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발생지를 찾아서 미시시피 강의 하류로 내려가면 도착하는 최종 기착지가 뉴올리언스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뉴올리언스는 대대로 면화와 곡물을 수출했던 항구 도시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으로 끌려온 흑인들이 첫발을 내딛는 신대륙이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아일랜드와 독일 등 유럽 전역의 이민자들이 뒤섞이는 도시였다. 뉴올리언스는 탄생부터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였다. 재즈는 이 용광로의 열기로 빚어낸 음악이었다.
1718년 뉴올리언스를 개척한 프랑스는 당시 루이 15세의 섭정공이었던 오를레앙 공(公) 필립 2세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오를레앙(누벨 오를레앙)’이라고 명명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는 영국에 맞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편에 섰던 프랑스가 탄약과 군수품을 지원했던 통로였다. 1803년 나폴레옹은 뉴올리언스가 포함된 루이지애나주의 소유권을 당시 1,500만 달러의 가격에 미국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후손인 크레올은 이후에도 프랑스어권 인구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이민을 장려했다. 결과적으로 더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뉴올리언스로 유입됐다. 20세기 초까지도 4명 가운데 1명이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미국 속의 프랑스’가 뉴올리언스였다.
1731년 프랑스 작가 아베 프레보(Abbé Prévost, 1697~1763)가 발표한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마농 레스코』)의 마지막 배경이 뉴올리언스다. 도박과 사기, 감금과 살인 등의 죄명을 쓰고 추방된 마농과 연인 데 그리외의 눈에 비친 뉴올리언스는 황량한 유배지와도 같았다.
고립무원의 땅, 뉴올리언스
“두 달간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들은 기다리던 해안에 도착했다. 첫눈에 이 땅은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황폐하고 인적이 드문 들판에는 바람으로 벌거숭이가 된 나무 몇 그루와 갈대뿐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의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선장의 명령으로 대포를 몇 발 발사하자 누벨 오를레앙 주민들이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프레보, 『마농 레스코』
낡은 관습이나 신분 질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신대륙에서 이들 연인은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18세기 초 뉴올리언스에 몰려든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데 그리외는 마농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사랑의 참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벨 오를레앙에 와야만 하오. 여기서만 질투나 배신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소. 금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우리가 더욱 값진 보물을 찾은 건 누구도 모를 거요.”프레보, 『마농 레스코』
하지만 데 그리외는 마농에게 눈독을 들이는 지역 촌장의 조카와 결투를 벌인 끝에 사막으로 달아나고 급기야 마농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숨을 거둔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공간인 동시에, 퇴로마저 막힌 고립무원의 상징이었다.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마농 레스코』는 말 그대로 ‘막장극(劇)’이기도 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사랑
『마농 레스코』는 사랑의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연인들이 저지르는 탈주와 탈선의 서사시다. 두 번의 납치와 네댓 차례의 절도, 두 번의 살인과 한차례의 화재, 네 번의 투옥과 한 번의 감금, 한차례의 추방과 한 번의 탈출 등 범죄 일람표와도 같은 이 소설은 순전히 자의로 신세를 망치는 이야기다.
사막 한복판에서 숨을 거두는 마농의 모습
주인공 데 그리외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행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최후의 불행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라는 것을. “가장 빛나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운명이나 자연의 혜택을 누리기보다는 어둡고 방랑하는 삶을 선택했다”라는 것을. “불행을 겪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처럼 신분제의 낡은 질서가 흔들릴 때, 청춘 남녀들 사이에서 번지는 열병이 자유연애다. 하지만 봉건적 사슬에서 막 풀려난 젊은 남녀를 다시 옥죄는 밧줄이 경제적 능력이다. ‘유지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인 ‘앙트르트니르(entretenir)’에 ‘첩(妾)을 두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고로 홀로 설 수 없는 자는 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자유연애의 기본 전제는 이제나저제나 경제적 자립인 것이다.
