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희곡 "피가로의 결혼"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 예술이 혁명을 예고하는 순간

히메스타 2017. 11. 2. 17:02

예술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까. 언뜻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일이 지극히 예외적인 순간에는 일어난다. 이를테면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5년 전에 연극으로 초연된 피에르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 1732~99)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이 그랬다. 여성과 하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연합해서 남성 귀족을 혼내주고, 귀족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에 통렬한 야유를 보낸다는 내용만으로도 이 작품은 불온하게 보이기에 충분했다.

영국 로열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된 [피가로의 결혼], 2014년

백작을 기득권 세력으로 놓고 보면, 계층적으로는 하인 피가로, 성별로는 백작 부인이 약자다. 하녀 수잔나는 성별과 계층에서 모두 약자가 된다. 작가 보마르셰는 “스페인의 영주는 젊은 여인을 유혹하려고 하지만, 계층이나 부유함이라는 면에서 모두 전지전능한 절대 군주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영주의 부인과 하인, 하녀가 손을 잡는다”라면서 창작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음악리스트
No.아티스트 & 연주 
1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 / 안나 토모바 신토브, 졸탄 켈레멘, 일레아나 코트루바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카라얀(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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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은 사랑의 화살표?

희곡 『피가로의 결혼』 작가, 보마르셰의 초상

오늘날 TV의 ‘짝짓기 프로그램’처럼 희곡의 외양은 복잡한 ‘사랑의 화살표’로 이루어져 있다. 시동 케루비노는 백작 부인을 연모하고, 백작 부인은 여전히 백작을 그리워하지만, 변심한 백작은 하녀 수잔나를 넘보고, 수잔나는 하인 피가로와 무사히 결혼하고 싶어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외양은 현실 풍자라는 쓰디쓴 약을 감추기 위한 당의정에 가까웠다.

전작인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의 도움으로 로지나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속편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서 거꾸로 백작은 피가로의 약혼자인 수잔나에게 눈독을 들인다. 백작 부인이 된 로지나는 남편의 변심에 속수무책으로 슬퍼할 뿐이다.

봉건적 질서를 과녁으로 삼다

배은망덕한 건 하인이 아니라 주인이다. 작품의 출발선부터 귀족은 이미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 따라서 이 희곡은 급진적이면서도 불온한 블랙코미디가 된다. “사회적 불합리함에서 출발할 때만 위대한 비장미나 심오한 도덕성, 진정한 희극성에 다다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작품의 유쾌한 웃음은 권력관계가 뒤집히는 전복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보호자가 아니라, 그들의 악행을 그대로 묘사하는 화가”라는 보마르셰의 관점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면서 참여적인 것이었다.

희곡 『피가로의 결혼』 작가, 보마르셰의 동상

봉건적 질서를 과녁으로 삼았던 작가 보마르셰가 이 과녁을 맞히기 위해 꺼내든 화살이 ‘초야권()’이다. 초야권이란 말 그대로 영지의 처녀들이 결혼하기 전에 귀족이 첫날밤의 권리를 행사한다는 의미다. 인신()의 봉건적 예속을 상징하는 용어지만, 지금도 직장 상사의 성적 희롱을 뜻하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희곡 5막에서 피가로는 장문의 독백을 통해 주인 알마비바 백작에게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다.

“안 되지요, 주인님, 당신은 그녀를 가질 수 없어요. 당신이 귀족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줄 아시나 보지요! 귀족이나 부유함, 직위나 직책은 모두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이걸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당신이 했던 수고라고는 고작 태어나는 것뿐이었어요. 출생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 - 보마르셰, 『피가로의 결혼』

이 구절은 봉건적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과도 같았다. 이처럼 보마르셰가 당대의 신분 사회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작가이자 시계공, 발명가이자 음악가, 외교관이자 비밀 정보원, 무기 거래상이자 혁명가로도 활동했던 복잡한 삶의 이력 덕분이다.

희곡 작가 보마르셰의 인생 역정

보마르셰는 1732년 시계공 집안에서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대 서민 집안처럼 그 역시 2년 만에 정규 교육을 마치고 아버지의 시계 공방에서 일했다. 어릴 적 곧바로 생계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경험은 『피가로의 결혼』의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케루비노의 모습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보마르셰는 21세에 시계추의 제어 장치를 발명해 왕실에 제출할 만큼 기술도 빼어났다. 그는 이 발명으로 국왕 루이 15세 부부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고 궁정에 납품하는 신분으로 격상됐다.

재능 있고 야심만만했던 이 청년에게 출세의 발판이 됐던 건 결혼이었다. 1755년 보마르셰는 왕실의 검사관 겸 서기였던 프랑케를 처음 만났고, 당시 투병 중이던 그에게서 왕실 직책을 매입했다. 이듬해 프랑케가 타계하자 보마르셰는 프랑케의 부인이었던 마리 크리스틴 오베르탱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작가는 아내의 출신 지역인 ‘마르셰 숲(le Bois Marchais)’을 따서 스스로를 보마르셰(Beaumarchai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다음 해 세상을 떠났고, 1768년 보마르셰는 또 다른 미망인 제네비예브와 재혼했다. 하지만 제네비예브마저 3년 뒤에 세상을 떠나자 보마르셰가 두 아내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잦아들지 않았다.

왕실에 입성한 보마르셰는 루이 15세의 네 딸에게 하프를 가르치는 음악 교사가 됐다. 서른 살이 되기 직전에는 왕실 고문 겸 비서 직위를 매입했다. 이때부터 그는 보마르셰라는 성을 정식으로 사용했다.

