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왜 죄 없는 자가 고통을 받는가 -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와 희가극 캉디드

히메스타 2016. 12. 26. 10:51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을 하고 매춘에 종사합니다. 왜 하느님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시나요? 아이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요.”

2015년 1월 18일 필리핀을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 1936~)에게 열두 살 난 소녀가 울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소녀는 한때 거리를 배회하다가 가톨릭 구호 기관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녀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은 당초 예정됐던 연설을 미룬 채, 그 자리에서 스페인어로 이렇게 말했다.

“소녀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말이 아니라 눈물로 표현했어요. 아이들이 굶주리고 거리에서 마약에 노출되며 노예처럼 버림받고 학대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때 우리는 눈물 흘리는 법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합니다.”

레너스 번스타인의 [캉디드]의 한 장면. 퀴네공데 역은 안나 크리스티가 맡았다. 런던 콜리세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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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아티스트 & 연주
1 레너드 번스타인, 오페레타 [캉디드] 중 [화사하고 즐겁게(Glitter and Be Gay)] / 준 앤더슨,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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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고통 받는가?

 

왜 세상에는 악이 판치고,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 것일까. 자고이래로 수없이 반복됐을 법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간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의인() 욥이 일러준 메시지는 '고난 역시 모두 신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욥기』의 주인공인 그는 자녀와 재산을 졸지에 잃고 온몸에 종기가 생겨 처참한 몰골이 된다. 욥이 고난의 이유를 짐작할 길도 없이 절망의 끝으로 내몰릴 때 하느님은 폭풍우 한가운데서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본 일이 있느냐.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일이 있느냐. 세상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 네 말 한번 들어보자.”『욥기』 38장

조르주 드라 투르, [아내에게 비웃음을 사는 욥], 17세기경

절대자는 유한한 인간에게 고통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라고 준엄하게 다그친다. 신앙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불행이나 악()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신정론()이나 변신론()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신의 정당함’에 대한 이론이다.

이 용어의 창안자는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다. 미적분의 개념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사칙연산()이 가능한 기계식 계산기를 창안했던 이 비범한 학자는 철학적으로는 낙관주의자에 가까웠다. 요컨대 세상이란 신이 창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상태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1710년 『변신론』에서 이를 ‘가능한 최상의 세계(le meilleur des mondes possibles)’라는 말로 정식화했다.

모든 불행과 악을 위한 철학적 우화

 

크리스토프 프란케, [라이프니츠의 초상], 17세기경

하지만 신이 세상을 일부러 불완전하게 창조했을 리 없다는 그의 논지에는 동어반복의 함정이 숨어 있었다. 눈앞에 실재하는 악이 궁극적으로는 신의 전지전능함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신심()으로 가득했던 구약 성서의 욥이야 기꺼이 납득하겠지만, 불행과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신음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이를 받아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 논리적 간극과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극작가가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Voltaire, 1694~1778)였다.

그가 1759년 발표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는 세상에 존재할 법한 모든 불행과 악을 작품에 대입해본 철학적 우화와도 같았다. 이를테면 캉디드는 세속의 욥의 운명이었다.

1759년에 발행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의 권두 삽화

프랑스어로 ‘캉디드(candide)’는 ‘순박하다’라는 뜻의 형용사다. 독일 베스트팔렌의 성에 살던 캉디드는 영주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 죄로 성에서 쫓겨난 이후 온갖 시련을 겪는다.

점심 한 끼를 잘못 얻어먹은 죄로 군대에 끌려가고, 전쟁터에서 무사히 탈출하지만 폭풍우로 배가 난파하는 식이다. 작품은 지진과 질병, 전쟁과 살인 같은 참사를 등장인물들에게 겪게 한 뒤 반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행의 몰래카메라’와도 같았다.