지조 없는 여인 마농은 가난한 학생 데 그리외의 순수한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향락과 쾌락에 몸을 내맡긴다. 데 그리외가 곤궁한 처지에 빠질 때마다 마농은 “세상에 진실로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지만, 파산할 지경이라면 정조란 어리석은 미덕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편지만을 남긴 채 어김없이 떠난다. 소설은 세무관리인 B의 정부(情婦)가 된 마농을 “B의 보살핌을 받는다”라고 표현한다. 경제적 지원이 결부된 육체적 관계를 흡사 ‘스폰서’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소설에서 마농은 그를 세 번이나 버리고 달아났다. 데 그리외에게도 마농을 잊을 기회는 세 번이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체념했다면, 이처럼 지독한 사랑 이야기도 애당초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데 그리외를 “선악이 뒤섞여 있고, 양식(良識)과 나쁜 행동이 영원히 대조를 이루는 모호한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수도원 앞에서 마농 레스코와 데 그리외가 처음 만나는 모습
남녀의 어리석은 사랑을 치정(癡情)이라고 부르는 건, 그 사랑이 육욕으로 얼룩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멸로 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질긴 악연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마농은 처음 만난 데 그리외의 유혹에 흔들려 파리로 달아난다. 데 그리외에게도 성직자가 될 기회가 있었지만 제 발로 수도원을 박차고 나온다. 데 그리외는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마다 사심 없이 발 벗고 도와줬던 수도사 친구 티베르주 앞에서 육욕과 쾌락을 찬양하고, 종교를 모독하는 불경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비록 사랑은 종종 사람을 속이지만 최소한 만족과 기쁨을 약속한다네. 반면 종교는 사람들이 슬픈 고행만 겪도록 바라지 않은가.”프레보, 『마농 레스코』
작가의 삶이 담긴, 미친 사랑의 노래
이 ‘미친 사랑의 노래’에는 젊은 날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방황했던 작가 프레보(Abbé Prévost)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 유년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아버지의 손에 자랐던 프레보는 프랑스 북부 에스댕의 예수회 기숙학교에서 신학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그가 진학하고자 했던 북프랑스의 유서 깊은 두에 대학이 반(反) 프랑스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는 ‘신학’ 대신 ‘군대’를 택했다. 작가가 불과 16세 때의 일이었다. 그 뒤로도 수사(修士)와 군인 생활, 탈영과 사면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자신이 빚어낸 주인공 데 그리외보다도 더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비극으로 끝난 작품의 주인공들과 달리, 작가의 말년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1734년 베네딕트 수도원의 사제로 돌아온 그는 파리 인근 샹티이의 수도원에 머물면서 저술 작업에 매달렸고 평생 130여 편의 소설과 기행문을 남겼다. 해외를 떠돌던 시절에 작가는 자신을 ‘추방된 프레보(프레보 데그질)’라고 불렀지만, 프랑스로 귀국한 뒤에는 ‘신부 프레보(아베 프레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가 그의 본명이지만, 지금도 아베 프레보로 더욱 친숙하다.
인기를 누린 금서
『마농 레스코』는 일찍이 프랑스 문학사에서 볼 수 없었던 부도덕한 여인의 탄생이었다. 타락한 여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공주와도 같은 마농의 이율배반적 매력은 어떤 작품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소설에서 각각 17세와 15세로 설정된 이들 ‘철부지 남녀’는 흡사 타락한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다.
프랑스에서 이 소설은 1731년 출간과 동시에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다. 하지만 네덜란드 등 주변국에서 들여온 해적판이 은밀하게 유통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1753년 작가 스스로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의 표현 수위를 누그러뜨리고 도덕적 교훈을 덧붙인 개정판을 낸 뒤에야 정식 출판 허가를 받았다. 『마농 레스코』는 연애지상주의 시대의 ‘교과서’인 동시에, 사랑의 극한이 어디까지인지 묻는 ‘시험지’였다.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도 이 작품에 매료된 독자는 적지 않았다. 사드 백작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보다도 『마농 레스코』를 높게 평가하면서 “이 매력적인 작품을 읽은 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는가!”라고 감탄했다. 삼권 분립을 설파한 프랑스 계몽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데 그리외의 행동이 아무리 저열해도, 그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고상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옹호했다. 독일의 괴테는 청년 시절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에 실패한 뒤 이 소설을 읽었던 경험을 훗날 자서전에 기록했다. “실연과 같은 고통을 자극하는 데 프레보의 소설만큼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라는 독일 문호의 고백에서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오른다.
