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유작인 오페라 [투란도트] 3막. 조용한 새벽 장면, 무대에서 모두가 물러가고 남자 주인공인 테너 칼라프 왕자 혼자 나타난다. 마치 이제 눈과 귀를 집중할 시간이니 모두가 주목하라는 듯. 관객들의 시선이 이 한 인물에게 모이고, 기다렸다는 듯 짧은 전주에 이어 칼라프의 노래가 시작된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잠들지 말라,
그대 또한, 오 공주여,
차디찬 침실 속에서,
사랑과 희망으로 떠는
별들을 보고 있으리!
그러나 내 비밀은 내 안에 있어,
아무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날이 밝으면
그대 입에 대고 이야기하리라!”
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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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푸치니, [투란도트] 중 3막 ‘Nessun dorma(잠들지 말라)’ / 루치아노 파바로티, 존 올디스 합창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연주), 주빈 메타(지휘) | |
2 | 푸치니, [투란도트] 중 1막 ‘Ah, per l'ultima volta(아, 이제는 그만)’ /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연주), 주빈 메타(지휘) | |
3 | 푸치니, [투란도트] 중 3막 ‘Tu, che di gel sei cinta(얼음으로 만들어진 공주님)’ / 몽세라 카바예, 루치아노 파바로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연주), 주빈 메타(지휘) | |
4 | 푸치니, [투란도트] 중 3막 ‘Diecimile anni(만세를 누리소서)’ / 조안 서덜랜드, 존 올디스 합창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연주), 주빈 메타(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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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의 황녀 투란도트는 누구나 한번 보면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미모를 갖고 있지만 그와 결혼하기 원하는 신랑감은 투란도트가 내는 수수께끼 3개를 모두 맞혀야 한다. 하나라도 틀리면 결혼은커녕 목이 달아난다. 여기 나라가 망한 뒤 떠도는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투란도트의 미모를 보고 반해 도전한다.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는 데 성공하지만 투란도트는 약속을 지켜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이에 이번에는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문제를 낸다.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 보라고. 알아내지 못하면 자신과 결혼해야 하지만, 알아낸다면 자신이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밤이 차츰 지나가면서 칼라프 왕자가 이기리라는 예감으로 기뻐 부르는 아리아가 위의 유명한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다.
그런데 이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대본작가가 새롭게 창작한 이야기가 아니고 긴 원작의 역사가 있다. 이전의 [투란도트]들은 왕자가 수수께끼를 모두 맞혀 황녀와의 결혼에 성공하는 얘기로 끝난다.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라는 제2의 도전은 푸치니의 오페라에만 등장한다. 이는 푸치니의 강력한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왜 푸치니는 기존의 투란도트 이야기에 ‘이름 알아내기’라는 두 번째 이야기를 더했을까?
헤로인이 두 명인 하이브리드 극
1920년, 62세가 된 푸치니는 2년 전 1918년 ‘3부작’을 마친 뒤 완전한 공백기를 갖고 있었다. 그동안 작곡된 작품이라곤 합창곡 [로마 찬가]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은 나이 먹고 대가로서의 권위를 확립한 그가 느긋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단지 마땅한 소재를 찾는 중이었다.
그는 1896년 발표한 [라보엠]에서부터 ‘앞서 발표한 작품을 자기 모방한다’는 비평가들의 질타에 줄곧 시달리고 있었다. ‘눈물 짜는 여성 취향’, ‘설탕 바른 얕은 작곡가’라는 비판에 염증이 난 그에게는 베르디 만년의 [아이다], [오텔로]처럼 스케일이 큰 소재가 필요했다. 그는 [제비], [외투](‘3부작’의 첫 번째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온 대본 작가 아다미를 닥달해 소재를 찾아보았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때 손에 들어온 책이 실러가 각색한 베네치아인 희곡 작가 카를로 고치(Carlo Gozzi, 1720~1806)의 희곡 [투란도트]였다.
주인공 칼라프 왕자의 이름이 주는 어감에서 느껴지듯, 이 이야기는 아랍권에서 전해져 온 ‘투란도흐트(Turandokht)’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이야기는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 작가 겸 외교관 프랑수아 프티 들라크루아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이야기집을 정리한 ‘천일일화(千一日話․Les Mille et un jours, ‘천일야화’와는 다름)’모음집에 소개됐고, 고치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1761년 자신의 대표작이 된 [투란도트]를 발표했다. 이방인이 수수께끼를 풀어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 이야기는 독일 고전주의 대표자 중 하나인 실러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푸치니가 입수한 책은 실러의 각색본을 이탈리아어로 다시 번역한 것이었다. 물론 실러와 고치의 책에도 ‘이름 알아내기’ 일화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 없던 ‘칼라프 왕자의 이름 알아내기’를 끌어들인 데는 무엇보다 대중과 비평가들의 요구 사이에서 위험을 분산하려는 푸치니의 전략 또는 고려가 있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신화적 영웅극’이었다. 바그너의 신화극에서처럼, 인간보다 신의 모습에 가까운 초월적인 주인공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투란도트 공주의 성격에서는 인간의 모습이 철저히 배제돼야 했다. 투란도트는 원작보다 한층 잔인하며 얼음처럼 냉혹하고 복수심 외의 감정은 갖지 않는 인물로 각색됐다. 극 초반에는 무대 상부의 높은 곳에서만 등장하며 연기는 지극히 절제돼야 한다.
