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누군가의 고별작, 다른 누군가의 대뷔작 - 라신의 희곡 페드르와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히메스타 2016. 12. 29. 16:07

 

많은 비극은 아버지의 부재() 상황에서 비롯한다. 미국 감독 줄스 다신(Jules Dassin, 1911~2008)의 1962년 영화 [페드라(Phaedra)]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그리스의 선박왕 타노스(라프 밸론Raf Vallone 분)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사이, 아내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분)는 양아들 알렉시스(앤서니 퍼킨스 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이 금기를 넘어서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하지만 "장작에 불을 붙여달라"라는 페드라의 주문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는 고백과도 같다. 양아들 알렉시스가 그 장작에 불을 붙이는 순간, 계모와 아들 사이의 금기도 깨진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앞에서 이들은 말없이 손을 잡는다.

런던 국립극장에서 니콜라스 하이트너의 연출로 상연된 [페드르]. 페드르 역은 헬렌 미렌이 맡았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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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모,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중 [사랑의 잔인한 어머니(Cruelle mère des amours)] | Bernarda Fink, 루브르의 음악가들(Les Musiciens du Louvre), 마크 민코프스키(Marc Minkowski,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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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이 남긴 파장

 

이 영화의 빼어난 점은 계모와 아들이 잘못된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그 이후에 등장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파장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현실과 정념()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 여인 페드라는 남편의 손길을 거부하고 알렉시스의 이름만 되뇌기에 이른다. 자신을 돌보는 유모 앞에서도 페드라는 자꾸 "몸이 아프다" "죽고 싶다"라고 고백한다. 치정()의 열병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다. 영화는 이 여인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여성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편을 택한다.

[페드라]의 영화 포스터와 영화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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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오히려 현실적인 쪽은 양아들 알렉시스다. 그는 또래의 여자들을 만나며 금지된 사랑을 잊고자 애쓴다. 하지만 위선적인 화해보다는 정직한 파멸을 택하기로 한 페드라의 결심으로 인해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ToccatasFugues)]를 흥얼거리며 그리스 에게 해의 절벽으로 추락하는 알렉시스의 스포츠카는 도덕적 인습과 금기를 뚫고 나간 자의 파멸을 상징한다.

1960년대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된 영화로는 지나칠 만큼 파격적인 주제를 다뤘던 [페드라]는 사실상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변주였다. 선박왕 타노스는 신화 속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였고, 페드라는 이름 그대로 페드라였다. 절벽 아래로 추락한 아들 알렉시스는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페드라는 그리스 노래를 부르기 전에 "다른 그리스 노래들처럼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라고 암시한다. 타노스가 알렉시스에게 사준 스포츠카는 "지상에서 가장 빠른 관()"에 비유된다.

알마 타데마 경, [이폴리트의 죽음], 1860년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투스』와 세네카의 『페드라』

 

금기와 파국이 뒤엉킨 이 신화를 가장 먼저 문학의 소재로 삼았던 건,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였다. 그는 자신의 희곡 『히폴리투스』에서 양아들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페드라가 거꾸로 히폴리투스가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목매달아 죽기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히폴리투스는 유모를 통해 페드라의 사랑을 전해듣지만 “테세우스가 출타 중이신 동안 나는 집을 떠나 있을 것이며 발설하지 않을 것이오”라며 구애를 거절한다. 하지만 히폴리투스의 다짐은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이 맹세 때문에 히폴리투스는 아버지 테세우스의 추궁에도 페드라가 자신에게 구애했다는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결국 추방령을 받고 해안을 따라 전차를 몰고 가던 히폴리투스는 바다 괴물에 놀란 말들이 질주하는 바람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숨을 거둔다. 영화 [페드라]의 결말과 같다.

에우리피데스 초상 조각상, BC.330년,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로마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세네카(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도 희곡 『페드라』를 남겼다. 이 작품에서 세네카는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골격을 가져오면서도 여주인공의 성격은 한층 대담하게 설정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페드라는 신들의 분노 때문에 그릇된 사랑에 빠지는 수동적 희생자에 가깝다. 반면 세네카의 희곡에서 페드라는 직접 흉계를 꾸미고 귀국한 테세우스 앞에서 양아들을 모함한다. 세네카의 작품에서 페드라는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는 여인이다.