보마르셰가 작가로 재능을 드러낸 건, 35세 때인 1767년 첫 작품 『외제니』를 발표하면서였다. 1770년에는 두 번째 희곡 『두 친구』를 상연했지만, 흥행 참패를 겪었다. 하지만 1775년 그의 『피가로』 3부작 가운데 첫 작품에 해당하는 『세비야의 이발사』가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되면서 작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피가로의 결혼』이 두 번째, 『죄지은 어머니』가 세 번째 작품이다.

이 남자의 야망은 비단 문단에만 그치지 않았다. 1774년에는 왕실의 밀명을 받고 루이 16세에 대한 비방문을 거둬들이기 위해 런던과 빈, 플랑드르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인 미국 식민지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 외교에도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보마르셰는 빈에서 스파이라는 오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당시 경험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의 심부름꾼이자 책략가, 외교관 역할을 맡은 피가로에 투영됐다.

1781년 『피가로의 결혼』은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 목록에 포함됐다. 하지만 작품 초연에 앞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희곡 낭독회에 참석한 국왕 루이 16세는 작품에 대해 “저속한 취향”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귀족 사회에 대한 불만과 힐난이 담긴 피가로의 후반부 독백에 대해 국왕은 “혐오스럽다”라고 표현했다.

작품의 운명

이때부터 작품의 상연 여부를 두고 6차례나 검열이 진행되면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작가는 희곡 낭독회를 개최하면서 작품을 알리려 애썼고 1783년 므뉘 플레지르 극장에서 공연이 잡혔지만, 마지막 순간에 왕명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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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랭,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 1783년

앙토냉 프랑수아 칼레, [루이 16세의 초상], 1779년

보마르셰는 일평생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감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질서에 대한 냉소나 풍자 역시 멈추지 않았다. 1785년 3월 법정 다툼에 휘말린 작가가 발표한 글이 루이 16세의 격분을 사는 바람에 보마르셰는 1주일간 구류를 살았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뒤 『세비야의 이발사』가 궁정에서 공연될 당시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로지나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작가와 프랑스 왕정 사이의 악연은 얄궂기만 했다. 연극 『피가로의 결혼』은 우여곡절 끝에 1784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뒀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이 극장에서만 111차례 상연될 정도였다.

모차르트가 궁정의 위촉 없이 작곡한, 첫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대본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건너온 작곡가 모차르트가 새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필사적으로 찾던 것은 이 무렵이었다. 1783년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애타는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최소한 100여 편의 대본은 읽어보았지만, 단 한 편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네요. 적어도 많은 분량을 고쳐야 하고,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쓰는 편이 편할 정도에요. 결국은 새로운 것이 더 좋은 법이지요.”

이탈리아 오페라를 쓰기 위해 대본을 찾아 헤매던 모차르트는 보마르셰의 원작을 구해 읽은 뒤 빈의 궁정 작가였던 로렌초 다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에게 대본 작업을 의뢰했다. 다폰테는 대본을 완성한 뒤 “진정으로 새로운 작품”이라며 자신만만해했다. 모차르트에게도 이 작품은 궁정이나 귀족의 위촉 없이 자유롭게 작곡한 첫 오페라가 됐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로 이어지는 모차르트와 다폰테 콤비의 3부작이 탄생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는 당초 보마르셰의 희곡에 대해 “모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라며 상연을 금지했다. 하지만 1785년 모차르트가 6주 만에 작곡을 마치자 다폰테는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오페라 상연을 요청했다. 결국 원작의 직설적인 비판을 삭제하거나 누그러뜨리고 작곡가가 황제 앞에서 일부 장면을 발췌로 연주하는 노력 끝에 오페라 상연을 허가 받았다. 더불어 희곡의 5막도 오페라에서는 4막으로 축소됐고, 등장인물도 16명에서 11명으로 줄어들었다.

로렌초 다폰테의 초상, 19세기

1786년 5월 1일 빈의 궁정 극장에서 오페라가 초연될 당시, 객석에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언제나 노심초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오페라를 관람한 뒤 자신의 딸이자 모차르트의 누이였던 난네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네 동생의 둘째 날 공연에서는 5곡에 대해 앙코르가 쏟아졌단다. 세 번째 공연에서는 7곡을 다시 불렀지. 그중에서 짧은 이중창은 세 번이나 불러야 했단다.”

이렇듯 앙코르 요청이 물밀듯 쏟아지자 공연 시간이 한없이 늘어날 것을 염려한 왕실에서는 “독창 이외에는 앙코르를 하지 말 것”이라는 독특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오페라의 이중창 가운데 하나가 영화 [쇼생크 탈출]의 감옥 장면에서 흘렀던 [편지의 이중창]이다. 백작 부인이 머릿속에 떠올린 구절들을 수잔나에게 편지지에 받아 적도록 하는 형식이다. 그렇기에 노래 역시 짧은 가사를 이어 부르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언뜻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이지만, 실은 알마비바 백작을 꾀어내 망신을 주기 위한 책략이 담긴 노래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 포근한 산들바람이 살랑거리네. 숲 속의 소나무 아래. 나머지는 그가 알 거야.” -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편지의 이중창’

이 편지를 건네받고 수잔나와 밀회하기 위해 나갔던 알마비바 백작은 결국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처지가 되고 만다. 희극이나 오페라의 막이 내릴 때 등장인물들은 멋쩍게라도 웃을 수 있었지만, 역사의 실존 인물들은 웃을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페라 초연 3년 뒤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것이었다.

바스티유 함락, 1789~91년경

보마르셰의 희곡에서 로지나 역을 연기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신의 목이 잘릴 것이라고 짐작했을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허가했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 간 자신의 누이동생 앙투아네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의 독자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너무 익히 알려진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을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80여 년 뒤에는 결실을 낳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예언처럼 그대로 적중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역시 구체제라는 과녁을 관통한 화살이자, 프랑스 혁명이라는 뇌관을 장착한 시한폭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