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랑 피아노 쳐요.” 1877년 어느 날.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Aleksandr Borodin, 1833~87)의 작업실에 들어온 어린 의붓딸 가냐가 말했다. 보로딘은 멈칫하다 한 마디 물었다. “하지만 가냐, 너 아직 피아노 칠 줄 모르지 않니?”
“아니에요. 칠 줄 알아요.” 가냐는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가락만으로 피아노를 뚱땅거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젓가락 행진곡’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간단한 곡이었다. “봐요, 칠 수 있잖아요. 같이 쳐요. 네?”
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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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알렉산더 보로딘, [이고르 공(Price Igor)] 중 [폴로베츠 사람들의 춤(Polovtsian Dances)] / 키로프 합창단, 키로프 오케스트라(연주), 발레리 게르기예프(지휘) | |
2 | 림스키-코르사코프, 'Sheherazade' mov. 3 / 토마스 크바스토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 | |
3 | Bakirev 'islamey' / 고텐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네메 예르비(지휘) | |
4 | 무소르스키, 'Pictures at an exhibition' - 'the great gate of kiev' / 기돈 크레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연주), 클라우디오 아바도(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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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까지 참여한 흥미로운 프로젝트
가냐의 왼편에 앉아 반주 화음을 넣어주던 보로딘은 ‘무한 반복’하는 이 단순한 작품의 패턴에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에서 ‘커틀릿 폴카’라고 불리며 퍼져가던 선율이었다. 보로딘은 오선지를 꺼내 이 곡의 반복 패턴을 기본으로 소품 세 곡을 썼다. 각각 [폴카]와 [장송행진곡], [레퀴엠(진혼미사곡)]이라는 우울한 제목도 붙였다.
얼마 뒤 보로딘과 친한 작곡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자르 큐이,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등 이른바 ‘러시아 5인조’로 불리는 작곡가들이 함께 했다. 역시 ‘5인조’ 멤버로 꼽히는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는 자리에 없었고, 대신 아나톨리 랴도프가 자리에 함께 했다.
보로딘은 의붓딸 가냐와 피아노를 치다 작곡하게 된 세 소품을 이 자리에서 선보였다. 친구 작곡가들은 ‘흥미롭다’며 즐거워했다. 단순한 음형의 반복에서 놓여나지 못한다는 조건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변주를 펼친다는 시도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이봐, 알렉산더, 우리도 이 음형으로 뭔가 써보겠네. 함께 재미있는 곡을 만들어보자고.”
종종 필요 이상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던 무소륵스키만 “아이고, 의미 없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작곡가 친구들이 참여한 ‘커틀릿 폴카’ 작품집은 1879년에 처음 완성되었고, 이듬해 ‘주제와 24개 변주 및 15개의 소품’이라는 제목으로 확대되어 출판되었다. 보로딘과 그로부터 아이디어를 처음 얻은 큐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랴도프가 함께 이름을 넣은 흥미로운 프로젝트였다. 이렇게 ‘커틀릿 폴카’ 또는 ‘젓가락 행진곡’은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 네 명을 한 악보에 묶었다. 마지막 변주 뒤에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선율에 의한 장려한 종결부를 넣자는 아이디어도 제기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을 절대 기교의 폭풍 속에 몰아넣은 ‘피아노의 귀신’ 리스트 페렌츠(Franz Liszt)가 이 프로젝트에 가세한 것이다. 러시아의 지인으로부터 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리스트는 ‘나도 변주를 하나 쓰면 재미있겠는데’라고 흥미를 보였고 이 얘기가 러시아의 음악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에게 비판적이었던 일부 ‘서구파’ 평론가들이 “리스트 같은 대가가 그런 허접한 일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리스트가 주저 없이 ‘커틀릿 폴카’ 주제에 의한 전주곡을 써서 보로딘에게 보낸 것이다. 이후 리스트의 이 전주곡이 [변주와 소품들] 악보에 삽입되었다. 1893년 최종 출판된 악보에는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쉬체르바코프의 소품이 추가되어 ‘소품’은 17개로 늘어났다.
원래 제목은 ‘유명한 썰기(chop) 왈츠’
[젓가락 행진곡]은 유럽에서 대체로 영어명 ‘Chopsticks’(젓가락)으로 불린다. 우리말 제목에서는 ‘행진곡’만을 더 붙인 셈이다. 대체로 이 곡은 (오른쪽에 앉은 연주자가) 양손 약지 손가락만으로 연주하므로 젓가락을 연상시켜 붙인 이름으로 상상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 곡은 원래 두 손 약지 손가락으로 치는 곡이 아니었다.
이 곡의 악보는 1877년 영국에서 ‘아서 드 럴리(Arthur de Lulli)’라는 작곡가의 이름이 붙어 처음 출판되었다. 악보에 쓰인 제목은 ‘유명한 썰기 왈츠(The celebrated chop waltz)’였다. “양손을 마주 보도록 세워서 새끼손가락이 아래로 가도록 한 뒤 건반을 내려치십시오”라는 친절한 연주법 설명도 곁들여졌다. 오늘날 통용되는 ‘양손 약지 연주법’과 차이가 있다.