세네카가 남긴 희곡 아홉 편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등장 인물의 행동보다는 대사에 많은 비중을 싣고 있다. 이 때문에 무대 상연용보다는 식자층의 모임에서 낭송하기 위한 작품으로 추측된다. 특히 쾌락과 금욕을 주제로 한 등장 인물들의 대화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절제를 강조한 세네카의 스토아 철학을 희곡으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페드라의 유모: “신은 젊은이의 머리에 쾌락이라는 관을 씌우고, 늙은이의 머리에는 고행이라는 관을 씌운다. 왜 당신은 그것을 억제해서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려 드는가.”
히폴리투스: “덕 있는 자는 부에 대한 욕심도, 기약할 수 없는 명예욕도, 덕에 거스르는 속된 기질도, 해로움 많은 탐욕도, 야심에 가득 찬 공상도 모른다.”
세네카, 『페드라』

하지만 이 비극에는 한 가지 딜레마가 숨어 있었다. 페드라가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양아들에게 사랑을 고백할 경우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비극적 숙명의 오이디푸스가 있지만, 오이디푸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지만, 페드라에게는 면죄부가 없다. 이 때문에 후대의 작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페드라의 신화를 변주하기에 이른다.

라신의 작품 속 극적 장치들

 

이 신화를 다시 희곡의 소재로 삼은 건,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99)이었다. 코르네유, 몰리에르와 더불어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꼽히는 라신이 1677년 발표한 마지막 희곡이 『페드르』였다. 당초 작품의 제목은 ‘페드르와 이폴리트’였지만, 개정판부터 ‘페드르’로 바뀌었다. 페드르는 페드라, 이폴리트는 히폴리투스의 프랑스어식 표기다. 이 작품의 서문에서 라신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딜레마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사실상 페드르는 완전하게 유죄도, 완전하게 무죄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페드르가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유죄이지만, 그 정념이 자의적 충동이라기보다는 신들의 형벌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고의성이 없다.

[장 라신의 초상], 1690년경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라신은 다양한 극적 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페드르의 모든 죄를 유모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라신은 서문에서 “중상모략이라는 것이 고귀하고 덕 있는 공주의 입에서 흘러나오기에는 너무나 비열하고 음험한 면이 있다”라면서 “이러한 비열함은 차라리 유모에게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보았다”라고 밝혔다. 왕에게 모략을 하는 당사자도 페드르가 아니라 유모다.

또 한 가지 해결책은 ‘아리시’라는 새 인물의 등장이다. 아리시는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에서 히폴리투스의 아내로 언급됐던 여인이다. 라신은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이폴리트의 진정한 연인으로 환골탈태시킨다. 페드르에게 ‘연적’이 생긴 것이다.

희곡 속의 사랑도 페드르와 이폴리트의 ‘일차 방정식’에서 이폴리트와 아리시, 페드르와 이폴리트라는 ‘고차 함수’로 변모했다. 프랑스 연출가 장 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 1910~94)의 말처럼 “『페드르』는 한 여인을 위한 협주곡이 아니라, 여러 배우들을 위한 교향곡”이 된 것이다.

알렉산드르 카바넬, [페드르], 1880년

자크 프라동의 인기, 라신의 은퇴

 

1677년 1월 1일, 이 작품이 초연되고 불과 이틀 뒤에 라신의 경쟁자였던 자크 프라동((Jacques Pradon, 1632~98)이 동명() 작품을 다른 극장에 올렸다. 파리 한복판에서 연극 라이벌전이 벌어진 셈이었다. 평소 라신은 “프라동과 나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안다는 점”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초반에 호평을 받은 쪽은 프라동이었다. 라신을 질시하던 반대파 귀족들이 라신의 작품이 공연되는 극장 좌석을 싹쓸이한 뒤에 공연장이 텅 비게 내버려뒀다고도 한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라신이었다. 프라동의 작품은 단명하고 말았지만, 라신의 작품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고전 비극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 이후 라신은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멩트농 부인의 요청으로 생시르 여학교 학생들을 위해 집필한 두 편의 종교극 외에는 세속극에 손대지 않았다. 25세에 [라 테바이드(La Thébaïde)](1664)로 데뷔했던 그는 13년간 열 편의 희곡을 발표한 뒤 38세 때 사실상 연극계를 떠났다. 모두가 박수칠 때 떠난 모양새 때문에 그의 은퇴를 둘러싸고 갖가지 추측이 쏟아졌다. 연인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절필한 것이라거나 종교에 귀의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심지어 『페드르』를 능가할 만한 걸작을 쓸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실은 라신은 그 해 왕실 사료 편찬관으로 임명된 뒤 16년간 루이 14세를 수행하면서 국왕의 업적을 기록했다. 공직 생활이 그의 공식 은퇴 사유였다.

