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꿈을 꾸었어.”
독일 작곡가 카를 오르프(Carl Orff, 1895~1982)는 종종 땀을 흘리며 깨어나 멍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 번째 부인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회상이다.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1937)는 오늘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유럽 각국에서도 광고나 쇼 프로그램에서 ‘운명의 선택’을 강조할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오 포르투나](운명의 여신이여)가 바로 이 작품의 첫 부분이다.
한편 이 곡은 ‘나치가 사랑한 작품’이기도 했다. 제3제국 시대 내내 이 칸타타는 독일과 나치가 점령한 지역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오르프는 꿈에서 어떤 악마를 본 것일까. 그는 나치라는 악마와 타협한 작곡가였을까. 혹은, 절친했던 지인에 대한 배신의 죄책감이 그를 악마에 대한 강박으로 몰아간 것일까.
처음 오르프가 나치의 사랑을 받을 만한 면은 없어 보였다. 1927년 결성된 ‘뮌헨 현대음악연맹’에서 그는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사회민주당 또는 공산당에 경도된 진보적 예술가들이 주축을 이룬 단체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같은 좌파 문인들이나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쿠르트 바일(Kurt Weill) 등의 유대인 예술가들과도 절친했던 오르프는 부르주아의 음악을 넘어 모든 계층에 다가갈 수 있는 ‘민중적’인 실용음악을 표방했다.
41세의 나이에 발표한 [카르미나 부라나]는 그의 작품세계에 일대 도약을 가져온 야심작이었다. 바이에른의 수도원에서 발견된 11~13세기의 세속 가요가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자연의 찬미, 술과 음식에 대한 탐닉, 거리낌 없는 성애(性愛)의 묘사는 그때까지 알려진 ‘엄격하고 도덕적인 중세’와 거리가 있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이 필요한, 전 25곡(첫 곡은 마지막에 반복)으로 이루어진 한 시간 남짓의 칸타타가 완성되었다.
초연 직후에 나치는 이 작품과 거리를 두었다. 나치의 음악평론가 한스 게링크는 “이 작품이 민중의 원초적 요소를 잘못 사용했고 리듬이 낯설다”고 비판했다. “독일의 중세 음악에 왜 독일어보다 라틴어 가사가 많은가” “흑인음악처럼 (리듬이) 들린다”는 공격도 나왔다. 그러나 게링크는 분위기를 잘못 읽은 것이었다. 이 시기 오르프는 좌파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끊고 나치 예술당국에 줄을 대고 있었다. 미국 냄새가 나는 재즈나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풍의 급진적인 현대음악을 혐오한다고도 공공연히 밝혔다.
이윽고 나치당 기관지인 「푈키셔 베오바흐터(민중의 감시자)」에 [카르미나 부라나]를 칭찬하는 칼럼이 실렸다. 칼럼은 이 곡이 “방해받을 수 없는 생명 본능의 힘을 찬미하는” 작품이라며 그 간명한 리듬과 멜로디는 ‘민중의, 언제나 파괴당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힘’을 묘사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명확하고 질풍 같으며 정련된 음악이다. 즉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나치 수뇌부의 호감은 사실 나치즘의 핵심 이념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유대인과 ‘비(非)아리아성’을 혐오했던 나치는 외면적으로는 기독교와 적을 지지 않았지만 내심 기독교 전래 이전의 다신교․이교적 아리아성을 선호하고 높이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헬레나와 비너스’를 찬미하는 [카르미나 부라나]는 나치의 구미에 들어맞았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당이 장악한 프랑크푸르트 시는 오르프에게 [한여름 밤의 꿈] 극음악 작곡을 의뢰했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 금지곡으로 분류되자 그 대체물을 찾은 것이었다. 나치 시대 제국 음악가들의 최고 위에 있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포함해 여러 작곡가들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최종적으로 오르프가 계획을 받아들였다.
‘백장미’ 멘토에 대한 도움을 거절하다
1943년 2월 27일 밤,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쿠르트 후버가 자택에서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었다. 뮌헨 대학생들로 구성된 반체제 저항조직 ‘백장미’와의 연계가 발각된 것이다. ‘백장미’ 조직 자체는 젊은 대학생들이 중심이었다. 후버는 이들에게 조언을 하며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날, 후버 교수와 절친했던 오르프는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후버 교수의 집에 들렀다. 사색이 된 후버 교수의 부인 클라라가 오르프를 맞이했다.
