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근교에 사는 76세의 작곡가 안셀름 휘텐브레너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34세의 작곡가 겸 지휘자 요한 폰 헤르베크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프란츠 슈베르트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헤르베크는 슈베르트 음악을 사랑했지만 슈베르트가 죽고 3년 뒤에 태어나 만날 기회가 없었다. 반면 휘텐브레너는 과거 슈베르트와 친분이 두터웠다. 생전 슈베르트의 면모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헤르베크에게 휘텐브레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말이지, 내게 슈베르트의 미발표 교향곡 악보가 있는데….”
헤르베크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이 해 12월 17일 빈에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B단조]가 헤르베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작곡가 사후 37년 만의 일이었다.
“미완성 교향곡 마지막 악장이 ‘로자문데’에 들어있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슈베르트는 1823년 그라츠 음악협회로부터 명예회원증을 받았다. 이 지역을 자주 방문해 작품을 선보인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그라츠 음악협회 회장이자 친구인 휘텐브레너에게 교향곡 악보를 보냈다. 완성된 두 개 악장과 3악장 스케르초 시작 부분 두 페이지의 악보였다. 완성되면 전곡 악보를 보낸다는 약속 또는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나머지를 보내지 못하고 5년 뒤 사망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냥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휘텐브레너에게 보낸 두 악장의 완성도로 볼 때 있기 힘든 일이었다. 슈베르트가 당시 극음악 [로자문데]와 피아노곡 [방랑자 환상곡] 작업에 바빠서 미루어 놓았다가 5년이 후딱 흘러버렸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완성된 첫 두 악장이 모두 3박자 계통이어서, 역시 3박자인 스케르초로 이어가는데 한계를 느낀 나머지 작업이 정체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심지어 휘텐브레너가 완성된 4개 악장의 악보를 받았지만 발표하지 않은 데 죄책감을 느끼고 3악장 일부와 4악장 악보를 파기해버린 채 ‘미완성이라서 발표하지 않았다’고 둘러댔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다.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야 무엇이든 슈베르트 서거 100주년인 1928년부터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한 시도들이 나왔다.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상금을 내걸고 ‘완성교향곡’ 공모에 나섰다. 피아니스트 프랭크 메릭의 작품이 가장 나은 작품으로 주목받았고 음반도 나왔지만 이내 잊혀졌다.
영국 음악학자 브라이언 뉴불드는 창작이 아니라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완성교향곡 복원’에 나섰다. 3악장 스케르초는 30여 마디만 오케스트라 악보가 남아있었지만 슈베르트의 유고 속에 피아노 스케치가 있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복원이 가능했다. 문제는 4악장 피날레였다. 뉴불드는 극음악 [로자문데]의 간주곡 1번에 주목했다. 간주곡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완전한 소나타 형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B단조로 쓰여있었다.
뉴불드는 이 부분을 슈베르트가 B단조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으로 쓰려다 [로자문데]에 전용한 것으로 보았고, 교향곡의 완성판 피날레에 가져왔다. 그가 이렇게 1990년대에 ‘복원’해 완성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B단조]는 네빌 마리너 지휘 세인트마틴인더필드 아카데미 등이 음반으로 녹음했다.
러시아 작곡가인 안톤 사프로노프도 독자적으로 3악장을 복원하고 4악장은 새롭게 슈베르트 스타일로 작곡한 이 교향곡의 완성본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완성본은 2007년 계몽시대 오케스트라가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지휘로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초연했다.
모차르트 레퀴엠 ‘눈물의 날’ 9마디부터 다양한 버전
슈베르트는 미완성 교향곡을 쓰다가 중간에 ‘밀쳐놓고’ 중단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와 달리 작곡가가 대작을 쓰다가 건강이 악화돼 사망함으로써 미완성이 된 명곡도 많다. 완성하지 못한 작품에 대해 작곡가는 어떤 입장을 밝힐까.
“내가 완성한 부분까지만 연주하라”, “작품을 폐기하라”, “(완성자를 지정하며) 당신이 완성하라”, “누구든 완성해주면 고맙겠다” 등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아무런 뜻도 표명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일도 많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유일한 레퀴엠(진혼미사곡․장송곡)을 쓰다 끝을 맺지 못하고 1791년 35세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된 셈이다. 전곡에서 모차르트가 온전히 완성한 부분은 첫 악장 [레퀴엠 에테르나(영원한 안식을))뿐이다.
이후 [키리에 엘레이손(불쌍히 여기소서)] 및 속창(세쿠엔티아)의 [디에스 이레(분노의 날)]부터 [콘푸타티스(저주받은 자들)]까지는 대부분 성악부와 화음 표시만 남아있고 관현악 부분은 쓰여 있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쓰여 있다.
