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 당일 위고의 지지자와 반대파들이 극장을 가득 메우자,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들도 걱정에 휩싸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로 예술지상주의를 천명했던 시인이자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는 붉은색 조끼 차림으로,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는 덥수룩한 머리로 극장 객석에 앉았다. 이들뿐 아니라 작곡가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소설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등 위고의 지지자를 자처한 예술가들이 총출동했다.
뒤마와 고티에, 위고의 딸 아델의 회고를 종합하면, 위고의 지지자들은 대략 공연 4시간 전부터 극장에 진을 치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심지어 극장 4층 박스석에는 오줌을 지려 놓았다. 뒤늦게 도착한 반대자들은 아수라장에 가까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당초 우려됐던 충돌 없이 무사히 공연은 막이 올랐고, 초연은 기립 박수로 끝났다. 위고의 어릴 적 우상이었던 샤토브리앙은 초연 당일 작품을 관람한 뒤 “내가 가고, 당신이 오는구려”라는 편지를 보냈다. 훗날 프랑스 문학사에 ‘에르나니 전투(bataille d'Hernani)’로 불리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초연 당일의 풍경이었다. 이렇게 떠들썩한 난리법석이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스페인 역사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6세기 스페인, 코무네로스의 열기에 휩싸이다
『에르나니』의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스페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1500~58)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기 직전인 1519년이다. 그의 친가 쪽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친조부였다. 외가 쪽으로는 스페인 통일 왕국의 시초를 다진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이 외조부모였다. 유럽을 대표하는 왕가의 핏줄을 양쪽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스페인 국왕일 때는 카를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이후에는 카를 5세로 불렸다.
그가 스페인 국왕이 된 건 불과 16세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취임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세 때였다. 남미와 아시아 일대의 스페인 식민지까지 카를로스 1세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였다. 당시 유럽 최고의 ‘엄친아’였던 셈이다. 벨기에 겐트에서 나고 자란 그는 독어와 프랑스어, 플랑드르어를 구사했고, 스페인 왕좌에 오른 뒤에는 스페인어도 익혔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를 두고 “신과 대화할 때는 스페인어를, 남성과는 프랑스어를, 여성과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말과 이야기할 때는 독어를 쓴다”는 농담도 나왔다.
하지만 방대한 영토는 그의 스페인 왕국에는 축복인 동시에 치명적인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패권을 놓고 다퉜던 프랑스와의 전쟁, 신교를 옹호하는 독일 제후들과의 전투,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기 위한 공방전까지 스페인은 상시적인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스페인 국왕이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는 상황은 자칫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자국 왕위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겨준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실제 카를로스 1세가 152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독일 아헨으로 떠나자, 스페인은 반란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비야와 바야돌리드, 톨레도 등 스페인 일대에서 2년간 번져나갔던 봉기를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이라고 부른다. 코무네로스는 마을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코뮤니티(comminity)’와 어원이 같다. 반란의 명칭이 일러주듯이 왕실의 무분별한 증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 당시 봉기는 민란(民亂)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세고비야에서는 입법관을 살해한 뒤 진상 파악을 위해 파견된 왕실 조사관의 입성마저 거부했다. 왕실 군대가 도시 봉쇄에 나서자 세고비야는 인근 도시에 도움을 요청했고, 왕실과 반란군은 전면 충돌로 치달았다.
하지만 반란이 극렬하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치닫자, 이 지역 귀족들은 반란에 등을 돌렸다. 토지 소유주였던 귀족들은 봉건적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까지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1521년 비얄라르 전투에서 반란군이 대패하자, 주모자들은 체포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카를로스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사모라의 주교를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성탑 꼭대기에 매달도록 했다. 반란 가담자들에 대한 응징이자 경고의 의미였다.
“사랑 앞에서는 국왕과 산적이 동등하다”
당시 스페인 일대의 반란은 『에르나니』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프랑스의 문호 위고가 이 작품에서 부각시킨 건, 국왕 카를로스 1세가 아니라 그에게 맞섰던 산적 에르나니였다. 작품에서 에르나니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자 산적 두목이 된 것으로 설정된다. 희곡 1막에서 에르나니는 “내 증오심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이미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원수를 그의 아들에게 갚겠노라고 맹세했다”라고 외친다. 그의 맹세에는 코무네로스 반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둘은 명문 귀족의 조카딸인 도냐 솔을 다 같이 사랑하고 있다. 왕과 산적은 정치적 숙적인 동시에 연적인 것이다. ‘사랑 앞에서는 국왕과 산적이 동등하다’라는 위고의 발상은 다분히 낭만적이면서도 혁명적이었다. 평등과 사랑을 한데 녹여서 작품의 열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작법은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의 꼽추』까지 위고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국왕과 산적 사이의 대를 이은 원한이라는 작품 설정에는 작위적인 구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요 등장인물 4명 가운데 3명이 자살을 선택하는 결말도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형식의 파격, 젊음의 작품
하지만 이 희곡의 문학적 성취는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오히려 형식의 파격에 있었다. 위고는 1827년 전작인 희곡 『크롬웰』을 쓸 때부터 서문을 통해 고전 희곡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미학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시간·장소·사건의 일치’라는 삼일치의 법칙, 정치적 검열이나 주제의 제한 등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됐다. 훗날 테오필 고티에는 위고의 서문에 대해 “우리 세대의 눈에는 시나이 산의 십계명처럼 빛났고 그의 주장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위고는 14세 때부터 “샤토브리앙이 아니라면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이미 그는 ‘위고 자신’이 되어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에르나니』를 둘러싼 찬반(贊反) 갈등은 예술적인 논쟁인 동시에 세대적인 논쟁이기도 했다. 한편에 고전주의 예술을 옹호하는 구세대가 있었다면, 다른 편에는 낭만주의를 주창한 신세대 예술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희곡은 무엇보다 ‘젊음의 작품’이었다. 작가와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지자들까지도 좀처럼 서른을 넘는 법이 없었다.
