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오페라로 환생한 프랑스 혁명의 시인 - 시인 앙드레셰니에와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히메스타 2016. 12. 13. 09:33
“밀러, 기도해본 적 있어?”
“물론 매일 기도하지.”
“기도 제목은?”
“글쎄, 아기의 건강과 아내의 순산, 필리스(필라델피아의 프로야구팀)의 승리지.”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움베르토 조르다노,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중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 / 레나타 테발디,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 지아난드레아 가바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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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오페라 제작, [안드레아 셰니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번트가든, 런던, 2015년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와 영화 [필라델피아]가 동행한 한 장면

 

영화 [필라델피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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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로 투병 중인 변호사인 앤드루 버킷(톰 행크스, Tom Hanks, 1956~)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 때문에 부당 해고됐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 중이다. 법정 증언을 하루 앞두고 자신의 소송을 맡아준 흑인 변호사 조 밀러(덴젤 워싱턴, Denzel Washington, 1954~)와 질문 내용을 검토하던 중에 이런 대화를 나눈다. 밀러는 증언 내용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하지만, 정작 버킷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영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의 한 장면이다.

이 때 둘의 귓가에 나지막한 첼로 소리가 들려온다. 오디오를 통해 흐르는 음악은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Andrea Chénier)]의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다.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의 목소리다. 영화의 카메라는 아리아의 노랫말을 설명하는 버킷에게 바짝 다가가 부감()으로 잡는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오페라에서 백작의 딸 마달레나의 집은 폭도에 의해 불탔다. 딸을 살리려던 어머니도 목숨을 잃고 만다. “목소리에 담긴 고통이 들려?” 마달레나의 아리아를 설명하는 버킷의 모습을 카메라는 좀처럼 끊지 않고 따라간다. 하지만 현악이 장조(調)로 방향을 트는 순간, 아리아도 절망에서 환희로 표정이 바뀐다.

“계속 살 것이니, 나는 삶이요. 천국이 내 안에 있다. 너는 혼자가 아니며 내가 네 눈물을 모으리라. 너와 함께 걸으며 너를 도우리라. 웃고 희망을 가져라. 내가 사랑이니. 피와 진흙에 둘러싸여 있느냐? 나는 신성하다. 나는 망각이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신이로다.”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앙드레 셰니에, 현대의 호머를 꿈꾸던 시인

 

마달레나의 귓가에 들려온 신의 음성은 영화에서 버킷이 간절히 듣고자 하는 응답이기도 하다. 아리아를 듣던 버킷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온다. 노래는 끝났지만 밀러는 변론 준비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자리를 뜬다. 하지만 백인과 흑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라는 차이를 딛고, 둘 사이에는 교감이 흐른다.

조제프 쉬베, [앙드레 셰니에의 초상], 18세기 말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인상적인 이 장면에서 흘렀던 음악이 이탈리아 작곡가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32세의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이 됐던 시인 앙드레 셰니에(Andrea Chénier, 1762~1794)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셰니에가 발표한 시는 단 두 편이 전부였다. 생전에 셰니에는 무명() 시인이었지만, 사후에는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예술가로 재평가 받았다.

셰니에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 출신인 어머니의 살롱은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같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 14세 연상의 다비드는 셰니에에게 예술과 그림에 대해 많은 걸 일러준 스승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셰니에도 일찍부터 다비드의 화실에 드나들었다. 다비드가 대표작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릴 때는 셰니에가 조언을 건넸다는 일화도 있다. 당초 다비드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손에 들고서 발언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지만, 셰니에가 여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안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끝마치고 나서야 잔을 붙잡았을 거예요.”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셰니에는 어머니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16세 무렵에는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Sappho, B.C. 612?~?)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옮겨서 번역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의 문학적 관심도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있었다. 그에게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86~B.C.42)는 가장 위대한 로마인이요, 카토(Marcus Porcius Cato, B.C.234~B.C.149)는 위대한 장군이자 웅변가이며 철학과 문학에서 당대 최고였으며, 포키온은 도덕과 덕의 규범에서 흔들림이 없으며 행동과 우정에서 흠 잡을 곳이 없는 진실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셰니에는 1784년 로마와 나폴리, 폼페이 등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현대의 호머’를 꿈꾸며 신고전주의 양식의 전원시와 비가를 써나갔다. “새로운 생각으로 예스런 시를 써나간다”라는 시구()가 보여주듯, 당시 그의 문학관은 무척 고전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혁명의 격랑 속으로

 

마리 가브리엘르 카페, [마리 조제프의 초상], 1800년경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그가 과거의 문학 양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혁명 발발 2년 전, 가족의 지인이 영국 대사로 임명되자 그는 대사의 비서 자격으로 런던으로 따라 나섰다. 하지만 셰니에는 “비열한 즐거움과 역겨운 허영심이 가득하다”라며 런던 생활에 넌더리를 냈고 결국 혁명 이듬해인 1790년 파리로 되돌아왔다. 혁명의 격랑에 스스로 뛰어든 셈이었다.