이어 세쿠엔티아의 마지막 부분인 ‘라크리모사’는 모차르트가 첫 여덟 마디까지 합창 부분을 썼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장례식 장면에 쓰여 눈물을 자아낸 그 부분이다. 이 합창을 쓰다 모차르트는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악장인 [오페르토리움(봉헌송)]은 앞의 부분들처럼 합창 부분과 일부 화음 지정이 완성되어 있었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것처럼 익명의 의뢰인(아마추어 음악가인 발제크 백작으로 밝혀짐)이 작곡을 의뢰하며 반액을 선금으로 지급했는데, 궁핍한 상황 속에서 남편이 사망한 만큼 곡을 완성해 나머지 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곡가 요제프 아이블러에게 남은 부분의 완성을 맡겼지만 아이블러는 합창부만 완성된 부분의 관현악부를 보충하다가 “모차르트가 손대지 못한 부분을 쓰지는 못하겠다”며 손을 들어버렸다. 작업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에게 돌아갔다. 쥐스마이어는 [라크리모사]의 남은 부분을 완성하고 모차르트가 손을 못 댄 [상크투스(거룩하시다)], [베네딕투스(찬미받으소서)]는 자신이(그의 주장에 의하면) 작곡했다. 마지막 [룩스 에테르나(영원한 빛을)] 악장은 곡 첫머리의 [레퀴엠]과 [키리에] 부분의 음악을 가져와 가사만 바꾸었다. 이로써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이블러와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이 ‘모차르트답지 못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1960년대에 모차르트가 쓴 [아멘 푸가]의 스케치가 발견되면서 이 스케치는 모차르트가 끝맺지 못한 [라크리모사]의 끝부분에 넣으려던 푸가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과적으로 이 스케치의 발견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계속되던 ‘모차르트 레퀴엠의 새 버전’ 완성 시도에 불을 붙였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옛 음악 연주에 있어서 학술적 접근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전(정격)연주’가 활성화되면서 쥐스마이어 판이 아닌 다양한 ‘대안 버전’을 사용한 연주 또는 녹음이 많아졌다. 쥐스마이어 판에만 익숙한 청중으로서는 [라크리모사]의 처음 여덟 마디가 지난 뒤 처음 듣는 선율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오늘날 연주와 녹음에 사용되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판본으로는 프란츠 바이어, 로빈스 랜든, 리차드 몬더, 던컨 드루스, 로버트 레빈 등의 악보가 있다. 몬더와 드루스, 레빈의 판은 ‘아멘 푸가’가 붙어있는 등 비교적 많은 변화를 가했고, 바이어와 랜든의 판은 쥐스마이어 판에서 주로 오케스트라 부분을 손본 ‘보수적’ 경향을 띤다.
21세기에 새로 나온 [투란도트] 새 피날레
1924년, 이탈리아 오페라와 동시대 오페라계를 대표해 온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가 브뤼셀에서 후두암 수술을 받은 후 숨을 거뒀다. 최후의 야심작 [투란도트]를 3막 1장까지 완성한 상태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황녀 투란도트는 자신에게 청혼한 남자에게 수수께끼 세 개를 낸다. 하나라도 틀리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긴 티무르 왕국의 왕자 칼라프가 신원을 숨긴 채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그는 수수께끼를 모두 맞추지만 공주가 약속을 저버리고 결혼을 거부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수수께끼를 낸다. 바로 아침이 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는 것. 투란도트는 칼라프와 함께 있었던 티무르 왕궁의 시녀 류를 고문해 이름을 알아내려 한다. 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푸치니가 마무리한 지점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투란도트가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칼라프와의 2중창,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을 선언하는 피날레가 남아있었다. 푸치니의 전속사 리코르디와 초연을 맡게 된 지휘자 토스카니니, 그리고 유족들이 마무리에 나서야 했다.
푸치니의 유지는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로 알려진 작곡가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 1883~1944)가 작업을 이어받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치니의 아들인 토니오가 어떤 이유에선지 반대했다. 대신 선택된 인물이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 1875~1954)였다. 그는 [투란도트]와 비슷하게 동양을 소재로 한 [사쿤탈라 전설]이라는 오페라를 발표한 바 있는데 투란도트처럼 관현악 규모가 크고 야심적이어서 당시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26년 초연 포스터
초연은 계획보다 1년 연기돼 1926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까지 지휘한 뒤 뒤돌아 ‘푸치니 선생께서는 여기까지 쓰셨습니다’라고 말하고 퇴장했다. 두 번째 공연부터는 알파노가 작곡한 부분까지 전곡이 연주됐다.
토스카니니는 알파노가 완성한 부분에 대한 불만의 뜻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그는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후 특히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2중창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세기가 바뀌고 2001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루치아노 베리오가 푸치니 유족들과 리코르디사의 승인 아래 [투란도트]의 새로운 피날레 버전을 선보였다. 이 버전은 발표 직후 리카르도 샤이, 켄트 나가노,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 중량감 있는 지휘자들이 세계 여러 음악축제에서 지휘했다.
베리오는 2중창에서 푸치니의 스케치와 기존 3막 1장까지에 있던 소재를 알파노에 비해 한층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결혼을 선언하는 피날레 부분은 알파노 판과 달리 조용히 끝나도록 처리해 알파노 판과의 대비감을 높였다.