위고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던 고티에는 “이탈리아 군대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군단’ 역시 모두 젊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성년에 이르지도 않았고, 이 무리의 수장도 28세에 불과했다”라고 썼다. 위고는 ‘낭만주의 예술의 나폴레옹’에 비유되기에 이르렀다. 위고 자신도 “「에르나니」에 대한 전투는 사상과 진보의 전투이며, 공동의 투쟁이다. 우리는 속박 당하고 흠집이 나 있는 구닥다리 문학과 투쟁하려는 것이며, 이 공격은 구세계와 신세계의 투쟁”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초연 이후 공연이 계속될수록, 객석에는 지지자보다는 반대자의 비율이 늘어났다. 반대파 언론에서는 “’에르나니’처럼 멍청한”, “’에르나니’처럼 괴상망측한” 같은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배우들도 끊임없는 야유와 고함소리, 웃음과 방해 공작에 지쳐갔다. 심한 경우에는 공연 도중에 150차례나 흐름이 끊긴 날도 있었다.
역설적으로 작품을 둘러싼 ‘노이즈 마케팅’은 흥행에는 플러스 요인이 됐다. 첫날에만 5,134프랑을 벌어들였고, 첫해에는 49만 프랑의 수익을 올렸다. 마침내 1830년 2월 25일은 프랑스 낭만주의 희곡의 탄생일로 남았다.
베르디를 만난 『에르나니』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위고의 『에르나니』를 다섯 번째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1843년이었다. 당초 [크롬웰]을 차기 작으로 염두에 뒀지만, 그 해 8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감독인 모체니고 백작이 이 희곡을 권유하자 작곡가는 “아! 우리가 『에르나니』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라며 주저 없이 작품을 교체했다. 이 작품이 베르디에게 의미 있는 건, 대본 작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1810~76)와 호흡을 맞춘 첫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에르나니]를 시작으로 둘은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등 10편의 오페라를 쏟아냈다. 당시까지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작가 피아베는 일일이 베르디의 지시를 받아가며 대본을 썼다. 음악학자 가브리엘레 발디니는 “작곡가는 대본 작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노예처럼 부렸다. 피아베는 베르디가 손에 쥔 악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피아베의 대본은 베르디의 음악에 최적화됐다”라고 평했다.
평등과 사랑, 낭만을 버무린 위고의 원작과 달리, 이 작품에서 베르디가 주목한 건 정치적 압제의 문제였다. 카를로스 1세 당시의 스페인 역사에 이탈리아의 상황을 대입하면, 곧바로 베르디 당대의 현실적 문제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신음하고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이 오페라의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초연시 에르나니 역을 맡은 카를로 과스코 |
초연시 엘비라 역의 소피 로 |
이탈리아의 오페라로 환골탈태 하다
당초 위고의 원작에서는 카를로스 1세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약관의 청춘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작곡가는 카를로스 1세를 젊은 날을 회상하며 향수에 젖는 장년으로 그렸다. 그렇기에 왕의 음역도 낭랑한 테너가 아니라 무거운 바리톤이다. 자연스럽게 테너가 부르는 에르나니는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애국적 영웅으로 해석될 소지가 커졌다. 음악적으로도 오페라의 진정한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라 반란자들이었다. 이들이 부르는 3막의 합창 [일어나라 카스티야의 사자여]는 베르디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애국의 메시지였다.
“약속! 맹세! 카스티야의 사자여, 일어나 압제자에 맞서 이베리아의 산과 전역에 성난 포효를 울려라. 우리는 모두 한 가족으로 무기와 마음으로 투쟁하리라. 우리의 가슴에 생명이 뛰는 한, 복수도 하지 못한 채 무시 받는 노예로 남아 있지 않으리라.”오페라 [에르나니] 가운데 [반란자들의 합창]
베르디의 오페라는 1844년 초연 직후 1845년 영국 런던과 1847년 미국 뉴욕에서도 상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영국에서 이 오페라를 관람한 뒤 “고전적인 낭만주의의 산물이며, 화려한 영웅상 속에 진정한 예술이 녹아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자극에서 드라마가 빚어진다”라고 격찬했다. 물론 그는 “극작가로서 위고의 가장 큰 공적은 베르디에게 대본을 제공한 것”이라는 특유의 비아냥도 빼놓지 않았다.
베르디는 위고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와 실러, 월터 스코트의 고전을 원작으로 즐겨 오페라를 작곡했다. 심지어 위고의 경우엔 베르디의 오페라가 원작 희곡보다 더욱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에르나니] 역시 프랑스 낭만주의 희곡의 탄생을 알렸던 위고의 원작이 베르디의 애국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로 멋지게 환골탈태한 경우였다. 모든 예술은 재해석이며, 재해석을 통해 작품은 생명력을 계속 이어간다. [에르나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의 선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시즘이 사랑한 작곡가 - 레스피기와 오르프 (0) | 2017.01.10 |
---|---|
죽어가던 멜리장드의 창문으로 들어온 현대음악 -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오페라 페리아스와 멜리장드 (0) | 2017.01.05 |
완성을 위한 다양한 시도 - 미완성 명곡 (0) | 2017.01.03 |
악녀 속에 감춰진 어머니의 눈물 - 빅토르 위고의 루크레치아 보르차와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 (0) | 2017.01.02 |
누군가의 고별작, 다른 누군가의 대뷔작 - 라신의 희곡 페드르와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0) | 2016.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