결국 ‘칼로 음식을 썰듯이 연주한다’는 점에서 처음의 제목이 나왔고, 여기서 ‘유명한(celebrated)’이 빠진 채 ‘썰기 왈츠(chop waltz)’로 불리다가 ‘젓가락(Chopsticks)’이 된 것이다.
작곡가 이름으로 표기된 아서 드 럴리는 당시 16세였던 어린 스코틀랜드 여성 유페미아 앨런(Euphemia Allen)의 가명이었다. 그의 오빠는 ‘모차르트 앨런’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던 글래스고의 악보출판업자였다. 어린 동생이 악보로 정리한 곡을 오빠가 가명을 붙여 출판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동생이 아직 어린 여성이어서 그의 이름을 붙여 악보를 출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 곡이 이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성년자의 곡이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셈이다.
스코틀랜드 소녀의 곡을 러시아인들이 따라했나?
의아한 점은 보로딘의 딸 가냐가 작곡가인 아빠 앞에서 이 곡을 쳐 보인 것이 악보가 출판된 것과 같은 해인 1877년이었다는 점이다. 연주하기 쉽고 선율이 친숙해 급속히 퍼져나갔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해 출판된 곡을 같은 해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어린이가 알고 있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에는 라디오도 TV도 인터넷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며, 심지어 축음기도 바로 이해에 에디슨에 의해 발명되었으므로 대중에게 보급되기 전이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우연히도 유페미아 앨런이 작곡한 선율이 당시 러시아에서 피아노 놀이용으로 유행하던 선율과 유사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파-솔에서 시작해서 두 손가락이 한 옥타브까지 간격을 넓히다가 되돌아오고, 이어 3도 차이로 나란히 하행음형을 그리는 등의 ‘닮음’은 우연의 결과로 나타나기 힘들다.
또 하나는, 오늘날 확보된 앨런의 ‘초판’악보는 1877년으로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만 이보다 먼저 나온 ‘실제 초판’ 악보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먼저 나온 악보가 서유럽을 거쳐 1877년 즈음에는 러시아에서도 유행했을 수 있다.
세 번째 설명으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피아노 놀이를 우연히 (러시아인의 스코틀랜드 파견 등에 따라) 유페미아 앨런이 듣게 되어 악보로 정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 세 가지 가설 중 아무것도 정설로 확정할 수는 없다. 분명한 점은, 이 선율을 처음 악보로 정리해 발표한 ‘정통성’은 여전히 아서 드 릴리(유페미아 앨런)에게 있다.
단, 러시아에서 유행한 ‘커틀릿 폴카’는 앨런이 정리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젓가락 행진곡’과는 다소 다르게 들린다. 우리가 아는 ‘젓가락 행진곡’이 파-솔, 미-솔, 레-시 각 두 음을 여섯 번씩 치는 것과 달리 러시아의 ‘커틀릿 폴카’는 파-솔에 이어 미-라, 레-시로 바로 아래위 한 음씩을 넓혀나간다.
[젓가락 행진곡] 악보
주제가 처음 나오는 부분의 ‘타격’ 방법도 다르다. 유페미아 앨런이 정리한 악보는 처음에 두 손을 동시에 나란히 치는 것으로 나오지만 러시아의 ‘커틀릿 폴카’는 앨런 악보의 ‘주제’가 아니라 ‘제1 변주’에 해당하는, 두 손을 번갈아 내려치는 부분으로 연주를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보로딘과 친구들이 작곡한 변주가 이 ‘번갈아 치는’ 음형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당시 러시아에서 이 곡이 ‘커틀릿 폴카’외에 ‘타티-타티’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점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빅’까지,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세상에 나오고 100년이 훌쩍 넘도록 ‘젓가락 행진곡’ 또는 ‘Chopsticks’는 전 세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칠 수 있는’ 피아노곡 위치를 유지하며 사랑 받고 있다. 양손 한 손가락씩으로 칠 수 있을 정도로 운동신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다, 음표들이 2도 간격으로 진행되어 외우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칠 수 있는 곡이라는 점을 넘어 각 가정까지 포함하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피아노곡일지도 모른다. 보로딘의 어린 딸 가냐가 그랬듯, 전 세계에서 피아노 훈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나도 피아노 칠 수 있다’며 농담 섞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젓가락 행진곡’덕분이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46년작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도 이 곡이 등장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두 손을 잃은 주인공 호머(해럴드 러셀 분)는 삼촌의 술집에서 삼촌과 함께 이 곡을 친다. 물론 ‘여러 손가락’이 필요한 저음 반주 부분은 삼촌이, 단순한 선율부는 호머가 연주한다. 호머는 손 대신 달린 갈고리로 화려한 글리산도(이어지는 음들을 일정한 높이까지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연주하는 기법)까지 소화해 영화 속에서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빅]에서도 이 곡이 등장한다. 정신연령은 아이 그대로인 채 몸만 커져버린 소년 조쉬는 건물 바닥에 설치된 커다란 피아노 건반을 보고 두 발로 [젓가락 행진곡]을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물론 즐겁다. 연령을 넘어 누구나 즐거워할 수 있는 음악 또는 연주의 대명사로 이 곡이 표현된 것이다.
