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가 한 여자나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어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20초 만에 반한 이성 때문에 20년 동안 쌓아온 우정을 포기할 수는 없어 두 친구는 함께 우정을 택하기로 약속한다. 테너와 바리톤 주인공이 함께 부르는 오페라 속 대표적인 남성 이중창 [신성한 사원에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노래다.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는 [카르멘] 이전에 1863년 파리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오페라 [진주잡이]를 초연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아홉 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비제는 초기에 기악곡들을 작곡하다가 곧 극음악에 관심을 보여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대표작 [카르멘] 이전에 이미 14편의 오페라와 오페레타, 연극 부수음악을 작곡했고, [진주잡이]는 25세에 작곡한 초기작이다. 비제가 로마대상을 받고도 이렇다 할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오페레타 편곡 작곡가로 생계를 잇고 있을 때 테아트르 리리크 극장장 카르바요는 오페라 애호가 바레우스키 백작의 후원금으로 비제에게 공연 기회를 주고, [진주잡이]의 대본도 직접 구해주었다.
외젠 코르몽과 미셸 카레가 쓴 이 오페라의 대본은 원래 작곡가 마이야르를 위한 것이었지만, 비제에게 주어지면서 무대가 멕시코에서 고대의 실론 섬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종교적인 배경도 힌두교가 되었다. 미셸 카레는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본을 쓴 당대의 유명 작가였지만, 의외로 그의 [진주잡이] 대본은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진주잡이]가 초연에 성공하지 못한 책임이 대본에 돌아오기도 했다.
가장 로맨틱한 테너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
3막으로 이루어진 이 오페라의 1막은 고대 인도 남부 실론 섬의 바닷가에서 시작된다. 천민 출신인 레일라(Leila. 소프라노)는 신비로운 미모와 뛰어난 노래 솜씨 덕분에, 진주 채취로 생계를 잇는 어느 부족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하는 과제를 맡는다. 남자들이 바다에 들어가 진주를 캐는 동안 온종일 바닷가 바위 위에서 그들의 안전과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힌두 신에게 기도하고 또 아름다운 노래로 노동을 격려하는 여사제가 된 것.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레일라는 새로 선출된 젊은 족장 주르가(Zurga. 바리톤)와 힌두 사제 누라바드(Nourabad. 베이스) 앞에서 정결 서약을 한다. 여사제의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어떤 남자도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죽음의 벌을 받겠다는 약속이다.
한편 오랜 세월 객지를 떠돌다 돌아온 나디르(Nadir. 테너)는 형제 같은 친구였던 주르가를 다시 만나 [신성한 사원에서]라는 이중창을 노래하며 영원한 우정을 다짐한다. ‘어느 날 힌두 사원에서 함께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동시에 사랑에 빠져 서로 원수가 되었지만, 소중한 우정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에서 몰아냈다’는 내용의 노래. 그러나 당시 나디르는 친구를 배신하고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나눴다. 이제 이곳에 막 여사제로 도착한 여인이 바로 그녀임을 목소리로 알아차린 나디르는 추억과 욕망에 싸여 ‘지금도 들리는 듯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을 노래한다. 베냐미노 질리, 유시 비욜링 같은 미성 테너의 노래로 유명한 이 아리아는 물결 위에서 배가 천천히 흔들리는 듯한 나른한 반주와 목소리에 담긴 간절함이 기막힌 대비를 이루는 명곡이다.
