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16세기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1494~1547)가 아니었다면 [모나리자]는 지금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아니라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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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주세페 베르디, 「신하들, 이 천벌을 받을 놈들」, 오페라 [리골레토] / 레나토 브루손,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 주세페 시노폴리(지휘) | |
2 | 주세페 베르디, 「여자의 마음」, 오페라 [리골레토] / 닐 쉬고프, 레나토 브루손,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 주세페 시노폴리(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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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모나리자]를 그리고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기로 결심한 건,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고서였다. “여기서 당신은 자유롭게 구상하고 사색하며 작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왕의 정중한 초대에 다 빈치는 프랑스 행을 마음먹었다. 이때 모나리자도 함께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왕실 화가 겸 건축가로 임명했고, 개인적으로는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다 빈치는 앙부아즈 성 인근의 저택인 르클로뤼세에서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냈다. 현재 이 저택은 다 빈치의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1519년 다 빈치가 사망하자 프랑수아 1세는 당시 금화 4000냥을 지급하고 [모나리자]를 구입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으로 [모나리자]를 옮겨온 건 프랑스 혁명 직후였다.
모나리자의 가치를 누구보다 일찍 알아보았던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대표적 르네상스형 군주로 꼽힌다.
그리 빼어난 수준은 아니었다고 해도 국왕 자신이 시인이었으며, 1530년에는 왕립 독서회를 창설했다. 이 독서회는 오늘날 고등 교육 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모태가 됐다. 1539년 빌레르 코트레 칙령을 반포해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행정 문서의 공식 언어로 채택한 것도 프랑수아 1세였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걸작들을 볼 수 있는 건, 그의 예술적 안목 덕분이기도 하다.
프랑수아 1세는 ‘환락의 왕’?
이처럼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거꾸로 문제적 탕아(蕩兒)로 남아 있다. 이는 19세기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85) 때문이다.
이전에도 프랑수아 1세를 인간적 결점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는 희곡이나 회고록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위고는 한걸음 더 나아가 1832년 희곡 『환락의 왕(Le Roi S’amuse)』에서 프랑수아 1세를 신이나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으로 묘사했다. 실제 프랑수아 1세가 방탕하기는 해도 마구잡이로 능욕을 일삼은 적은 없었고, 빼어난 시인은 아니었지만 예술의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다분히 섭섭한 평가였다.
『환락의 왕』에서 위고는 왕의 궁정을 어떠한 욕망과 감정도 제어되지 않는 ‘환락의 수라도(修羅道)’로 묘사했다. 궁정은 신하를 징벌하고 그의 여인을 취하며, 신하의 석방을 대가로 흥정을 벌이는 곳이다. 당초 작가가 구상했던 제목도 『환락의 왕』이 아니라 ‘권태의 왕(Le Roi S’ennuie)’이었다. 왕에게 가장 두려운 건 욕망이 아니라 욕망을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권태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 왕의 환희와 신하의 탄식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을 원하며, 모든 것을 가지련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즐거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 프랑수아 1세
“왕은 누군가의 집에서든 모든 즐거움을 앗아간다. 유혹당할 수 있는 누이와 아내, 딸이 있는 자는 누구든 조심하라. 권력자는 오로지 해칠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 신하
곱사등이 간신배의 비극
트리불레 삽화
이 희곡에서 왕에게 여인을 소개하는 채홍사이자 여흥을 돋우는 광대, 왕이 저지른 사건의 뒤처리를 도맡은 해결사이면서 동시에 ‘입속의 혀’처럼 구는 간신배가 곱사등이 광대 트리불레(Triboulet, 1479~1536)다. 그는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의 궁정 광대였던 실존 인물이었다. 작품 속에서는 왕정을 거역하기 힘든 궁정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다.
왕에게 딸을 빼앗기고 치욕과 고통을 호소하는 신하 앞에서도 트리불레는 “언젠가 건장한 손주를 보게 되어서 네 수염을 잡아당기고 무릎에 기어오르게 될 터인데 무슨 고민이냐”라고 면박을 준다. 그의 혀에는 분명 독이 들어 있다.
하지만 동이 트고 파티가 끝날 즈음, 유쾌했던 지옥도는 비극으로 변한다. 곱사등이 광대도 왕정에서 물러나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에는 무거운 가면을 벗고 평범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험한 세상에서 끝끝내 보호하고 싶은 딸이 그에게도 있다.
“내 딸, 하늘이 내게 허락한 단 하나의 행복이여. 남들은 부모 형제와 친구, 남편과 아내, 신하와 수행원, 조상과 여러 아이들이 있지만, 내게는 오로지 너뿐이구나! 너는 내 유일한 보물이고 행복이란다! 다른 사람들이 신을 믿을 때, 나는 너만을 믿을 뿐이란다.” - 『환락의 왕』
비운의 작품이 된 사연
『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의 꼽추』와 비교하면, 『환락의 왕』은 위고의 방대한 작품 중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작품에 속한다. 1832년 11월 22일 초연 직후 이 희곡은 사후(事後) 검열로 인해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훗날 위고는 아내 아델을 통해 정치적으로 미묘했던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1830~48)는 다르구 백작을 상공부 장관의 비서로 임명했다. 다르구 백작의 비서가 [카르멘]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였다.
메리메는 한 살 연상의 위고에게 작품 원고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위고는 변형된 형태의 검열로 여기고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위고는 “검열이 존재하지 않을 때만이 작가 스스로 자신을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혹독하게 검열하게 된다”라고 썼다.
