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악녀 속에 감춰진 어머니의 눈물 - 빅토르 위고의 루크레치아 보르차와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

히메스타 2017. 1. 2. 11:27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이 오늘날과는 달랐다고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도 ‘교황의 서자()’는 도덕적 부담이자 굴레였다. 가톨릭 교리가 성직자의 대처()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법한 결혼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내연 관계에서 낳은 혼외자식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는 교회 재산이 속세로 흘러 들어가는 걸 미연에 방지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젠나로 역의 마이클 파비아노와 루크레치아 역의 클레어 러터, 2011년 런던 콜리세움 공연, 마이클 피기스 연출.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도니체티,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차] 중 [그는 나의 아들이었소(Era desso il figlio mio)] / 조안 서덜랜드, 런던 오페라 코러스,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리차드 보닝(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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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의 2중 편법

 

1492년 8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된 스페인 발렌시아의 대주교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1431~1503)는 로마 출신의 여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카타네이는 평생 세 번 결혼했지만, 정작 혼인하지는 않았던 교황의 자식들을 낳은 어머니로 더욱 유명했다.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 선출 직후에 소집한 추기경 회의에서 연달아 두 번의 꼼수를 부렸다. 우선 9월 19일 회의에서 그는 차남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가 자신의 혼외 자식이 아니라 “카타네이와 그 남편의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라는 교서의 승인을 요구했다. 차남의 법적 신분에 문제가 없다는 걸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었다.

크리스로파노 델라티시모, [알렉산데르 6세의 초상], 16세기.

이 교서가 통과되자 다음 날인 20일 재소집한 회의에서 교황은 신임 추기경 1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명단에 차남 체사레의 이름이 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교황은 우선 체사레를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한 뒤, 발렌시아 대주교 자리를 물려주는 ‘이중의 편법’을 구사했다. 당시 체사레의 나이는 만 17세에 불과했다.

이전에도 종교적 사명이라는 ‘염불’보다는 세속적 열망의 ‘잿밥’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교황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출신의 이 교황은 가족을 요직에 앉히는 ‘정실주의()’를 노골적으로 일삼았다는 점에서 전임자들과 확실히 달랐다. 교황은 차남 체사레를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한 데 이어, 1496년에는 삼남인 후안을 교황군 총사령관에 앉혔다.

체사레에게는 종교적 후계자, 후안은 군사적 총책임자의 역할을 각각 맡긴 것이었다. 피렌체 출신의 역사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1540)는 “그는 지금까지 교황들 가운데 최악의 교황이자 가장 운 좋은 교황”이라고 적었다.

성경 대신 검

 

하지만 부정() 때문에 부정()도 서슴지 않았던 이 교황의 계산에는 한 가지 착오가 있었다. 차남 체사레의 정치적 야망을 담아내기에 추기경 직책은 턱없이 작은 그릇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책략이나 편법을 동원하더라도 교황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교황의 잘못된 ‘후계 구도’ 탓에 보르자 가문 내부에는 불화와 균열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했다.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 1500~10년경, 로마 팔라초 베네치아.

1497년 6월 가족 모임이 끝난 뒤 귀가하던 교황군 총사령관 후안이 한밤에 실종됐다. 다음 날 아침 후안의 말이 안장이 끊어진 채 주인 없이 돌아오자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 온몸에 아홉 군데의 자상()을 입은 후안의 시신은 테베레 강바닥에서 발견됐다. 교황은 철저한 진상 조사를 지시했지만, 사건 발생 21일 만에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범인은 보르자 가문 내부에 있을 것”이라는 쑥덕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이듬해 7월 체사레는 추기경과 발렌시아 대주교 직책에서 모두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위해 ‘성경’ 대신 ‘검’을 들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체사레가 동생 후안의 직위였던 교회군 총사령관을 물려받자 “동생을 살해한 건 형”이라는 세간의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고 말았다.

추기경에서 총사령관으로 ‘환속()’한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 일대에서 독립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크고 작은 공국()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파면이나 파문 같은 종교적 무기를 휘두르면, 곧바로 체사레가 무력 침공에 나서는 이들 부자의 ‘이인삼각()’은 이 가문의 특기였다. 체사레(Cesare)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Caesar)를 본보기로 삼았다. “카이사르가 아니면 무()”는 체사레의 좌우명이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 했던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체사레는 자신의 칼에도 새겼다.