1926년 투란도트 초연 포스터
낯선 문화권의 이질적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남성적 드라마의 선 굵은 성격을 살리기 위해 푸치니는 당시 ‘신음악’이었던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적 리듬과 불협화음을 차용했다. 두 대의 실로폰과 빈번히 등장하는 공 (서양 징) 등이 관현악에 이국적 음색을 더했다.
당연히 일반 대중들은 이런 실험을 좋아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예술적 진보성’을 요구하는 비평가들과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앞서 1918년의 ‘3부작’에서는 아예 새로운 실험(자니 스키키)과 당대 분위기에 영합한 사회극(외투), 푸치니 특유의 감상적 드라마(수녀 안젤리카) 등 세 개의 단막극을 한 패키지로 묶어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다.
다음 작품인 [투란도트]에서 푸치니는 이와 다른 해결책을 생각했다. 실험적인 현대극과, 자신이 이미 [라보엠], [나비부인] 등에서 익히 선보여온 감상적 드라마를 한 작품 속에 녹여 넣은 ‘하이브리드’극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실험적 작품의 헤로인은 ‘투란도트’, 감상적 작품의 헤로인은 시녀 ‘류’였다.
원래 고치의 [투란도트]에도 류와 상응하는 인물이 있었다. 자기 나라가 망한 뒤 투란도트 공주를 섬기는 타타르의 공주 ‘아델마’다. 말하자면 베르디 ‘아이다’의 헤로인과 유사한 존재다. 그러나 푸치니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른 인물을 창조했다. ‘새로운’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있다. 류에게는 앞선 푸치니의 헤로인들, 즉 [라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등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비극에 눈물을 보여 온 그의 고정팬들에게 류는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였다. ‘이름 알아내기’ 에피소드는 따라서 이 하이브리드 드라마의 한 축인 류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투란도트 공주는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 류를 고문하고, 류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도리아 자살사건
흥미로운 것은, 푸치니 사후 1년 뒤인 1925년 [투란도트]가 초연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가엾게 죽어간 류의 모습에서 실존했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푸치니의 하녀였던 도리아 만프레디였다.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는 성격이 불같고 질투심이 심한 여인이었다. 질투심 때문에 희생되는 오페라 [토스카]의 헤로인에 엘비라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는 설이 오늘날 충분히 설득력을 얻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엘비라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인 푸치니가 “나는 물새와 여성을 사냥한다”고 친구들에게 농담 섞어 이야기할 만큼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1908년, 말, 엘비라는 푸치니 저택이 있는 토레 델 라고 주변의 마을 마사추콜리에서 하녀 도리아를 ‘창녀’라고 욕하며 때렸다. 이 처녀는 며칠 뒤 해골 그림이 있는 살충제를 구입했다. 이듬해 1월 23일 음독했다. 28세였다. 닷새 뒤 배를 쥐어뜯으며 고통 속에 죽었다. 도리아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부검이 실시됐다. 의사는 도리아가 처녀였다고 판정했다.
전 유럽 언론이 이 흥미로운 스캔들로 달아올랐다. 푸치니는 로마에 있는 작곡가 토스티 부부의 호텔로 몸을 피했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 삶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다.”, “그렇게 착하고 따뜻한 아이가 죽다니. 끔찍하다”고 적었다. 호텔에서 권총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런 사건이 벌어졌던 만큼 류의 모습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도리아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가엾은 ‘시녀’의 죽음에서 푸치니의 가엾은 ‘하녀’를 연상했다.
가엾은 도리아의 희생이 다시 한 번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것은 그가 죽고 99년이 지난 2008년의 일이었다.
너무나 잘 알지만 밝힐 수 없었던 이름
2008년, 이탈리아인 파올로 벤베누티 감독의 영화 [푸치니의 여인]이 발표되었다. 영화는 세상이 놀랄만한 도리아 만프레디 사건의 숨은 진실을 밝히고 있었다. 형태는 극영화지만, 벤베누티 감독과 그의 스태프가 여러 해 동안 토레 델 라고 근처를 누비고 온갖 기록들을 조사하며 사건의 핵심에 다가간 결과를 담아낸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도리아는 [투란도트] 속의 류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밝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벤베누티 감독의 설명은 이렇다. 2006년 10월, 그의 스태프가 인근 마을의 피자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푸치니의 사생아라는 남자가 이 피자집에 들르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줄리아이며, 푸치니 생전에 그의 집에서 호수 반대편에 위치한 마사추콜리 마을에서 여인숙 겸 살롱을 운영하던 여성이었다. 혼자 살았고 독립심이 강했지만 정이 많아서 누구나 호감을 갖게 만드는 여인이었다고 했다.
