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 희곡 토스카와 오페라 토스카

히메스타 2017. 1. 11. 11:2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19세기 유럽 전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깊은 고민을 안겼다.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한 유럽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나폴레옹은 자유·평등·박애라는 혁명 이념의 계승자이자 전파자였다. 하지만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자에게 나폴레옹 군대는 프랑스의 침략자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였지만 권력욕에 물든 독재자였고, 프랑스를 지킨 애국자였으나 동시에 유럽 침공에 나선 정복자이기도 했다. 그는 법과 제도의 개혁가이면서도 군주제로 후퇴한 반동이었다.

   
     

 

나폴레옹, 해방의 영웅이자 침략자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퇴 이후 빚어진 권력의 공백을 군사 작전 같은 치밀하고 빈틈없는 전략으로 파고 들어갔다. 집권 당시부터 이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증오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지지하다가 철회했고 또다시 지지했다”라고 적었다. 그는 몽상가이자 현실주의자였고, 프랑스 혁명의 ‘자식’인 동시에 ‘살해자’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대관식], 1804년미술 작품 보러가기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고뇌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의 창작 배경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프랑스 공화주의에 깊이 공감했던 작곡가는 이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1804년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 소식을 접한 뒤 “그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권을 짓밟고 야망에 탐닉해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는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며 분노했다. 결국 작곡가는 보나파르트라고 적었던 악보 표지를 찢어버리고 ‘영웅’이라고 명명했다. 지금까지 전하는 악보 표지에도 ‘보나파르트’라는 글자를 격하게 긁어서 지워버린 흔적이 뚜렷하다. 하지만 2년 뒤 이 곡의 악보를 출판할 때 작곡가는 “위대한 인간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 작곡한 영웅적 교향곡”이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베토벤에게도 나폴레옹은 격렬한 애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의 악보

19세기 당시까지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한층 사정이 복잡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북부 지역과 중부의 교황령, 남부의 나폴리·시칠리 왕국과 사르디나 왕국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1796년 이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이 1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자 이탈리아는 단숨에 유럽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이탈리아 원정 초기에 나폴레옹은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의 속국에서 해방시킨 뒤 공화국으로 선포하며 개혁가적 면모를 보였다. 로마가 교황령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위성 공화국으로 선포된 것도 1798년이다. 하지만 1802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포한 뒤 스스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는 해방자인 동시에 침략자였다.

마렝고 전투와 희곡 『토스카』

 

희곡 『토스카』의 작가, 빅토리앙 사르두의 모습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앙 사르두(Victorien Sardou, 1831~1908)의 희곡 『토스카』의 배경이 바로 나폴레옹 시대의 이탈리아 로마였다. 정확히 말하면, 1800년 6월 17일 로마의 단 하루가 배경이다. 그 사흘 전인 6월 14일 이탈리아 북서부 마렝고 평원에서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했다. 2만 1000명의 병사와 26대의 포병으로 구성된 나폴레옹군은 3만 7000명의 병사와 대포 115대에 이르는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다. 실제로 전투 초반 내내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빗발치는 포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측근 루이 드제 장군이 이끄는 보병 사단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드제의 부대는 오스트리아군의 선봉 여단을 격파해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그 뒤 프랑스 기마대의 투입으로 승패가 갈렸다. 이집트 원정 당시 ‘정의로운 술탄’으로 불렸던 드제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드제의 시신은 전투가 끝난 뒤에야 프랑스군의 시체 더미 사이에서 발견됐다. 이 전투는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우위를 다지게 된 결정적 계기로 평가된다.

루이 프랑수아 르죈, [마렝고 전투], 19세기 초

마렝고와 로마의 공간적 거리가 빚어낸 사흘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토스카』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이 작품에서 토스카의 애인이자 화가인 마리오 카바라도시(Mario Cavaradossi)는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다. 원작 희곡에서 토스카가 카바라도시에게 “신과 왕과 교황의 적()이자 선동 정치가, 무신론자, 프랑스 계몽철학자 볼테르를 읽는 사람”이라고 면박을 주자, 카바라도시는 “나는 공화파이자 피를 들이켜는 자”라고 맞받아친다.