산티 디 티토, [마키아벨리의 초상], 16세기.

1502년 피렌체의 외교 사절로 체사레와 처음 만났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지배자는 참으로 위대하고 당당하다. 전쟁을 할 때에는 아무리 거대한 일이라도 그에게는 하찮게 보인다. 영광이나 정복을 위해서는 휴식도 취하지 않고 피로나 위험도 느끼지 않는다.”

지배자는 ‘여우의 간교함’과 ‘사자의 용맹함’을 모두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리더십도 체사레와의 만남을 통해 탄생했다.

보르자 가문의 어둠

 

이 가문의 역사에도 명암은 공존했다. 그 빛이 체사레 보르자였다면, 그 뒤편에 드리운 어둠이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 1480~1519)였다. 교황의 딸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의 누이였지만 정작 루크레치아는 집안의 이해득실에 따라 세 번이나 정략 결혼을 해야 했다. 첫 남편인 페사로의 백작과는 ‘남편의 성 불능’을 구실로 내세운 보르자 집안의 강압 때문에 혼인을 취소했다. 두 번째 남편 알폰소 비셸리에 공작은 1500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숨졌다.

바르톨로메오 베네토, [여인의 초상], 16세기. 이 여인은 루크레치아를 모델로 했다고 전한다.

3년 전 후안 암살 사건과 흡사한 범행 수법 때문에 이번에도 “체사레가 배후”라는 의심이 잦아들지 않았다. “체사레는 동생을 살해했고, 여동생과 동침했으며, 교회의 재산을 낭비했고, 부친의 골칫거리였다”라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보르자 부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청 사이에서 완충적 역할을 했던 페라라의 공작에게 루크레치아를 다시 시집보냈다.

하지만 체사레는 1503년 교황이 급서한 이후 잇따른 반란으로 투옥과 스페인 추방, 2년간의 감금 생활이라는 몰락의 길을 밟았다. 그는 처남이 다스리던 나바라 공국으로 탈출해 재기를 노렸지만, 1507년 비아나 포위 공격 도중 스페인군의 매복에 걸려 숨지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티치아노, [성베드로에게 페사로를 봉헌하는 알렉산드르 6세], 1506~11년경.

다양한 장르로 변주된 단골 소재

 

보르자 가문의 역사에 드리운 극명한 명암은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됐다. 『위키드』의 작가 그레고리 머과이어(Gregory Maguire)는 소설 『거울아 거울아』에서 보르자 가문의 비극에 백설공주의 동화를 덧입혀 판타지로 빚어냈다. [대부]의 원작 소설가 마리오 푸조(Mario Puzo)는 미완성 유작인 『패밀리』에서 보르자 가문의 역사를 예의 마피아처럼 묘사했다.

2011년부터 방영된 미국 드라마 [보르지아]는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를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역으로 기용해서 성애와 음모가 난무하는 핏빛 드라마로 그려냈다. 다양한 장르로 변주가 가능할 만큼 이 가문의 역사에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었지만, 일단 보르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상 ‘청소년 관람 불가’를 피해 가기란 쉽지 않았다.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악역으로 출연했던 오손 웰스의 대사는 이 가문의 영욕을 압축한 것만 같았다.

“30년간 보르자 치하에서 살인과 공포, 살육이 이어졌던 이탈리아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르네상스가 피어났지만,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가 지속된 스위스는 고작 뻐꾸기시계나 만들지 않았던가.”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부활한 보르자 가문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가 비운의 여인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여주인공으로 하는 동명() 희곡을 발표한 건 1833년이었다. 보르자 가문을 따라다녔던 흉악한 소문들은 그대로 위고 희곡의 문학적 재료가 됐다. 체사레 보르자가 동생 후안을 살해한 것은 “두 형제가 같은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 여인은 바로 “누이동생”이었다. 루크레치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버지는 후안”이었다는 것이다. 위고의 묘사에 따르면, 보르자 가문은 “끔찍하고 음탕한 왕궁이고, 배반과 살인의 왕궁이며, 간통과 근친상간, 모든 범죄로 물든 왕궁”이었다.

존 콜리에, 와인을 따르는 [체사레 보르자], 1893년. 왼쪽부터 체사레, 루크레치아, 알렉산데르 6세.