이 작품에서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 캉디드의 스승 팡글로스다. 팡글로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모든(pan) 말들(gloss)’이라는 어원에서 비롯한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는 라이프니츠 철학이 체화()된 인물 그 자체다. 팡글로스는 남작 부인의 몸종과 사랑을 나눴다가 성병으로 온몸이 종기투성이가 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이 병이 없었다면 오늘날 초콜릿이나 붉은 염료도 없었을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전쟁 같은 시대상의 반영

 

흡사 불행 경연 대회와도 같은 작품의 초반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에 대한 통렬한 야유이자 풍자다. 캉디드가 연모했던 퀴네공드는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자신도 군인에게 능욕당하고 배에 칼을 맞는 참화를 겪는다. 그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노파는 “거의 매일 능욕당하고, 어머니의 사지가 찢기는 참경을 목도하고 굶주리고, 전쟁의 참상을 겪은데다 이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라고 맞받아친다. 이러한 작품 설정에는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1756년부터 계속된 7년 전쟁 같은 시대상이 녹아 있었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리스본의 모습, 1755년

하지만 작품이 부조리와 불행의 연속인데도 도무지 웃음을 참기 힘든 건, 볼테르 특유의 익살과 해학이 버무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캉디드가 볼기짝을 맞는 동안에도 곁에서 성가대는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가톨릭 전례 음악인 [미제레레(Miserere)]를 부르는 코믹한 설정을 빼놓지 않는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웃음을 통해 참혹한 상황을 잊게 하고 작품의 우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볼테르가 ‘철학적 콩트(contes philosophiques)’라고 불렀던 우화 양식은 당대의 서슬 푸른 검열을 피해 가는 문학적 장치이기도 했다. 볼테르는 50대부터 『자디그』와 『미크로메가스』등 26편의 ‘철학적 콩트’를 남겼다. 그 가운데 대표작이 『캉디드』였다.

캉디드가 수리남 주위에서 불구가 된 설탕 공장의 노예를 만난 장면, 1787년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행과 악을 믿음으로 껴안으라고 한다. 하지만 종교가 힘을 쓰지 못하는 순간, 세상에 남는 것은 온통 부조리뿐이다. 캉디드가 수리남에서 마주친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을 묘사한 대목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설탕 공장에서 일하는 노예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잘려져 나간 채 속바지만 달랑 걸치고 있다. 연유를 묻는 캉디드의 질문에 노예는 이렇게 답한다.

“설탕 공장에서 일하다 잘못해 맷돌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면 손을 자르고, 도망을 치다 잡히면 다리를 자르지요. 저는 그 두 가지를 다 겪었습죠. 당신네 유럽인들이 설탕을 먹는 건 바로 그 덕입죠. 개나 원숭이나 닭도 우리 처지보다는 훨씬 나아요. 저를 개종시킨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일요일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모두 아담의 자식들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족보 같은 건 모르지만 선교사들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모두 친척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친척에게 이렇게 지독하게 굴 수 있을까요."볼테르, 『캉디드』

흑인 노예의 말에 캉디드는 “낙관주의란 나쁜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좋다고 마구잡이로 우기는 것”이라고 탄식하기에 이른다. 유럽의 식민 지배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점이 대략 19세기 후반이라는 걸 상기하면, 볼테르의 비판이 얼마나 날카롭고 이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안분지족과 일상의 노동이라는 덕목

 

하지만 볼테르는 ‘부조리의 작가’ 카뮈(Albert Camus, 1913~60)도 아니고 ‘반제국주의의 혁명가’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도 아니다. 구약 성서의 욥과 『이방인』의 뫼르소 사이에 공통점이 없듯이, 절대적 믿음과 부조리한 삶 사이에도 접점이나 타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볼테르가 권하는 해결책이 ‘안분지족()’이다.

장 앙투안 우동, [볼테르의 초상], 1791년

작품 말미에 캉디드는 유대인 상인에게 속아서 대부분의 재산이 거덜난다. 평생 흠모했던 퀴네공드 공주도 거듭된 고행에 아름다움을 잃고 추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캉디드는 “일은 권태와 방탕, 궁핍이라는 세 가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라는 터키 촌로의 말을 듣고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감내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캉디드는 팡글로스의 장광설을 중간에 자른 뒤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꿔야죠.”