라모의 손에 태어난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누군가의 고별작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데뷔작이 되기도 한다. 라신의 마지막 세속적 비극이었던 『페드르』는 18세기 프랑스 작곡가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가 자신의 첫 오페라로 고른 작품이었다. 라모는 화성학 이론가이자 하프시코드를 위한 건반 작품의 작곡가로 명성이 높았지만, 극적인 내용을 담은 성악곡은 몇 편의 세속 칸타타를 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라신의 희곡을 바탕으로 극작가 시몽 조세프 펠레그랭이 집필한 대본을 건네받은 라모는 오페라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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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드르와 이폴리트』 초판 속표지

2 조제프 아베드, [장 필리프 라모의 초상], 1728년경

1833년 10월 초연된 라모의 뒤늦은 오페라 데뷔작이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다. 이 오페라는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과 논쟁거리를 함께 몰고 왔다. ‘우리 시대의 오르페우스’라는 격찬도 있었지만, 선배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의 오페라 전통에 대한 훼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륄리 지지자들은 이 작품의 화성적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성악에 비해 관현악이 두드러진다고 공격했다. 1730년대 내내 음악 비평가와 청중은 륄리 지지파인 ‘륄리스트(Lullystes)’와 라모 옹호자를 뜻하는 ‘라미스트(Ramistes)’나 ‘라모뇌르(Ramoneurs)’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라모뇌르’는 프랑스어로 ‘굴뚝청소부’를 뜻하기도 한다.

금기라는 화염으로 가득한 폭력의 극

 

20세기에 들어 라신의 비극에 잠재된 잔혹성의 징후를 재조명한 것은, 프랑스의 문예비평가이자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80)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라신에 관하여』에서 라신의 비극을 ‘사랑의 극’이라기보다는 ‘폭력의 극’으로 재정의했다. 등장 인물이 다른 인물에 대해 전권()을 행사하는 것 같지만, 정작 사랑만큼은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테제(테세우스)는 페드르(페드라)와 결혼했지만 사랑받지 못하고, 페드르는 이폴리트(히폴리투스)를 갈망하지만 소유하지 못한다. 등장 인물은 절대적 권력과 사랑 가운데 그 무엇도 손에 넣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레옹 박스트가 그린 페드르와 테제, 1923년

바르트는 “라신에게 동사 ‘사랑하다’는 본질상 자동사()인 듯하다”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목적어가 필요치 않은 동사’라는 자동사의 문법적 정의처럼, 페드르의 정념은 대상인 이폴리트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페드르를 옭아매고 지배한다. “사랑은 애초에 그 목표물에서 벗어나 있기에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바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라신의 비극들은 대부분 잠재적인 강간”이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음이나 범죄, 사고, 추방뿐”이라고 말했다.

신화나 문학에서 금기는 격렬한 화염()과도 같다. 눈부신 조도()에 손으로 가리다가도, 결국 뜨거운 열기에 손을 데거나 낙인이 찍히고 만다. 개인의 쓰라린 경험이 축적되면 집단적 금기가 된다. 그 금기를 상징화한 것이 신화다. 그래서 신화는 금기에 다가갔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운명을 다룬다. 시간이 흐르고 신화가 차갑게 식어서 화석()이 될 무렵, 또다시 새로운 예술 작품이 나와서 굳게 응고된 긴장과 갈등을 재폭발시킨다. 에우리피데스와 세네카, 라신과 롤랑 바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금기의 신화에 매혹됐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