자크 루이 다비드,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19세기 초미술 작품 보러가기

반면 토스카의 ‘육체’와 카바라도시의 ‘목숨’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로마의 경찰 총수 스카르피아는 구체제의 신봉자다. 1798년 나폴레옹이 선포한 로마 공화국은 불과 1년 남짓 지속됐고, 1799년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에는 다시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지원하는 나폴리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최종 실각한 1815년까지 로마는 프랑스와 반() 프랑스 세력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극 중에서 카바라도시가 숨겨준 정치범 안젤로티는 단명한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마렝고 전투의 승패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흘의 시차를 두고 로마에도 전황()이 중계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르두의 희곡이나 푸치니의 오페라에서 공히 1막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종교곡 [테데움]은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다. 로마 최고의 성악가인 토스카가 희곡 2막에서 부르기로 되어 있던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파이시엘로의 칸타타도 오스트리아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곡이다. 마렝고 전투의 개전 초기에 오스트리아군이 우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2막까지는 등장인물 모두 오스트리아군의 승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희곡 2막 말미에 프랑스군의 승전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귀족들의 안색은 창백해진다. 오페라에서는 2막에서 스카르피아의 고문을 받던 카바라도시가 승전의 기쁨에 열창하는 장면으로 각색됐다.

시대적 비감과 통속적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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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토스카]에 출연한 사라 베른하르트와 그 모습을 소재로 한 알폰스 무하의 포스터(1898)

장서가였던 사르두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테르미도르 반동, 나폴레옹 집권기 등 프랑스의 역사적 사건에서 작품의 소재를 즐겨 찾았다. 특히 당대 유럽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캐스팅한 연극 [토스카]는 1887년 초연 이후 프랑스에서만 3,000여 회 공연할 만큼 대대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베른하르트는 이 역할로 이집트와 터키, 호주와 남미에서도 순회공연을 했다. 1905년 리우데자네이루 공연 당시에는 토스카가 성벽에서 몸을 던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른쪽 무릎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이 괴저로 번지는 바람에 베른하르트는 오른쪽 다리 전체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1923년 78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의족을 달고 연기 활동을 계속했다.

연극 [토스카]는 대중적으로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반면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1890년 런던에서 이 작품을 관람한 뒤 “멍청하고 형편없는 싸구려”라고 혹평을 퍼부었다. ‘여성에 대한 학대’처럼 상투적인 기법에 의존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악당 스카르피아가 부채를 이용해 토스카의 질투를 유발하는 장면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이아고의 손수건 계략을 빼닮아 있었다. 이처럼 [토스카]에는 통속적인 표현이나 전개 방식이 적지 않았다.

3막에 등장하는 성 안젤로 성 전경

하지만 비판자들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분명 [토스카]는 고문과 살인, 자살 등으로 뒤범벅이 된 통속극이다. 하지만 동시에 [토스카]는 나폴레옹 시기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이자 ‘시간과 장소, 행동의 일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극 원칙에 충실한 작품이기도 했다. 1800년 6월 17일 한낮에 카바라도시가 안젤로티를 성당에 숨겨주면서 시작한 드라마는 이튿날 새벽 카바라도시의 죽음으로 끝난다. 작품의 무대인 1막의 성 안드레아 델라 발레(Sant'Andrea della Valle) 성당과 2막의 파르네세 궁전, 3막의 성 안젤로 성은 로마의 젖줄인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근거리에 있다. 여주인공 토스카와 악당 스카르피아는 ‘이중의 음모’를 서로에게 꾸미고, 이들의 계략이 현실화하는 순간에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파멸을 맞는다. 일절 비약이나 회상 없이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아래 파국의 변주를 빚어낸 것이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나 [여명의 눈동자]처럼 시대적 비감()과 통속적 재미가 적절하게 뒤섞인 것이야말로 [토스카]의 매력이었다.

