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말의 프랑스를 사로잡았던 건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였다. 바그너는 자신이 직접 대본 집필과 작곡을 도맡아 오페라의 전통적 관습에 의문을 던지고 ‘음악극’으로 재정립하고자 했던 야심가였다. 그는 이야기의 내용을 전달하는 레치타티보와 노래에 치중한 아리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드라마와 음악의 강력한 통합을 주창했다. 또한 바그너는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유도동기)로 오페라 전체를 촘촘하게 직조해냈다.
중세 전설에 대한 탐닉, 매혹적이면서도 불안한 반음계까지 예술가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바그너와 사랑에 빠졌다. 중세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뒤늦게 쏟아졌고, 바그너 풍의 낭만적인 가곡과 오페라가 만개했다. 청년 시절 바그너가 성공을 거두기를 열망했지만, 좌절만 안은 채 씁쓸하게 되돌아갔던 도시가 파리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뒤늦은 열풍이었다.
바그네리언 드뷔시, 오페라에 빠지다
프랑스의 청년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 역시 바그너를 향한 경배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파리 음악원에 재학하던 스무 살 무렵, 드뷔시는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폰 메크 부인의 피아노 반주자이자 부인 자녀들의 가정 교사로 러시아와 유럽 일대를 여행했다. 당시 여행 도중에 그는 빈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다. 드뷔시는 편지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은 분명히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 깊은 감정은 애무처럼 당신을 껴안고,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라고 적었다.
드뷔시는 3년 뒤 바그너의 장인이자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를 만나면서, 바그너의 자장(磁場) 안으로 더욱 강하게 끌려 들어갔다. 드뷔시는 당시 70대에 접어든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접한 뒤 “마치 페달을 숨 쉬게 하는 것만 같다”라고 극찬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 대상을 수상한 뒤 로마에 머물던 무렵 드뷔시는 집에서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곡을 수차례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는 “예절 규범을 모두 잊어버릴 만큼 바그네리안(Wagnerian, 바그너 애호가)”이라고 자처할 지경에 이르렀다. 보들레르와 베를렌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인 그의 가곡들에도 바그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드뷔시는 부유한 예술 애호가 에티엔 뒤팽의 후원으로 1888년과 1889년 두 차례 바그너의 성지(聖地)인 바이로이트 축제를 방문했다. 첫해는 [파르지팔]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이듬해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다. 하지만 바그너의 작품만을 상연하기 위해 바그너가 직접 구상한 이 전용 극장에서 드뷔시는 오히려 종교에 가까운 맹목적 숭배의 위험성을 감지했다. 결국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여명으로 오해 받은 황혼”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시대의 서광(曙光)이라기보다는 이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음악에 가깝다는 결별 선언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1882년
하지만 두 차례의 바이로이트 방문은 드뷔시가 오페라 작곡에 대한 열망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파리 음악원 시절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기로에게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언어가 힘을 잃고, 오로지 음악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선 모든 걸 표현하기보다는 넌지시 암시만 하고 있는 시인의 작품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저의 꿈을 그의 꿈에 접목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특정한 시기나 장소에도 한정되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 말입니다.”
드뷔시의 파랑새,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그 무렵 드뷔시가 발견한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작곡가가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와도 같았다. 중세 왕실을 배경으로 한 삼각관계라는 작품 구도나 남편의 질투가 죽음을 부른다는 비극적 결말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흡사했다. 하지만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작품을 감싸고 있는 모호한 분위기였다. 바그너의 이졸데는 주저 없이 자신의 사랑을 토로했지만, 멜리장드는 당장 나이와 출신, 신분부터 불분명했다. 희곡 1막 2장의 첫 등장에서 멜리장드는 “난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어요”라며 샘가에서 마냥 울고만 있다. 멜리장드는 물속에 떨어뜨린 왕관 같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어렴풋하게 신분을 암시할 뿐이다.
19세기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희곡 작가답게 마테를링크의 작품에는 직설적인 대사로 표현하지 않는 언외언(言外言)이 유독 많았다. 멜리장드가 결혼반지를 우물가에 빠뜨리거나, 성탑의 창밖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펠레아스가 입맞춤하는 장면을 통해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애정이나 무관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불륜을 의심한 골로 왕자는 진실을 말하라고 멜리장드를 몰아세우지만, 돌아오는 건 멜리장드의 죽음과 침묵뿐이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금지된 사랑을 나누고 죽어간 것일까, 그조차 이루지 못했던 것일까.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죽음이 환희와 열락을 나타냈다면, 마테를링크의 희곡에서는 공허함과 허무의 상징에 가까웠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마테를링크는 괴어 있는 물처럼 극도로 목소리를 줄여서, 시와 침묵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마테를링크는 수동적인 등장인물들이 죽음과 같은 운명을 묵묵히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자신의 작품을 ‘정적(靜的) 연극’으로 표현했다.
