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탈주자의 오페라
“모든 여자는 쓸개즙처럼 쓰다. 하지만 달콤한 순간이 둘 있으니 하나는 침대에 있을 때고, 다른 하나는 죽었을 때다.”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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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메의 원작 소설은 1830년대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답사하던 고고학자인 작중 화자가 우연히 탈영병 돈 호세와 만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첫 장면부터 돈 호세는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에는 26년간 프랑스 문화재 위원회 감독관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와 그리스, 스페인을 탐방했던 작가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 메리메는 프랑스가 남다른 경쟁력을 지닌 문화재 복원과 보존의 선구자로 꼽힌다(메리메의 업적을 기려서 프랑스의 문화 유산 목록은 ‘메리메 데이터베이스(base Mérimée)’로 불린다).
스페인 귀족 이달고(hidalgo)와 투우사 피카도르(picador), 사법권을 가진 시장인 코레지도르 (Corregidor)까지 스페인과 연관된 소설의 표 현은 150여 개에 이른다. 작가 메리메는 1824년부터 스페인의 공연과 박물관, 문학에 대한 글을 프랑스 잡지에 꾸준하게 기고했다. 그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을 처음으로 방문한 프랑스인 가운데 하나였다. 1845년 작품 출간 당시에도 그는 스페인을 답사하던 중이었다. 처음엔 직업적 이유로 스페인에 관심을 쏟았지만, 스페인 방문은 작가에게 문학적 재능을 펼칠 계기가 됐다.
메리메를 낳은 풍부한 예술적, 정치적 환경
작가의 아버지인 레오노르 메리메(1757~1836)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파리 이공과 대학교수를 지낸 교육자였다. 어머니는 『미녀와 야수』를 쓴 여성 소설가 장 마리 르 프랭스 드 보몽(Jeanne-Marie Le Prince de Beaumont)의 손녀로 초상화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천혜의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작가는 그림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물려받았고, 유년 시절은 박물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틈날 때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크로키를 하거나 수첩과 노트의 여백에 스케치를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메리메는 동료 스탕달(Stendhal)에게 “형식이나 색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이야기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타박하기도 했다. 메리메가 화가라면, 『카르멘』은 그가 그린 그림과도 같았다.
예술과 역사 이외에 작가가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분야는 언어였다. 그는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스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했고, 러시아 문학을 프랑스에 소개한 번역가였다. 푸시킨(Aleksandr Seraggvitch Pushkin)의 『스페이드의 여왕』과 투르게네프의 소설 등이 그의 번역을 통해 프랑스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바스크 지역과 집시 언어에도 관심을 쏟아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 봉기 당시인 1871년에 일어난 화재로 그의 집에 소장된 작가의 원고와 희귀 서적, 자료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고고학과 언어, 문학과 미술까지 작가의 다재다능함은 오히려 문학적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메리메는 1865년 투르게네프에게 “나를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싶었고 해야 했던 게 아니라 다른것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나는 머리에 쓸 만한 것을 담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이라고 후회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메리메의 소설에서는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찔려 죽음을 택하는 결말 이후에도, 스페인 집시의 기원과 풍습, 언어와 종교에 대한 해설을 부록처럼 덧붙이고 있다. 액자식 구성이었던 소설도 다시 현장 관찰기로 변한다.
“스페인은 오늘날 유럽 전역에 흩어져있는 집시를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들은 보헤미안, 지탄, 집시, 지고이네르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대부분은 안달루시아나 에스트라마루다 같은 남부와 동부에서 유랑 생활을 한다. 카탈루냐의 보헤미안들은 자주 프랑스를 지나가기 때문에 프랑스 남부의 장터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남성들은 말 장수와 수의사, 노새 털 깎는 일을 하거나 냄비나 구리 연장을 고치는 일에 종사한다. 밀수와 다른 불법적인 거래도 물론이다. 여성들은 점을 치고 구걸을 하거나 온갖 약을 판다.” - 메리메, 『카르멘』
메리메는 1831년 상공부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다르구 백작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현실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파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는 방역 조치를 책임졌다. 메리메는 1834년 문화재 위원회의 조사관으로 임명됐고, 5년 뒤에는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관심과 역할을 문화 영역으로 한정 짓고자 했지만, 현실 정치는 한번 붙잡은 그의 발목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스페인 답사 시절부터 친분을 쌓았던 몬티호 백작 부인의 딸 외제니가 나폴레옹 3세와 결혼하면서, 메리메는 황실의 측근으로 급부상했다. 1853년 메리메가 상원의원이 되자, 프랑스 문단에서는 “말없이 길을 뚫는 야심 많은 두더지”라고 비난하며 등을 돌렸다. 청년 시절부터 교유했던 작가 빅토르 위고와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소설의 서늘한 냉기
소설 『카르멘』은 화자의 입장에서 돈 호세와 카르멘의 파멸적 사랑을 지켜보는 관찰기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려하고 감상적인 낭만주의와 거리를 취하고, 시종 차갑고도 건조한 어조로 일관한다.
“메리메는 독자들의 마음에 즉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영향은 오히려 독서가 끝났을 때 시작된다. 그는 빈약하게 보일 만큼 건조하게 묘사한다. 등장인물의 행위를 빠르게 묘사해서 인물상은 가리워진다. 그들은 짧은 묘사 후에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꼭두각시와 같으며 카드놀이의 패와도 같다” - 프랑스 작가 발레리 라르보
이처럼 소설의 서늘한 냉기는 오페라의 뜨거운 열기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오페라와는 달리, 원작 소설에는 돈 호세를 연모하는 순수한 여인 미카엘라가 등장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돈 호세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없다. 반면 원작 소설에서 단역에 불과했던 투우사 뤼카는 오페라에서 카르멘을 사이에 두고 돈 호세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에스카미요로 전면에 부각된다.