부인의 승인을 어렵게 얻은 말러 교향곡 10번 ‘연주 버전’
구스타프 말러가 1911년 숨을 거뒀을 때 그는 ‘10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5개 악장으로 구성되었고, 그의 9번 교향곡처럼 마지막 악장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다 사라지듯 조용히 끝나는 얼개의 작품이었다.
말러가 손을 놓은 지점에서 1악장 안단테와 ‘푸르가토리오’(연옥)이라고 쓰인 짧은 3악장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나머지 악장들은 관현악 부분을 듬성듬성 지시한 간략보(short score)나 선율부만 있는 상태였다. 놀라운 것은 선율부조차 없는 부분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전곡이 끝 악장까지 이어져있다는 점이었다. 즉, 곡의 구성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손 댈 부분이 없었으며, 각 악장의 (음표상으로) 정확한 길이까지 정해져 있었다.
말러의 부인인 알마는 1920년대 초반에 이 간략 악보와 선율 부분을 포함한 원고를 정리하도록 했다. 말러의 지인이었던 지휘자 빌럼 멩엘베르흐는 이 악보를 보고 “1, 3악장은 당장 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1악장은 내세(來世)를 내다보는 듯한 매력으로 곧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말러 애호가였던 캐나다인 잭 디터는 전 세계의 유명 작곡가들을 접촉해 ‘이 대곡을 완성해보라’고 주문했다. 쇼스타코비치와 쇤베르크, 브리튼 등은 바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 얘기들이 퍼져나가자 작곡가들 대신 음악학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 음악학자인 클린턴 카펜터와 조셉 휠러, 바그너 전문가인 영국의 데릭 쿠크가 정리된 악보를 입수해 작업에 나섰다.
먼저 성과를 보인 사람은 영국의 쿠크였다. 그는 1960년 첫 연주회용 판본을 완성했고 이 악보는 BBC 3(클래식) 채널에서 방송됐다. 청취자들은 특히 격정적인 주선율이 고조되었다가 사라져가는 5악장에 매료됐다. 그러나 작곡가의 부인인 알마가 더 이상의 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설득을 위해 영국 지휘자 해럴드 번스가 BBC 방송 테이프를 들고 알마의 집을 찾았다.
말러는 이 곡 5악장의 원고에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다’라는 메모를 써 둔 바 있었다. 알마에게 주는 헌사였다. 알마는 현악의 절절한 외침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이내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쿠크 선생께… 이 작품을 세계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자 합니다.”
이후 쿠크는 계속 개정작업을 거쳐 세 번째 버전까지 악보를 내놓았다. (BBC 방송분은 버전 0으로 표시) 카펜터와 휠러도 1960년대에 독자적인 완성보를 선보였다. 이후 지휘자 루돌프 바르샤이를 비롯해 레모 마체티, 주세페 마추카, 요엘 감주 등의 새로운 악보가 나왔다.
선율부가 모두 이어져 있는데도 새로운 시도들이 경쟁적으로 이어진 것은 말러의 관현악법이 지극히 섬세하고 다양해 선율만 보고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러의 관현악에 정통한 음악학자나 지휘자도 골격(선율)만 있는 악보를 근육과 표정을 갖춘 실물로 살려내는 데는 각기 다른 상상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악보마다 차이가 큰 부분은 2악장 스케르초의 소란한 결말 부분과, 느린 5악장에서 큰북의 타격에 이어 저음악기가 느린 상승음형을 타는 부분이다. 큰북의 타격 볼륨, 저음악기에 튜바를 쓸 것인지, 더블베이스 또는 바순을 쓸 것인지, 이들을 조합할 것인지 등에 따라 각각의 악보가 다양한 색깔을 드러낸다.
“3악장에 이어 ‘테 데움’을 연주해 주시오”
거대한 규모의 교향악으로 청년시절의 말러에게 영감을 준 안톤 브루크너 도 마지막 교향곡 9번을 3악장까지 완성하고 4악장을 작업하다 1896년 삶을 마쳤다. 그는 “3악장에 이어 내 [테 데움(찬미가)]를 연주해 주시오”라고 당부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 이 교향곡에 이어 [테 데움]이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브루크너는 완성시키지 못한 마지막 4악장을 위해 많은 분량의 스케치를 남겼으며 각각의 스케치에 순서까지 부여했다. 덕분에 오늘날 비교적 쉽게 이 악장의 전체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윌리엄 캐러건이 1983년 첫 4악장 완성판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완성을 위한 여러 시도들이 나왔다. 이 중 말러 10번 교향곡 부분에서 소개한 주제페 마추카를 비롯해 4명의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판본이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1992년 첫 판이 나온 뒤 2011년에는 5판이 발간됐다. 2012년 사이먼 래틀 지휘 베를린 필이 연주해 내놓은 이 곡의 연주에도 이 4인 공동 연구에 의한 제 5판 악보가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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