루크레치아의 아들 젠나로는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나폴리의 어부 집안에서 자라나 베네치아의 기사가 됐다.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멀리서 아들을 지켜보면서 “내게 불행을 주신 것만큼 그에게는 행복을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네게 한 시간의 생명을 보태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삶을 바치고, 네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피를 쏟겠다”라는 루크레치아의 절규가 보여주듯, 모정이나 효심을 노래할 때 위고의 대사는 음악적 운율로 가득했다.

주세페 릴로시, [도니체티의 초상], 19세기

이들 모자()는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지만 소문과 오해로 인해 그 호감은 증오로 바뀐다. 젠나로는 눈앞의 루크레치아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른 채 “하늘에서 버림받은 어떤 불행아가 당신 같은 어머니를 원하겠는가”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독을 마신 젠나로는 루크레치아가 건넨 해독제를 거부한 채 도리어 어머니를 칼로 찌르고 만다. 비극적인 이 결말 장면에서야 루크레치아는 비로소 “내가 너의 어머니란다”라고 고백한다. 보르자 가문의 실제 역사뿐 아니라 위고의 희곡에서도 가족은 악몽이었다.

위고 자신이 처음으로 연출까지 맡았던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1833년 2월, 초연 직후 석 달간 62차례 상연되며 1만여 프랑을 벌어들일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초연 당일엔 무대 뒤로 몰려든 팬들이 작가를 만나기를 청했지만, 정작 위고는 “내가 청중에게 주는 건 내 생각일 뿐, 나 자신은 아니다”라며 쌀쌀맞게 거절했다고 한다.

도니체티의 손에 한 달 만에 태어난 오페라

 

요제프 크리후베르, [앙리에트 메리크랄랑드의 초상], 1827년경. 앙리에트는 1832년 초연시, 루크레치아 역을 맡았다.

불과 10개월 뒤인 1833년 12월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작곡으로 동명 오페라가 초연됐다.

당대 최고의 인기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가 각색을 맡았지만, 개막 한 달 전에야 원고가 나오는 바람에 도니체티는 한 달 만에 작곡을 마쳐야 했다. 71편에 이르는 도니체티의 오페라 가운데 40번째 작품이었다. 그 해에 새롭게 빛을 본 도니체티의 오페라만 5편에 이르렀다.

하지만 초연 당시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앙리에트의 요청으로 막판에 추가한 최후의 아리아 [그는 나의 아들이었소]는 작곡가에게 끝내 불만으로 남았다. “그는 나의 아들이요, 희망이요, 위안이었다. 그가 신의 분노를 샀나 보구나. 그는 나를 순수하게 해주는 듯했지만, 이제 그는 죽고 모든 빛도 사라졌다. 내 마음도 더불어 멈추고 마는구나. 천벌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구나”라는 가사는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식의 칼에 찔린 어머니가 죽어가면서도 화려한 콜로라투라 풍의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 작곡가의 마음에는 못내 걸렸다.

어머니의 노래, 오페라의 힘

 

핀투리키오, [카타리나 성녀로 그려진 루크레치아], 1494년경.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 소개될 만큼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이 오페라를 감상한 원작자 위고는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프랑스 법원에서 공연 금지령을 얻어냈다. 원작의 배경이었던 이탈리아를 터키로 옮기고, 작품 명을 ‘포스코의 엘리사’나 ‘나폴리의 조반나 1세’ 등으로 고치는 우여곡절 끝에야 오페라 공연은 재개됐다. 개작할 때 작곡가는 루크레치아의 마지막 아리아를 빼버리는 대신, 아들 젠나로의 노래를 새롭게 써넣었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가 전반적으로 퇴조했던 20세기 전반에는 이 작품도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스페인 출신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e, 1933~)를 필두로 새로운 소프라노들이 등장한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65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 당시 카바예는 몸이 불편했던 마릴린 혼을 대신해서 막판에 여주인공 역으로 교체 투입됐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25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 카바예와 호주 출신의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 1926~2010)는 이 작품을 수차례 음반이나 영상으로 남길 만큼 애정을 쏟았다. 결국 이 오페라는 스타 소프라노를 탄생시키는 ‘산실 ‘이 됐다. 작곡가의 개작 과정에서 삭제됐던 소프라노의 마지막 아리아도 물론 되살아났다. 당초 도니체티는 소프라노의 등쌀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아리아를 썼지만, 마침내 이 오페라를 구원해준 것은 어머니 루크레치아의 마지막 노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