파멸적이고도 어리석은 사랑
오페라와 달리,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카르멘은 전통적 미인상이 아니다. 기존 관습과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팜 파탈(femme fatale)’은 언제나 전통적 미인상에서 한걸음 비켜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이하고 야만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처음 볼 때는 놀라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특히 눈은 사나우면서도 관능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인간의 시선에서도 느낀 적이 없었다. 보헤미안의 눈, 늑대의 눈. 스페인 속담은 좋은 해답을 준다. 늑대의 눈을 보기 위해 식물원에 갈 시간이 없다면, 참새를 노리는 고양이의 눈을 떠올려보라.” - 메리메, [카르멘]
파멸적 사랑은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기분 좋은 설렘이 아니다. ‘나쁜 남자’나 ‘팜 파탈’인 줄 알면서도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에 가깝다. 본디 모든 사랑은 조금씩 어리석음을 내포하고 있다지만, 이 사랑은 ‘어리석다(癡)’는 의미에서도 전형적인 치정(癡情)이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간청에 못 이겨 호송 도중에 풀어주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갇힌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돈 호세는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여자들 중에서도 여전히 카르멘의 흔적을 더듬는다. 감옥에서도 그녀가 던져준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고 행복에 잠긴다. 오페라 2막에서 돈 호세가 부르는 노래가 흔히 ‘꽃노래’로 불리는 아리아 [그녀가 내게 던진 꽃 한 송이]다. 어찌 보면 팔자를 망친 신세 한탄의 노래이지만, 카르멘 앞에서 영락없이 흔들리고 마는 돈 호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당신이 던진 이 꽃은 감옥 속에서도 내 곁에 있네. 시들고 말랐지만, 달콤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몇 시간이건 눈을 감으면 이 향기에 나는 취하네. 한밤중에는 당신이 보여. 너를 저주하고 미워하자고 결심하고 나 자신에게 되묻기도 했어. 어째서 운명은 내 앞길을 가로막았는지. 그리고 내 저주를 스스로 뉘우쳤고 나 스스로 느꼈어. 단 하나의 욕망, 단 하나의 소망밖에 없다는 걸. 너를 다시 만나는 것, 오 카르멘, 너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지.” - 아리아 「그녀가 내게 던진 꽃 한 송이」
“10년 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질 오페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비제의 오페라가 초연된 건 1875년 3월 3일이었다. 낭만주의 오페라의 홍수 속에서 집시와 탈영병, 하층민과 도적이 전면에 등장하는 이 작품은 관객이나 비평가들을 적잖이 불편하게 했다. 당초 “청중의 취향에 맞춰 즐겁고 쉬우며 행복한 결말을 지닌 작품”을 희망했던 극장 측의 충격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1 파리 코미크 극장의 초연 당시 포스터, 1875년 2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카르멘이라는 이름] 영화 정보 보러가기 |
이미 협심증과 후두종양, 류머티즘이 겹쳐서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던 비제는 초연 3개월 뒤인 6월 3일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 트리니테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작곡가의 때이른 타계를 애도하는 추도객 4000명이 운집했다.
하지만 작곡가의 죽음은 작품의 진가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비제가 3개월만 더 살았다면 오스트리아 빈을 필두로 유럽 전역의 오페라 극장에서 불기 시작한 [카르멘] 열풍을 지켜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빈에서 이 작품을 보았던 브람스는 “비제를 포옹하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연 이듬해 파리에서 [카르멘]을 관람한 차이콥스키도 “앞으로 10년 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04년에 이르면 [카르멘]은 세계 전역에서 1,000회 공연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찰리 채플린과 장 뤽 고다르, 카를로스 사우라 같은 영화감독도 [카르멘]을 자신의 필름에 담았다. [카르멘]은 낭만과 반항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화해를 거부한 탈주자의 오페라
[카르멘]에 숨어 있는 사랑과 죽음의 상관관계를 누구보다 일찍 간파했던 철학자는 니체였다. 청년 시절 니체는 바그너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지만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을 본 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앞에서 침몰했다”라고 비판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바그너의 그늘에서 벗어난 니체가 피난처이자 탈출구로 여기며 환호했던 오페라가 비제의 [카르멘]이었다.
“젠타(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의 여주인공)의 감상주의적 흔적은 없다! 오히려 사랑은 가혹하고 운명적이며 냉소적이고 순진무구하면서도 잔인하다. 그래서 사랑은 자연적이다. 싸움은 사랑의 수단이고, 남녀의 철저한 증오가 사랑의 근저에 놓여 있다. 나는 사랑의 본질을 이루는 비극적 정서가 이처럼 격렬하게 표현된 경우를 알지 못한다.” - 니체, 「바그너의 경우」
바그너 오페라의 주인공들에게 비극이나 파국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종교적 숭고함이나 남성의 구원을 위해 묵묵히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의 드라마가 훗날 융기한 파시즘과 은밀히 공유했던 비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르멘]의 비극은 정반대다. 기존 질서의 외부인이자 이방인인 등장인물들은 삶이든 사랑이든 화해와 정착을 거부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이런 점에서 [카르멘]은 무엇보다 탈주자의 오페라이며 불온한 음악극이다.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를 흥분시키는 건, 낡은 질서와 고정 관념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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