“당신은 나치 고위직과 친하잖아요. 제발 우리 남편이 백장미와 관련이 없다고 증언을, 청원을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오르프는 굳은 얼굴로 돌아 나왔다. 이후 후버 교수를 위한 아무런 구명의 시도도 하지 않았다. 후버 교수는 곧 고문을 당하고 백장미 핵심 멤버인 숄 남매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나치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전하고 뮌헨이 미군에게 점령되자 오르프는 미군에게 소환되었다. 수사당국이 보기에 그의 사례는 애매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치 집권 직후 ‘제국 음악성’ 총재직을 맡은 것을 포함해 여러 음악계 인사들이 나치의 직책에 임명되거나 나치당원이 되었지만 오르프는 공식적으로, 즉 서류상 나치 인사가 아니었다. 나치나 그 정책을 찬양하는 작품을 작곡한 일도 없었다. 수사 종결과 함께 그는 ‘회생 가능분자’로 분류되었다. 미군 점령하의 독일에서 면책을 받고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악보집 표지로 ‘행운의 바퀴’가 그려져 있다.
풀려난 오르프는 죽은 후버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글을 1946년 1월에 썼다. 같은 달, 그는 후버의 부인인 클라라를 우연히 만났다. 클라라는 죽은 남편의 추모집을 엮고 있다고 말했다. 오르프는 자신이 쓴 편지를 보여주었고 클라라는 추모집에 이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후버 가족은 오르프를 용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도 클라라는 남편이 체포되었던 때를 상기할 때마다 오르프에 대한 유감을 잊지 않고 표현했다.
나치에 대한 오르프의 진정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시각은 “오르프는 나치와 좌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기회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나치 당적을 갖지는 않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이 들어 퇴직하고 나치가 유럽을 정복하면 제국 음악의 총책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인물이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사랑한 교향악 명장, 오토리노 레스피기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상기한 교향시
1922년 10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무장 조직 ‘검은 셔츠단’ 4만 명이 이탈리아 수도 로마로 진군해 들어왔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세계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2년 뒤인 1924년 12월 14일, 오토리노 레스피기 (Respighi Ottorino, 1879~1936)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가 ‘영원의 도시’로 불리는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로마의 분수]에서 시작해 [로마의 축제]로 이어지는 그의 이른바 ‘로마 3부작’ 중 가운데 작품이다. 전 4개 악장 중에서 마지막 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선해 돌아오는 고대 로마 군대의 위용을 묘사하고 있었다.
트럼펫이 울리고, 현은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철갑과 무기들을 표현한다. 가슴을 격동시키는 장려한 리듬의 전 관현악 합주 속에서 승리를 선언하는 큰 북의 연타와 징(공)의 강타가 퍼져 나가고, 곡은 화려하게 로마의 영화를 상기시키면서 막을 내린다. 이 작품은 파시스트 집권 기간 내내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주 연주되는, 또한 파시스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이 되었다.
레스피기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인 1942년, 이탈리아 작곡저작권협회 콩쿠르에서 단막 오페라 [알체스티의 선물]이 우승을 차지했다. 레스피기의 부인이자 자신도 작곡가였던 엘사 레스피기의 작품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초연은 미뤄졌다. 전쟁이 끝난 후 엘사는 이 작품의 초연을 위해 노력했지만 좌파 언론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파시스트의 부인이 특혜로 1등상을 받은 오페라를 초연하려 한다.” 엘사는 작품 초연을 포기했다.
30여 년이 지난 후인 1979년, 엘사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오토리노 레스피기 기념행사를 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이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좌파 정당들이 ‘파시스트의 편에 섰던 작곡가를 기념할 수 없다’며 방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레스피기는 과연 파시스트 추종자였을까? 그의 ‘로마 3부작’은 파시스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작곡한 작품들일까?
음악을 사랑한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영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상남자’ 스타일의 외모와 일견 어울리지 않게 음악 애호가였다. 그는 유년기에 바이올린을 배워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썩 듣기 좋을 정도로’ 바이올린을 켰다. 그가 17세 때 생전 처음으로 한 대중 연설도 주세페 베르디의 서거에 부쳐 그를 기념하는 연설이었다.
그런 무솔리니의 문화정책은 기능주의적인 현대성 및 고대 로마 영광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 1876~1944)로 대표되는 이른바 ‘미래주의’ 예술가들이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예술 양식을 주도했다. 직선과 볼륨감, 영웅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건물들은 ‘파시스트 양식’으로 불렸다.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이렇게 당대 파시스트들이 사랑한 시대의 주류와는 분명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미래주의 미술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말리피에로, 카셀라 등 ‘실험적’ 이탈리아 음악가들과 달리 그는 단단한 후기 낭만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볼로냐 음악원 졸업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실(帝室) 극장 바이올리니스트로 들어가 활동하면서 ‘관현악법의 천재’로 불린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가르침을 받아 화려하면서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익혔다.