1893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 연극을 관람한 드뷔시는 오페라로 작곡하기 위해 작가의 고향인 벨기에 겐트로 찾아가 정식 승낙을 받았다. 드뷔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사랑을 담은 4막 4장부터 빠르게 초고 작업을 마쳤지만, 이내 완성된 분량을 스스로 폐기하고 말았다. “바그너라고 불리는 늙은 클링조르([파르지팔]의 마법사)와 바이로이트의 유령이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라는 이유였다. 그 뒤로도 악보를 썼다가 지우고 버리는 지루한 과정이 반복됐다. 작곡가는 “감정의 맨살에 닿기 위해선 얼마나 창조했다가 파괴해야 하는가”라며 괴로워했다. 그에게도 바그너와의 결별 과정은 지난했던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완성까지 10년 가까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의 초연
오페라 초연까지는 더 많은 난관이 남아 있었다. 당초 작곡가는 원작자 마테를링크의 연인인 소프라노 조르제트 르블랑을 여주인공 멜리장드 역으로 염두에 뒀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괴도 뤼팽』 시리즈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여동생이었다. 드뷔시는 마테를링크의 집에서 그녀에게 작품을 지도하기도 했다. 르블랑은 “드뷔시가 언제나 내 발음을 칭찬했다”라고 했지만, 드뷔시가 스코틀랜드 출신 성악가 메리 가든의 목소리를 들은 뒤 작곡가가 배역을 교체하기로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됐다.
뒤늦게 신문을 통해 배역 교체 소식을 접한 마테를링크는 드뷔시에 대해 앙심을 버리지 못했다. 프랑스 일간지에 “자의적이고 어리석은 삭제 때문에 작품이 이해 불가능하게 됐다”라고 비판하는 기고를 싣기도 했다. 당초 작곡가가 재량껏 원작에 손대도 좋다고 허락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마테를링크는 “이 작품은 내게는 기이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작품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작품이 분명하게 실패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마테를링크는 드뷔시가 타계하고 2년 뒤인 1920년에야 처음으로 이 오페라를 보았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내가 틀렸고 그가 천 번이고 옳았다”라고 뒤늦게 고백했다.
침묵의 마력에서 음악적 매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1902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당대 청중을 당혹스럽게 했다. 시원(始原)과 결말을 짐작하기 힘든 마테를링크의 원작과 마찬가지로, 드뷔시의 오페라 역시 뚜렷하게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나 아리아도 없이 그저 한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1907년 이 오페라를 접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여기엔 음악이 없다. 차라리 음악 없이 마테를링크의 희곡을 듣는 편이 낫다”라고 불평했던 것도 억지만은 아니었다. 평소 드뷔시의 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작곡가 생상스는 이 작품을 본 뒤 “흉보고 다니려고 휴가 출발을 늦췄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프랑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작가 로망 롤랑)라거나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음악의 물결이 숨은 의미까지 드러낸다”(작곡가 뱅상 댕디)는 격찬이 쏟아졌다. 요컨대 이 작품은 유럽 예술계에서 세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드뷔시 자신은 언론 인터뷰에서 “감히 말하자면 멜로디는 반(反)서정적이다. 선율로는 영혼이나 인생의 복잡다단한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 요컨대 멜로디는 단순한 감정을 드러내는 노래에나 어울릴 뿐”이라고 선언했다. 악보 전체에서 ‘포르티시모(매우 세게)’가 등장하는 대목은 네 군데에 불과하다. 성악가의 노래를 뒤덮는 관현악이나 대규모 합창도 없이 작품은 지극히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 가운데 지속적으로 음악이 흘러가도록 음표와 음절을 섬세하게 조응시킨 것이야말로 드뷔시 오페라의 매력이었다. 마테를링크가 희곡에서 보여준 침묵의 마력은 드뷔시의 오페라에서 음악적 매력으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오페라 1막에서 펠레아스가 부르는 노래는 작품의 특징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극도의 침묵이 감돌고 있지. 심지어 물이 잠든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거야.”[펠레아스와 멜리장드] 1막에서 펠레아스의 노래
오페라 초연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앙드레 메사제는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멜리장드가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방 안으로 들어왔던 건 석양의 햇살만이 아니라 현대음악 자체이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의 구분처럼 세잔(회화), 말라르메(문학)와 더불어 드뷔시(음악)의 등장으로 바야흐로 현대 예술에서 모더니즘이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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