마스네의 마농
소설 출간 이후 데 그리외와 마농은 오페라와 발레, 영화까지 예술 장르의 남녀 주인공 자리를 독식하기에 이르렀다. 시기상으로는 1830년 작곡가 알레비의 발레 [마농 레스코]와 1856년 다니엘 오베르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가 앞선다. 하지만 최초의 세계적 히트작은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가 1884년 발표한 오페라 [마농]이었다.
마스네가 당초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의뢰를 받았던 작품은 『마농 레스코』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포이베』였다. 이 작품의 진척이 여의치 않자 마스네는 위촉을 사양하기 위해 대본 작가 앙리 메이약을 찾아갔다. 하지만 메이약의 서재에서 소설 『마농 레스코』를 발견한 마스네는 그 자리에서 오페라 대본 집필을 의뢰했다. 이틀 뒤에 첫 두 막의 대본을 써온 메이약은 마스네와의 식사 자리에서 대본을 식탁보 밑에 슬그머니 놓아뒀다. 대본을 받은 마스네는 1882년 작가 프레보가 『마농 레스코』를 집필했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집에 머물면서 작곡에 매달렸다. 마침내 이 오페라는 1884년 초연 이후 35년간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1,000회 공연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야심찬 푸치니의 출세작
마스네의 여주인공이었던 마농 레스코에 도전장을 던진 이탈리아의 후배 작곡가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였다. 그는 당시 오페라 [빌리]와 [에드가] 등 두 작품을 발표한 ‘신인급 작곡가’였다. 하지만 푸치니는 동료 출판업자가 만류했지만 “왜 마농에 대한 두 편의 오페라가 존재하면 안 되는가? 마농 같은 여인은 하나 이상의 연인을 가질 수 있을 거야”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프랑스인인 마스네가 분칠과 미뉴에트로 작품을 느낀다면, 이탈리아인인 나는 거침없는 열정으로 작품을 바라보겠다”라는 푸치니의 말에는 오페라 본고장 출신이라는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작곡가는 앞선 두 오페라의 반응이 미지근한 데 그치자 [마농 레스코]를 완성하기 위해 모두 5명의 대본 작가를 동원할 만큼 노심초사를 거듭했다. 결국 1893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초연된 [마농 레스코]는 [라 보엠]과 [토스카], [나비부인]을 예고하는 작곡가의 출세작이 됐다.
마스네는 마농의 노래에서 음정과 기교, 색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여주인공의 변덕스러운 성격이나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당대 사회의 모습을 담아냈다. 반면 푸치니의 오페라는 파멸로 치닫는 청춘 남녀의 운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충실했다. 마스네는 마농이 르아브르로 호송되던 도중에 숨지도록 각색했다. 반면 푸치니는 원작 설정을 그대로 살려 뉴올리언스의 사막에서 숨지도록 해서 처절함을 한층 부각했다. 마스네의 오페라는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속삭이는 파리를 2막의 배경으로 삼은 반면, 푸치니의 오페라 2막에서 마농은 이미 데 그리외와 헤어지고 부호의 애첩이 되어 있다. 이처럼 푸치니는 선배 마스네의 [마농]과 적극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때로 의도적인 비약을 택했다.
하지만 두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숱한 차이점이 하나의 공통점보다 클 수는 없었다. 푸치니의 말처럼 마농은 충분히 두 작품의 주인공이 될 만큼 치명적 매력을 지닌 ‘팜 파탈’이라는 점이었다.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 고전의 운명이라면, 이 작품보다 그 운명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었다. 초연 이듬해 영국 런던에서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관람한 버나드 쇼는 “그 어떤 라이벌들보다 푸치니는 베르디의 후계자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평했다. 쇼의 이 말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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