스카르피아의 가슴에 토스카가 십자가를 놓는 장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1914년경

푸치니의 손에 재탄생한 블록버스터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가 밀라노에서 이 연극을 관람한 것은 1889년이었다. 당시 공연에도 베른하르트가 출연했다. 작품의 탄탄한 구성과 극적 긴장감에 깊은 인상을 받은 푸치니는 오페라 작곡을 위해 필요한 판권 계약을 출판업자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작곡 과정은 난산에 가까웠다. 원작자인 사르두는 고국 프랑스의 음악가가 아니라 당시 31세의 이탈리아 작곡가가 곡을 쓴다는 것이 못내 미심쩍었다. 푸치니의 단짝 대본 작가였던 주세페 자코사와 루이지 일리카도 오페라에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이 작품은 푸치니가 아니라 동료 작곡가 알베르토 프란체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푸치니는 “잔인한 작품”이라면서 포기를 종용했고, 프란체티는 순순히 작품을 푸치니에게 내주고 말았다고 한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오페라 작곡의 이면에도 [토스카] 못지않게 음흉한 공작이 깔려 있었던 셈이었다.

푸치니의 모습

1894년에는 오페라 대본 작가들이 사르두의 허락을 받기 위해 파리로 찾아가 대본을 낭독했다. 당시 오페라 [오셀로] 공연을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여든 살의 작곡가 베르디도 낭독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일리카에게 대본을 건네받아서 작품을 읽어본 베르디는 “내 나이만 아니라면 [토스카]를 직접 작곡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를 완성한 직후였다. 베르디는 7년 뒤인 1901년 타계했다.

오페라는 23명에 이르는 희곡의 등장인물을 9명으로 과감하게 줄이고, 원작의 5막을 3막으로 압축하면서 속도감을 높였다. ‘2시간 안으로 작품을 편집한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숨은 공식처럼, [토스카]도 전체 3막을 2시간 안에 공연하면서 파국으로 빠르게 치닫는 흥행 공식을 철저하게 따랐다. 요컨대 [토스카]는 감독의 고집으로 빚어낸 예술 영화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오페라의 ‘블록버스터’에 가까웠다.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극 중 여가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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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시 출간된 오페라 대본 표지와 스카르피아의 죽음을 묘사한 포스터, 1899년

오페라는 1900년 1월 14일 작품의 배경인 로마의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당시 공연에는 이탈리아 왕비와 총리 등 명사들은 물론, 푸치니에게 이 작품을 넘겼던 작곡가 프란체티도 참석했다. 프란체티는 내심 실패를 바랐을지 모르지만 카바라도시의 [별은 빛나건만]과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등 주옥같은 아리아가 담긴 이 오페라는 초연 직후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오페라로 작곡되기도 전에 작품에 내재한 폭발력을 꿰뚫어보았던 노대가() 베르디의 혜안이 적중한 셈이었다. 특히 오페라 2막에서 신에게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토로하는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마리아 칼라스를 비롯해 당대 소프라노들의 애창곡이 됐다.

“노래로 살고 사랑에 살며/살아 있는 사람에게 상처 준 일도 없고/불행한 사람을 보면/남모르게 도왔습니다./언제나 참된 신앙심으로/정성을 다해 기도하고/제단에는 아름다운 꽃을 바쳤지요/이 고난의 시기에/어째서 어째서 주님은/제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토스카는 성량이 풍부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음성과 당찬 성격까지 그대로 담아내야 하기에 드라마틱 소프라노(dramatic soprano)에게 어울리는 배역이다. 하지만 오페라 극장에서는 이 작품을 불러본 적이 없는 서정적인 리릭 소프라노(lyric soprano)나 화려한 기교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도 자신의 독창회에서만큼은 이 노래를 빼놓지 않는다. 토스카가 당대 로마를 사로잡았던 여가수라는 오페라의 설정도 소프라노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비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과 노래야말로 모든 여가수들이 꿈꾸는 지고지순의 가치가 아닐까. 여가수에게 여가수의 배역을 맡긴 푸치니의 눈썰미야말로 이 작품이 누리고 있는 인기의 숨은 이유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