벤베누티 감독은 이 얘기의 진실을 추적하다가 피사 근처 치사넬로 마을에 있는 집을 방문했다. 푸치니 사생아의 딸이라고 밝힌 나디아라는 여인이 나왔다. 그의 눈은 푸치니와 꼭 닮아있었다. 그는 벤베누티 감독에게 먼지 쌓인 트렁크를 꺼내 보여주었다. 40여 통의 편지가 나왔다. 푸치니가 보낸 편지였다. 수신인의 이름은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 집주인 나디아의 할머니이자, 푸치니의 죽은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의 사촌이었다.
벤베누티 감독은 더 많은 문서와 증언들에 접근한 끝에 다음과 같은 당시의 정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당시 푸치니는 일곱 번 째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작업 중이었고, 호수 반대편 마을에 사는 줄리아와 깊은 관계에 빠져 있었다. 자립적이며 꿋꿋한 살롱 운영자 줄리아의 모습은 [서부의 아가씨]의 여주인공 ‘미니’에 반영됐다.
어느 날, 하녀 도리아는 푸치니의 의붓딸 포스카와 [서부의 아가씨] 대본작가 구엘포 치비니니가 침대에서 엉켜있는 모습을 뜻하지 않게 발견했다. 포스카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다. 도리아가 자신의 부정을 누설할까봐 두려워진 포스카는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도리아의 행동거지가 수상하다고 비난했다. 엘비라는 여기에 낚였고, 도리아를 의심한 나머지 심한 모욕을 가했다.
줄리아 만프레디. 1910년경
도리아는 사촌 줄리아와 푸치니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누설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비밀을 무덤에 가져가기로 마음먹고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벤베누티 감독 팀은 푸치니가 이후 자신의 아들을 낳은 줄리아에게 돈을 보냈으며 그의 사망과 함께 송금도 끊어졌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푸치니와 줄리와의 관계에서부터 도리아의 사망까지의 정황은 영화 [푸치니의 여인]에 상징적으로, 그러나 상세히 그려졌다.1)
오페라 [투란도트]와 류의 관계에 대해 푸치니가 생전 직접 밝힌 기록이나 문서는 없다. 그러나 벤베누티 감독이 파헤친 정황증거들에 따르면 오늘날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푸치니가 [투란도트]에 원작에는 없는 이름 알아내기 일화를 집어넣은 것은, 앞에 소개했다시피 ‘투란도트 극’에 병렬되는 ‘류 극’을 만들어 현대성과 전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의도에 따른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푸치니는 ‘류’의 모습을 통해 억울하게 죽은 하녀 도리아에 대한 추모를 담으려 한 것이다.
더군다나 류가 ‘이름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은 실제 목숨을 버린 도리아의 모습과 일치한다. 결국 푸치니는 사람들이 류의 죽음에 측은함과 공감의 눈물을 흘리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도리아에게 바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다시, 헤로인의 죽음에서 펜을 놓다
[투란도트]에서 류 죽음의 장면을 완성한 직후인 1924년 11월, 푸치니는 여장을 꾸렸다. 아들 토니오를 대동하고 당대의 이름난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예정대로라면 [투란도트] 초연까지는 다섯 달이 남아 있었다.
브뤼셀의 전문의는 푸치니가 후두암에 걸렸다고 토니오에게 통보한 뒤 수술에 들어갔다. 25일, 의사는 이탈리아의 푸치니 저택에 ‘신께서 다행히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반가운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7일, 푸치니는 돌연 오선지를 달라고 토니오를 불렀다. 하지만 음표를 그릴 힘은 없었다. 푸치니는 오선지에 ‘가엾은 엘비라, 끝났소’라고 적었다.
잠시 후, 전 이탈리아에 조국의 위대한 아들이자 대음악가인 푸치니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죽음은 하나’. 만물의 주재자가 그에게 내린 판결이었다. 벨기에는 이 이국의 대가를 국장으로 애도했고, 장례식에는 6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푸치니의 갑작스런 사망은 누구에게나 충격이었지만 특히 스칼라 극장에서 [투란도트] 초연을 지휘하기로 돼 있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와 가까운 후배 오페라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에게 이어지는 부분의 작곡을 의뢰했다. 초연은 1년 연기됐다.
1926년 4월 5일 라스칼라에서 작품이 초연되던 날, 토스카니니는 3막 류의 죽음 장면까지 연주를 이어나간 뒤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는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친애하는 고 푸치니 선생께서는 여기까지 쓰시고는 펜을 멈추고 돌아가셨습니다.” 토스카니니는 퇴장했고 연주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그는 알파노가 마무리한 부분까지 전곡을 연주했다. 그 뒤 수십 년이 흘렀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중기 3대작에 필적하거나 어떤 면에서는 이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획득했다. ‘드라마틱하고 선 굵은 영웅 오페라’에 도전해 성공하겠다는 푸치니의 의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어떤 의지가 개입된 것일까. 푸치니는 결국 마지막 성공작마저도 앞선 [라보엠]이나 [토스카], [나비부인]처럼 헤로인의 희생을 그리고 펜을 놓아야 했다. 류의 죽음 이후를 마무리한 것은? 그것은 결국 푸치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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