인간을 먹여 살리는 건, 선악에 대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일상의 노동이라는 메시지가 이 마지막 대사에 응축되어 있다. 작품은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를 설파하지 않지만, 무작정 염세주의로 치닫지도 않는다. 볼테르 식으로 표현하면 유쾌한 달관이나 체념이야말로 이 작품의 특징이었다.

수없이 필화를 겪었던 볼테르는 독일인 ‘랄프 박사’라는 가명으로 『캉디드』를 발표했다. 하지만 작품에 가득한 풍자와 유머 감각에 독자들은 대번에 진짜 작가를 알아차렸다. 1759년 유럽 5개국에서 동시 발간된 이 책은 그 해에만 17판을 거듭했다. 파리와 제네바에선 금서 처분을 받았지만 불법 복제판을 포함해 그 해에만 2만 5000부 가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번스타인이 캉디드에 매료된 이유

 

미국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90)이 극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 1905~84)에게 『캉디드』의 작곡을 제안받은 건 1953년이었다. 볼테르 당대에 7년 전쟁과 리스본 대지진이 있었다면, 전후 이들을 괴롭혔던 건 냉전과 반공주의였다. 번스타인과 헬먼은 모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1908~57) 의원이 주도한 반미 활동 조사위원회(HUAC)의 사찰 대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 헬먼은 2차 대전 당시 미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스탈린의 트로츠키 숙청마저 옹호해 당시 미국 좌파 내부에서도 ‘골수 스탈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번스타인은 “과거에도 현재도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진술서를 제출하고 청문회 출석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30여 년간 FBI의 사찰 대상에 올라 있었다. 이들이 종교와 사상의 관용을 주창했던 볼테르에게 이끌렸던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훗날 번스타인은 “1950년대 초반의 매카시즘은 200년 전의 스페인의 이단 종교 재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악보에 메모를 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당초 번스타인이 [캉디드]를 작곡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장르는 ‘오페레타(희가극)’였다. 하지만 영화 [워터프런트]의 음악 작곡과 방송 프로그램 진행,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취임 등 숨가쁜 일정 때문에 작품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마음에 드는 노랫말을 찾지 못해 작사가를 수차례 교체했고, 캐스팅을 놓고 제작진과 이견이 이어졌다.

오페라와 뮤지컬 사이, 해석의 가능성

 

우여곡절 끝에 [캉디드]는 1956년 12월 1일 뮤지컬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하지만 당시 평단이나 청중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 하기엔 낭만적 연애담 없이 시종 무겁고 진지한 철학으로 일관했다는 평이었다. 결국 73차례 공연 끝에 적자투성이인 채로 공연은 막을 내렸다.

클래식과 영화 음악, 작곡과 지휘를 넘나들며 성공을 만끽하던 번스타인도 이 작품에서는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초연 이후에도 7차례 이상 개작을 거듭할 만큼 작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유럽 오페라의 전통을 물려받은 건 미국 뮤지컬이며, 그 적법한 계승자가 자신이라는 음악적 야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1973년 연출가 해럴드 프린스는 이 작품에서 노래를 절반 가까이 덜어내고 105분 길이로 압축한 단막극 형식으로 뉴욕 첼시 시어터에 올렸다. 2년간 740회 공연된 이 리바이벌 무대는 작품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전자 건반을 남용했고 마구잡이로 노래를 뒤섞었다”라면서 이 공연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결국 작곡가의 개작을 거쳐 1982년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2막 형식의 희가극으로 재공연한 데 이어, 1989년 최종 개작을 통해 영국 런던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다시 공연됐다. 당초 뮤지컬로 초연됐던 작품이 클래식 무대에 안착하기까지 꼬박 33년이 걸린 셈이었다.

지금도 이 작품은 오페라극장과 브로드웨이, 클래식 콘서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된다. 때로는 소비 만능주의와 대중 상업문화, 미국 행정부의 무능과 제국주의적 속성을 풍자하는 현대적 연출을 가미해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한다. 당초 오페라와 뮤지컬 사이의 모호한 정체성은 거꾸로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볼테르의 낙관주의는 번스타인의 작품에도 통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