2막. 별빛이 찬란한 밤, 사원의 폐허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레일라는 지난날 나디르와의 사랑을 추억하며 두려움을 떨치려고 애쓴다. 그때 나디르가 나타나 레일라에게 자신의 열정을 새롭게 고백한다. 레일라는 나디르가 처할 위험을 생각해 거부하지만, 결국 그 열정에 감염되어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때 레일라를 감시하려고 이곳에 온 누라바드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성스러운 장소에서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며 두 사람을 비난한다. 주르가는 베일 속의 여사제가 과거의 그 여인임을 알게 되자 나디르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주르가의 심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폭풍우 묘사음악과 함께 3막이 시작되고, [폭풍우가 잦아드는구나]라고 무겁게 노래하며 주르가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여야 하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때 레일라가 찾아와 나디르는 결백하며 모든 게 자기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제게 자신의 영혼을 바쳤어요. 내가 죽을 테니 그를 살려주세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에서 소프라노 주인공 레오노라가 테너 만리코를 살리기 위해 바리톤 루나 백작에게 애원하는 것과 똑같은 내용이다. 소프라노에게 사랑을 못 받은 바리톤의 입장에서는 ‘불난 집에 부채질, 상처에 소금 뿌리기’인 셈이니 분노가 더욱 솟구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을 죽이겠다는 결심이 굳어진 주르가. 하지만 레일라가 목걸이를 풀어 어떤 마을 사람에게 주며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해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자(주르가에게 목걸이를 직접 건네는 연출도 있다) 갑자기 그 목걸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레일라는 오래전에 어떤 무리에 쫓기던 자신을 목숨 걸고 숨겨준 용감한 소녀였던 것. 그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와 여자를 살릴 명분을 얻은 주르가는 해가 뜨자 마을에 불을 지른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다들 집에서 달려 나와 불을 끄느라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주르가는 레일라와 나디르를 도망시키고, 결국 자신이 누라바드에게 처형된다.
사회집단의 규율과 개인적 감성 사이의 갈등
[진주잡이]는 '이국풍(異國風)'의 선도적 작품으로, 장 필립 라모의 [멋진 인도인들]이 초연된 이후로 유럽에서 꾸준히 인기를 끈 '이국풍' 유행의 대표작이다. 서양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실론 섬을 배경으로 여사제를 등장시켜 동양의 신비를 강조한 점을 이국풍으로 본 것이다. 음악에 나타난 이국풍을 분석한 음악학자들은 주로 기악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음악적 스타일의 요소들이 감상자의 귀에 특이하게 들릴 경우 이를 이국풍이라고 칭하는데, 가장 뚜렷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리듬이며 때로는 선율 자체에서도 그런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감상자가 들었을 때 음악에 쓰인 음악적 재료가 뭔가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먼 곳, 미지의 세계의 정취를 느끼게 할 때 이를 이국풍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본이 있는 오페라의 경우에는 이국풍의 기준이 음악적 재료나 스타일보다는 작품 소재 자체나 배경 지역, 대본상의 대화 내용 등으로 결정된다. 음악극 속의 음악은 극의 플롯과 긴밀하게 결합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음악적 재료로서 감상자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 음악이 붙어 있는 가사와 함께 입력되기 때문이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라모의 [멋진 인도인들], 푸치니의 [나비부인], 비제의 [카르멘] 등이 이국풍 오페라의 좋은 예다.
구노의 영향을 받은 비제는 몇 년 후에 작곡한 [카르멘]보다 이 [진주잡이]에서 훨씬 고요하고 정제된 음악을 선보였다. 이 오페라에서는 '사회집단의 규율과 개인적 감성 사이의 갈등'이라는 작품 주제가 음악적으로 탁월하게 표현된다. 나디르의 [목소리 아리아] 뿐만 아니라 그가 레일라에게 다가오면서 부르는 12박자 바카롤(Bacarole) 풍의 노래는 장조와 단조의 연속적인 변환을 통해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개인의 위태로운 내면을 보여준다.
[진주잡이] 초연은 비제의 기대와는 달리 성공을 거두지 못 했다. 1875년 [카르멘] 초연이 실패하고 비제가 석 달 뒤에 죽은 다음, 해외에서 [카르멘]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작인 [진주잡이]도 새로운 조명을 받았고, 파리에서는 초연 후 30년이 지나서야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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