1838년 빈을 방문한 슈만은 악우협회에서 이 곡의 악보를 발견했고, 악보를 가져와 친구인 멘델스존이 이듬해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초연하도록 했다. 이 작품에 대해 ‘천국적으로 긴’이라는 인상적인 수식어를 붙인 사람도 슈만이었다.
당시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양대 거장이었던 슈만과 한 살 위의 멘델스존은 작곡가라는 정체성 외에도 각각 비평가와 지휘자라는 각각 특화된 영역을 갖고 있었다. 멘델스존의 작업은 슈만이 평론으로 치켜올렸으며, 슈만이 작곡하거나 발굴한 작품은 멘델스존이 지휘해 널리 알리는 식의 ‘시너지’였다. 멘델스존이 1847년 38세의 이른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슈만의 상실감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슈만이 일찌감치 자신이 작품에 삽입했던 선율을 착란 속에서 ‘슈베르트가 불러주었다’, ‘멘델스존이 불러주었다’고 말한 데는 이 같은 두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뒤늦게 발견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두 겹의 ‘평행이론’을 상기시킨다. 2악장에 나온 선율을 죽은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이 불러주었다고 슈만이 ‘주장’했듯이, 이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죽은 슈만이 불러주었다고 요아힘의 조카 손녀 자매들은 ‘주장’했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이 10년 동안이나 사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듯이, 슈만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80년 이상 사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다시 조명
슈만에 대한, 그리고 이 ‘오래된 신곡’에 대한 나치의 장려정책에도 불구하고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은 좀처럼 인기가 올라가지 않았다. 요아힘 식의 각박한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해도, 이 곡은 1악장의 구조가 분명하지 않고 장황하며 전체적으로 중저음 현을 많이 사용해 ‘비올라 곡처럼’ 들리는 부분이 많았다. 바이올린 독주부의 기교는 연주하기에 까다로울 뿐 외면적 효과가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1악장에는 카덴차도 없어 연주자가 기교를 한껏 과시하기에 더욱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이 작품은 재평가를 받으면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88년 이 곡을 녹음한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토마스 체에트마이어는 처음 쿨렌캄프가 교정한 원곡 악보를 배제하고 슈만의 육필원고로 돌아가 작품의 ‘원전성’을 높였다.
1994년 출반된 기돈 크레머(Gidon Kremer)의 음반은 한층 흥미롭다. 이 곡에서 가장 큰 인상을 남기는 것은 3악장의 당당한 폴로네이즈 리듬이다. 여기서 크레머의 연주는 다른 연주들에 비해 30% 이상 느리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는 악보에 표시된 ‘♩=63’이란 메트로놈 표시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쿨렌캄프가 슈만의 표시대로 연주하면 독주자의 기교를 충분히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원래 표시보다 훨씬 빠르게 연주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처음 들으면 다소 기묘하게까지 느리게 들리지만, 크레머는 이 빠르기를 고수하겠다고 말한다. “슈만의 템포는 애매모호하지 않다. 1, 2악장에서 그의 빠르기 지시를 따른다면 3악장에서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이 템포를 따를 때 3악장이 훨씬 당당하고 웅장하게 들린다고 설명했다.
대작곡가들의 헌정 공세를 받은 자매
묻혀있던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의 존재를 처음 언급한 아딜라 파치리, 옐리(영어로는 ‘젤리’로 발음) 다라니 자매 얘기로 돌아가 보자. 두 사람의 성은 본디 헝가리 성 ‘훈냐드바리 아라니’에서 딴 ‘다라니’였지만 언니인 아딜라는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랐다. 일찍이 고국 헝가리를 떠나 영국에 정착한 두 사람은 ‘그만그만한’ 연주자가 아니라 명연주가 요아힘의 피를 간직한 바이올린 대가들이었다. 유럽 각국의 대작곡가들이 앞다투어 자매에게 곡을 헌정했다.
동생 옐리의 연주를 들은 라벨은 유명한 듀오곡 ‘치간(집시)’을 헌정했다. 본 윌리엄스도 ‘아카데미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했다. 버르토크(Béla Bartók)는 언니 아딜라에게 바이올린 소나타 두 곡을 헌정했지만 이 곡들은 옐리가 초연했다. 홀스트(Gustav Theodore Holst)는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자매에게 헌정했다.
여기서 누구나 품을 법한 궁금증으로 들어가 보자. 과연 슈만이나 요아힘의 유령이 ‘실제로’ 자매에게 나타나 80년 이상 잊혀진 곡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문제다.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Christoph Eschenbach)는 ‘유령담’을 한마디로 일축한다. 자매는 이미 이 작품이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초연권’을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작전설’을 배제하더라도, 성장과정에서 부모나 친지들로부터 이 작품의 이야기를 들었던 자매가 교령회의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옛 기억을 재생해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작품을 망각 상태로부터 음악사의 한가운데로 끌어낸 것만으로도 두 자매의 공적은 오래 기억될 만하다. 처음에는 다소 장황하게 들리는 이 협주곡의 독특한 매력에 뒤늦게라도 빠진 음악팬이라면, 이 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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