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북부 18구의 몽마르트르 묘지에는 19세기의 프랑스 예술계가 그대로 잠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명사의 무덤이 있다. 소설가 에밀 졸라와 스탕달, 작곡가 베를리오즈와 시인 하이네 등 미로처럼 어지럽게 펼쳐진 무덤들을 따라서 걷다 보면, 당대의 예술가와 부호들의 애인이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였던 한 여인의 묘지와 만난다.
아름답게 피었다 쓸쓸하게 저버린 여인
마리 뒤플레시(Marie Duplessis, 1824~46).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화려하게 피었다가, 스물셋의 나이로 쓸쓸하게 지고 말았던 여인이다. 만인의 연인이었지만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사회적 관습과 규율에 속박 받았지만 거기서 끝내 자유롭고자 했던 이름이다. 밤마다 샹젤리제 거리와 파리 시내의 극장에서 귀족과 부호의 마음과 재력을 빼앗아갔던 그녀를 흔히 사람들은 ‘정부(femme entretenue)’나 ‘창부(courtisane)’라고 불렀다.
“그녀의 옷 치장은 호리호리하고 젊은 자태와도 무척 잘 어울린다. 갸름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과 창백한 안색으로 그녀는 묘사할 수 없는 향기와 같은 우아함을 주변에 흩뿌린다.”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였던 쥘 자냉의 묘사처럼, 이 여인이 발산하는 매력에는 강한 휘발성이 깃들어 있었다. 자냉은 그녀에 대해 “고개 숙인, 아름다운 얼굴과 꽃다발을 구분하기 위해선 청년의 눈과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필요할 정도”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군중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뒤플레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예술가 가운데 하나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리스트였다. 당대 파리 사교계의 스타였던 리스트는 그녀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고백했다. 훗날 뒤플레시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에는 “가련한 마리 뒤플레시를 생각할 적마다, 오랜 애가(哀歌)가 마음속에 떠오른다”는 조사(弔詞)를 남겼다.
문학으로 남은 짧은 사랑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이자 소설가인 뒤마 피스(Alexandres Dumas fils, 1824~95)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것도, 작가가 불과 스무 살 때였다. 둘은 1년간 동거했지만, 이듬해 뒤플레시는 페레고 백작과 결혼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하지만 백작 집안의 반대로 이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이듬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았던 사랑은 긴 잔영(殘影)을 뒤마 피스에게 남겼다. 작가의 추억 속에 오랫동안 살아 있던 뒤플레시는 소설 『동백꽃 여인』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뒤플레시가 세상을 떠난 뒤 1년 만에 출간된, 뒤마 피스의 자전적 소설이 『동백꽃 여인』이다. ‘동백꽃 여인’의 한자식 표현이 ‘춘희(椿姬)’다.
이 작품에는 소설가 아버지와 재단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혼외 자식으로 태어나 사회의 냉대에 시달렸던 작가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야기를 창작할 만한 나이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기에,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리도록 하겠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흡사 작가 자신의 고백과도 같았다. 작가 자신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서 뒤마 피스는 남자 주인공 아르망 뒤발이 되었다. 훗날 작가가 묻히기를 소망했던 곳도 파리 북부 빌레 코트레의 가족 묘지가 아니라, 뒤플레시가 묻혀 있는 몽마르트르 묘지였다.
“마르그리트는 공연이나 무도회에서 매일 밤을 보냈고, 첫날 공연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새로운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그의 곁에는 세 가지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1층의 관람석 앞에는 언제나 오페라글라스와 봉봉 상자, 그리고 동백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한 달의 25일은 흰 동백꽃이었고, 닷새는 붉은 동백꽃이었다. 이렇게 색깔이 바뀌는 이유에 대해선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르그리트가 동백꽃 말고 다른 꽃을 지니고 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바르종 꽃집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동백꽃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결국 그녀의 별명이 됐다.” - 뒤마 피스, 『동백꽃 여인』
작품의 제목이 ‘동백꽃 여인’인 것도 마르그리트가 앉았던 극장 풍경을 묘사한 이 대목 때문이다. 주인공 아르망 뒤발이 마르그리트에게 사랑에 빠졌던 공간 역시 공연장이다. 당시 여인을 데리고 공연장에 가는 것은, 교제 중인 여인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연인 관계를 공표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당시 공연장은 유혹과 구애의 시선이 부지런히 교차하는 ‘사교계의 정치 공간’이었던 것이다.
언뜻 화려한 사치와 환락을 모두 누리는 것 같지만, 이 여인이 가질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면, 바로 진정한 사랑이었다. 만인의 연인이지만 온전히 한 사람의 사랑일 수는 없는 역설로 인해 작품의 비극성도 짙어진다.