잔 말리피에로(Gian Francesco Malipiero)와 카셀라(Alfredo Casella)는 파시스트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들의 문화정책 기조에 맞춘 작품들을 썼지만 막상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 당국자들은 이들의 까다로운 작곡 스타일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마의 소나무]는 파시스트 시절 내내 이탈리아 전역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토스카니니와의 긴밀한 관계
토스카니니. 1908년
그러나 레스피기가 파시스트들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레스피기의 내면과는 관계없는 ‘짝사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졌다. 특히 ‘타협 없는 반파시스트’로 유명했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와의 우정은 ‘레스피기 파시스트 추종설’의 명백한 반대 증거로 꼽히고 있다.
레스피기와 토스카니니의 인연은 [로마 3부작]의 첫 곡인 [로마의 분수]로 시작되었다. [분수]는 파시스트 집권 전인 1917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초연의 지휘봉을 잡지 못했다. 우연히 이 직전 독일군이 파도바에서 이탈리아인들을 살륙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즈음 토스카니니가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지휘하다 성난 이탈리아인 관객들에 의해 쫓겨나는 스캔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지휘봉을 잡은 [분수] 초연은 잘 되지 않았다. 이후 토스카니니가 밀라노 라스칼라에서 이 작품을 지휘하면서 비로소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레스피기가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로 이어지는 3부작을 완성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31년 토스카니니는 볼로냐에서 파시스트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타협 없는 그의 반파시스트 자세가 거슬렸던 것이다. 이때 볼로냐 출신의 거장으로 존경받던 레스피기가 나서서 시위대에 항의하며 토스카니니를 구출했다. 둘의 우정은 더욱 굳건해졌다.
1928년에는 [로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로마의 축제]가 초연되었다. 일부에게는 레스피기가 ‘파시스트에 대한 충성’을 확고하게 굳힌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이 작품을 미주 초연했다. 최소한 토스카니니는 이 작품을 파시스트적 작품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 명백하다. 토스카니니는 1931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로마 3부작]을 비롯한 레스피기의 작품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로마의 소나무]가 고대 로마의 개선 장면을 찬양해 파시스트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졌다면, 후속작인 [로마의 축제]는 어떨까? 파시스트들은 분명 이 작품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1악장 ‘치르첸세스’는 검투사와 기독교도들의 희생을 다루었다. 고대 로마의 밝은 면이 부각되는 악장은 아니다. 4악장 ‘주현제’는 축제에서 술 취한 사람들의 광란을 그리고 있다. 파시스트들이 혐오한 ‘무질서한 이탈리아’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악장이다. 이 때문에 [로마의 축제]는 [소나무]로 파시스트들의 짝사랑을 받은 레스피기가 일종의 풍자정신을 발휘한 작품이라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태도, 그리고 활동 시점이 평가 갈랐다
오르프와 레스피기 모두 나치나 파시스트의 당적이나 직함을 갖지 않았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에 헌정하는 작품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각 나치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에 협력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엇갈린다. 2차대전 직후에는 레스피기의 활동이 비판을 받은 반면 오르프는 미 점령 당국의 판정에 의해 면책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르프=기회주의자’, ‘레스피기=순수했던 예술가’로 평가가 뒤바뀌었다.
이런 엇갈린 평가에는 두 사람의 ‘인간에 대한 태도’가 작용했다. 레스피기는 토스카니니가 어려웠던 시절 그를 도왔고, 타협 없는 반파시스트였던 토스카니니는 레스피기의 파시스트 협력 혐의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오르프는 ‘백장미’ 멘토인 후버 교수를 배반함으로써 ‘기회주의자’의 오명을 안게 되었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활동 시점도 엇갈리는 결과를 낳았다. 오르프는 나치의 광란이 극에 달한 시기를 살아나가면서 저항하지 않았고, 그 책임을 나누어져야 했다. 반면 레스피기가 사망한 1936년은 파시스트의 마각이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시기였다. 2년 뒤인 1938년 파시스트가 나치를 모방한 ‘인종차별법’을 도입하면서 그 반인류적 성격이 명확해졌고, 1년 뒤 무솔리니는 1939년 나치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이라는 유례없는 범죄에 참여하게 되었다. 레스피기가 이 시기 이탈리아에 생존해 있었다면 그는 반파시즘 입장을 명확히 밝혔을까. 그는 자연사를 통해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후기 작품들이 담은 메시지
레스피기가 죽은 해인 1936년, 그의 마지막 오페라 [루크레치아]가 발표되었다. “독재자에 죽음을, 브루투스, 당신이 지도자가 되어라. 로마에 자유를!” 이 작품은 오늘날 레스피기가 파시스트의 반민중성에 저항하는 뜻을 담아 내놓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르프는 2차대전 이후 그리스 비극을 소재로 한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프로메테우스]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속죄’와 ‘용서를 비는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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