하지만 정부의 요청이 거듭되자 위고는 결국 다르구 백작과의 만남에 응했다. 당시 백작과 위고의 대화는 지금 읽어도 흡사 고승의 선문답처럼 흥미롭다.
“위고씨, 저는 원칙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존중해야 할 것들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작품에는 왕에 대한 암시가 있다고 합니다.” - 다르구 백작
“뭐라고요? 루이 필리프에 대해서라고요? 프랑수아 1세에 대한 작품이 어떻게 루이 필리프에 대한 것으로 읽힐 수 있죠? 더구나 저는 암시를 남발하는 자들을 언제나 경멸해왔어요. 내 작품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 위고
초연 사흘 전에는 루이 필리프에 대한 테러 기도가 일어나는 불운마저 겹쳤다. 작품 초연 당일, 극장 객석에서는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지는 등 불온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환락에 빠진 왕이 젊은 처자를 능욕하거나, 광대가 왕의 살해 음모를 꾸미는 희곡의 줄거리는 자칫 왕의 시해를 선동하는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다분했다. 위고의 희곡을 전공한 연극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안느 위베르스펠드는 이 작품에 대해 “당대의 도덕과 문학적 관례, 역사적 관습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모두 도발로 받아들여졌다”라고 분석했다.
불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환락의 왕』은 수차례 상연 금지 끝에 초연 반세기 이후인 1882년 재공연됐다. 하지만 당시에도 냉담한 혹평이 쏟아지는 바람에 프랑스의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 목록에서 빠지고 말았다. 그 뒤 80년간 파리의 극장가에서 사라지면서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재평가할 기회조차 사라졌다.
잊힌 작품에서 불멸의 걸작으로
잊힌 작품으로 남아 있던 위고의 불운한 희곡을 불멸의 걸작으로 되살린 공신이 작곡가 베르디다. 그는 대본 작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환락의 왕』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자 아름다운 희곡”이라며 “왕의 광대인 트리불레는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한 인물상”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베르디와 피아베는 1844년 위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에르나니]부터 호흡을 맞췄던 사이였다.
“이런 주제라면 결코 실패할 리 없다”라면서 확신에 찼던 베르디는 40여 일 만에 작곡을 마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검열이 문제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당국이 작품의 개작을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원작의 배경인 파리는 이탈리아 북부의 만토바로 옮겼다. 프랑수아 1세는 만토바의 공작, 트리불레는 프랑스어의 ‘익살꾼(Rigolo)’에서 유래한 리골레토로 각각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오페라는 1851년 3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됐다.
당시 작곡가 베르디는 “온몸을 던져서라도 공연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유력 인사를 찾아달라”는 편지를 대본 작가에게 보낼 정도로 초조한 심경을 드러냈다.
빅토르 위고의 연극과 베르디의 오페라 사이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이윽고 1861년 프랑스 파리에도 상륙했다. 당초 위고는 “내 희곡을 서툴게 흉내 내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진력이 난다”라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오페라의 3막 4중창을 본 뒤에는 “가능하다면 나도 희곡에서 등장인물 4명이 동시에 말하게 하고 싶다. 관객들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감정을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텐데”라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연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말하면 소음으로 전락하지만, 반대로 오페라에서는 매혹적인 화음을 빚어낸다는 점을 꿰뚫어본 것이었다.
연극과 오페라의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왕과 광대의 대비를 통해서 블랙 코미디의 성격을 강조했던 원작과 달리, 오페라 [리골레토]는 광대의 고뇌에 초점을 맞추면서 신하의 의무와 부정(父情) 사이에 짙은 음영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악당이나 하인 같은 평면적 역할에 머물렀던 바리톤에 애끊는 부성애(父性愛)와 비극적 주인공의 면모를 부여해 복합적 성격과 입체감을 살려낸 ‘베르디 바리톤’의 탄생이었다.
“신하들, 이 천벌을 받을 놈들, 얼마나 받고 내 보물을 팔아먹었나. 네놈들은 돈밖에 모르겠지만 내 딸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보물. 돌려다오, 그렇지 않으면 이 손에 너희들의 피를 묻히겠다. 딸의 명예를 지키려는 자에게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다.” - 베르디의 [리골레토] 가운데 아리아 「신하들, 이 천벌을 받을 놈들」
이렇듯 리골레토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정작 딸의 정절과 목숨마저 빼앗는 왕의 만행에 나약하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만다. “왕을 위해 다른 여인들을 납치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을 빼앗기고, 왕을 암살하고자 하지만, 딸을 죽음에 빠뜨리고 만다”라는 위고의 해설처럼, 리골레토는 ‘이중의 역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원작의 마지막 대사도 “내가 내 아이를 죽였구나”라는 처절한 통곡이다.
하지만 왕은 리골레토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여전히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즐겁게 흥얼거린다. 이처럼 죄지은 자는 회개하기는커녕 잘못을 깨닫지조차 못하고, 가벼운 희극으로 출발했던 이야기는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리골레토, 아버지의 초상
이 광대의 비극에는 부조리와 고된 노동, 불안한 미래에도 지친 육신을 누일 곳마저 쉬이 찾지 못하는 아버지의 형상이 어려 있다. 가정을 위해서라면 울음을 기꺼이 삼키고 거짓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말로 작품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동력이다. 그렇기에 [리골레토]는 우리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작품의 현실성과 비극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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