“매일 똑같은 것만 요구하고, 돈만 지불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에 질리고 말았어. 만약 우리처럼 천한 일을 시작하려는 여인들이 이런 내막을 안다면, 차라리 가정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만 화려한 옷과 마차, 다이아몬드에 대한 허영심이 우리를 짓누르고 말지. 육신도 마음도 아름다움도 점점 닳아 없어지고, 상대를 파멸시키는 동시에 우리 자신도 망가지고 마는 거야.” - 뒤마 피스, 『동백꽃 여인』
이 직업여성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탈출구가 ‘사랑의 세계’라면, 그들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은 것은 ‘허영의 세계’다. 소설은 사랑을 묘사할 때에는 낭만적 시선을 거두지 못하지만, 허영을 그릴 때만큼은 짙은 비극성과 뚜렷한 현실성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이 소설과 연극, 오페라뿐 아니라 발레와 영화까지 다양한 ‘파생 상품’을 낳으면서 사랑받는 것도 이 같은 매력 덕분이다.
오페라가 된 소설
작품은 청년 뒤마 피스에게 출세작이 됐다. 작가는 여세를 몰아 1852년에는 희곡으로 직접 각색하기에 이르렀다. 작품의 인기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도 “이것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며 슬픈 연애담 속에 숨어 있는 비극적 현실성을 꿰뚫어보았다. 연극을 관람한 작곡가는 이 희곡을 바탕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는 첫 아내를 뇌염으로 잃은 뒤,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비밀리에 교제하고 있던 작곡가 자신의 상황도 적잖이 반영되어 있었다. 1842년 작곡가의 출세작인 오페라 [나부코]에 스트레포니가 출연한 이후, 이들은 교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대 이탈리아 음악계에서 이들의 염문은 곧장 스캔들로 이어졌다.
하지만 베르디는 1852년 “더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인과 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비난할 권리가 있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장인에게 보냈다. 마침내 둘은 1859년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뒤마 피스의 『동백꽃 여인』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다시 태어났다. 소설의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오페라에서 비올레타 발레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 오페라는 185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초연됐다. 하지만 38세의 뚱뚱한 소프라노를 여주인공으로 기용한 ‘캐스팅 실패’ 때문에 초연 당시 오페라는 관객들에게 연민 대신 공분을 일으키며 참패로 끝났다. 하지만 작곡가는 “어젯밤 [라 트라비아타]는 실패였다. 내 잘못이었을까, 성악가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답해줄 것”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결국 오페라는 개작을 거쳐, 이듬해 베네치아에서 재공연됐다. 오스트리아 빈과 영국 런던, 미국 뉴욕에서도 공연되면서 실패를 만회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화려한 기교로 표현되는 비극
오페라는 노래에 압축적인 이야기를 담아서 무대에서 전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올레타도 환락에 젖어서 살다가 순수한 사랑에 감동받지만,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 비극적 운명을 한 무대에서 모두 보여줘야 한다. 비올레타를 부르는 소프라노 역시 화려한 콜로라투라(coloratura)와 서정적인 리릭(lyric)의 음색까지 소화해야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배역으로 꼽힌다.
비올레타의 복합적인 성격이 응축된 장면이 1막이다. 「축배의 노래」에서 순간적 향락이 주는 즐거움을 찬양하던 비올레타는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의 순수한 고백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아리아 「아 그이였던가」를 부른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다시 절망하면서, 비올레타의 노래는 「언제나 자유롭게」로 바뀐다. 새롭게 찾아온 사랑에 가슴 설레지만, 정작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냉엄한 현실에 비극을 예감하는 것이다.
“크나큰 사랑의 파도가 밀려왔네. 하지만 이상하고도 신비한 건, 내 마음에 고통과 기쁨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는 것.” -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가운데 아리아 「아 그이였던가」
“그건 미친 일이야! 허무한 망상일 뿐. 파리라고 불리는 사막에서 이 가련하고 외로운 여인에게는. 무얼 바라겠는가, 무얼 해야 하는가. 차라리 쾌락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져서 죽고 말리라. 언제나 자유롭게 꽃에서 꽃으로 펄럭이고 스치며. 새로운 날이 뜨고 질 때마다, 새로운 쾌락을 찾아 떠나리.” -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가운데 아리아 「언제나 자유롭게」
어려운 고음과 고난도의 기교가 쉼 없이 펼쳐지는데다, 주인공의 복잡한 처지와 고뇌까지 담아내야 하기에 1막의 이 장면은 언제나 소프라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어왔다. 1950년대의 마리아 칼라스, 1990년대의 안젤라 게오르규와 2000년대의 안나 네트렙코가 모두 이 오페라를 통해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발판을 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뒤마 피스는 1874년 프랑스의 한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1894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하면서 톡톡히 보상을 받았다. 베르디의 오페라 역시 초연의 실패를 딛고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와 더불어 작곡가 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면서 오페라 극장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뒤마 피스와 베르디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그녀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실의 차가운 밤거리를 걷고 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밤거리의 네온사인을 볼 적마다, 문득 뒤플레시와 마르그리트 고티에, 비올레타를 떠올린다. 그들은 밤마다 거짓 웃음을 팔겠지만, 한편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눈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디의 오페라 전주곡에 흐르던 구슬픈 단조 선율처럼, 한없이 깨어지기 쉽고 연약해서 덧없는 사랑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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