영화 [빅]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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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특별한 훈련 없는 피아노 초보자들이 [젓가락 행진곡]을 마스터한 뒤에 도전하는 대표곡으로 [마음과 영혼(Heart and soul)]이라는 곡을 꼽을 수 있다. 원곡은 호기 카마이클이 1938년 발표한 대중가요이며 비 웨인(Bea Wain)이 노래했다. I-vi-ii-V (도미솔-라도미-레파라-솔시레)의 단순한 화음이 반복되어 친근하며 외우기 쉽다.
한국에서 [고양이 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Flea Waltz(벼룩 왈츠)]도 피아노 초보자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젓가락 행진곡]이나 [마음과 영혼]과 달리 기원은 불명이지만 전 세계에서 ‘벼룩 왈츠’(독일, 벨기에), ‘벼룩 폴카’(네덜란드), ‘개 왈츠’(러시아), ‘고양이 왈츠’(불가리아), ‘돼지 왈츠’(체코) ‘작은 원숭이’(멕시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점을 보면 앞의 두 곡보다는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벼룩 왈츠’는 나라에 따라 ‘왈츠’ 또는 ‘폴카’로 각각 다른 장르명을 갖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2박자로 진행되므로 명백히 폴카에 속한다. 19세기 유럽에서와 달리 20세기 대중들에게는 ‘폴카=2박자 또는 행진곡풍’, ‘왈츠=3박자’라는 단순한 분류가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음악사에 육중한 자취를 남긴 ‘아마추어’들
보로딘과 한자리에 모여 [젓가락 행진곡]을 놓고 즐거워했던 이른바 ‘러시아 5인조’는 워낙 함께 어울려 희희낙락하는 사이였다. 당시의 회합에 발라키레프가 빠진 점은 앞에 언급한 것과 같다. 이 자리에 낀 랴도프는 이들보다 연배가 어려 ‘5인조’ 그룹이라는 개념이 생길 때는 여기 가담하지 못했지만 이후 선배 민족주의 작곡가들과 어울려 나란히 활동하게 된다.
‘5인조’ 작곡가들은 나중에 ‘위대한 아마추어들’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발라키레프와 랴도프 외에는 작곡 외에 각자의 본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로딘은 화학자였다. 단지 ‘화학 연구도 이어간 작곡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데히드 연구로 당대 화학을 진보시킨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 후보생이었다. 무소륵스키와 큐이는 군에서 장교로 재직했다.
이들을 한데 묶어 부르기 시작한 사람은 러시아에서 영향력이 컸던 음악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였다. 그는 다섯 사람을 ‘막강한 소집단’이라고 불렀다.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아버지였던 미하일 글링카(Mikhail Glinka, 1804~1857)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데서 이들은 공통됐다. 러시아 정교 성가 선율과 풍부한 민요 선율이 이들 영감의 원천이었다. 글링카를 깊이 경모했던 작곡가 알렉산더 다르고미슈스키(1813~1869)가 이들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하며 5인조의 ‘중시조(中始祖)’ 역할을 했다.
그러나 흔히 오해받는 것처럼 이들이 차이콥스키나 루빈시타인 형제로 대표되는 이른바 ‘서구파’와 등을 돌리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나 루빈시타인 그룹은 이들과 늘 긴밀한 교류를 갖고 있었으며, 서로 작품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들을 서로 구분하며 논전을 펼친 것은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이 시대의 음악평단이었다. 발라키레프는 차이콥스키가 29세 때 그에게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을 쓰라고 권하며 자기가 상상한 곡의 구성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어 젊은 작곡가가 이 멋진 작품을 완성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다섯 아마추어 중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가장 뚜렷한 진보를 보였다. 친구 음악가들이 고도의 관현악법이나 대위법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모든 작곡의 기교를 마스터하고 전업 작곡가 겸 음악가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아마추어리즘은커녕 전 유럽을 걸쳐 최고의 관현악법 대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면서 역시 훗날 관현악법의 거장으로 불리게 되는 이탈리아의 레스피기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보로딘이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오페라 ‘이고르 공’, 역시 무소륵스키의 유작이 된 ‘보리스 고두노프’등을 완성해낸 것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손길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두 여성의 자취
보로딘에게 젓가락 행진곡 또는 ‘커틀릿 폴카’의 선율을 소개해준 어린 의붓딸 가냐는 보로딘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예카테리나 프로토포포바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었다. 보로딘은 가냐를 무척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서 드 럴리라는 이름으로 음악사 속에 작품 하나를 올려놓은 유페미아 앨런은 1949년 88세로 삶을 마쳤다. 그 역시 ‘젓가락 행진곡’ 악보를 남긴 외에 더 이상의 음악활동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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