셰니에는 전원시 대신에 풍자시를 쓰기 시작했고, 「파리 저널」에도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온건파에 가까웠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동생 마리 조제프(1764~1811)가 루이 16세의 사형을 옹호하는 급진 공화파에 속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792년에는 이들 형제 사이에 격렬한 지상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2월 셰니에가 먼저 「파리 저널」을 통해 급진 공화파인 자코뱅(Jacobins)이 프랑스를 뒤흔드는 혼란의 원인이며 ‘국가 안의 국가’를 세우려는 이들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리 조제프는 자코뱅이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에 입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양편의 지지자들이 뛰어들면서 이 논쟁은 반 년 가까이 지속됐다. 두 살 연상의 셰니에는 “존경하는 사람들과도 당파를 만들지 않았다”라고 고백했을 만큼 철저하게 무당파를 지향했다. 반면 동생 마리 조제프는 혁명 당시 입법 기관이었던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의 의원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앙토냉 프랑수아 칼레, [루이 16세의 초상], 1779년

어쨌든 혁명의 열기가 정점으로 치닫는 가운데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국왕을 공개적으로 편드는 건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 소식에 낙담한 셰니에는 베르사유로 내려가 은거했지만, 수 개월 뒤에 반혁명 혐의로 공안위원회 요원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오귀스탱 샬라멜, [루이 16세의 마지막 심문], 18세기

반동에서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셰니에가 체포된 이후 동생 마리 조제프는 형의 구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인을 죽인 아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셰니에가 체포되기 이전에 파리를 떠나라고 권유하고 베르사유에 안전 가옥을 물색해준 건 다름 아니라 마리 조제프였다. 로베스 피에르(Maximilien de Robe pierre, 1754~1794)의 반대파로 분류됐던 동생은 현실적으로 힘을 쓰기 힘든 처지였다. 이 때문에 마리 조제프는 서툴게 개입하면 오히려 형의 사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마리 조제프는 시간이 흐르면 형의 사건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혁명의 광기는 그런 희망마저 앗아갔다.

셰니에는 옥중에서도 틈틈이 「젊은 여죄수(La Jeune Captive)」 같은 시를 썼지만, 1794년 7월 25일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시인의 최후는 낭만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그는 단두대로 올라갈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소포클레스(Sophocles, B.C.496~B.C.406)의 비극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혹자는 동료 사형수들과 장 라신의 비극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셰니에의 처형을 지시했던 로베스 피에르도 불과 이틀 뒤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체포됐고, 다음 날인 2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무척이나 얄궂은 악연이었다.

셰니에는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이 1802년 『기독교의 정수』에 셰니에의 시를 인용하면서 그의 문학적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819년에는 셰니에의 미발표 원고를 묶은 시집이 처음으로 간행됐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 같은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조르다노의 손에 태어난 핏빛 치정극

 

시인을 향한 경배의 대열에 동참했던 이탈리아의 작곡가가 움베르토 조르다노였다. 이탈리아 남부 포자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난 조르다노는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폴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음악원 재학 시절인 1888년 악보 출판사가 주최하는 단막 오페라 공모전에 첫 오페라를 출품했지만 참가작 73편 가운데 6위에 머물고 말았다.

가에타노 에스포시토,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초상], 1896년

당시 우승작은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출판사는 후속작을 위촉했고, 이를 계기로 조르다노는 꾸준히 오페라를 발표했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오페라는 작곡가 마스카니와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 1857~1919)를 필두로 하는 ‘베리스모(verismoㆍ사실주의)’의 시대였다. 낭만적 연애담이나 영웅담에 작별을 고하고 서민의 남루한 일상에서 착안한 핏빛 치정극이 오페라의 세계로 속속 편입됐다. 조르다노가 [안드레아 셰니에]를 통해 프랑스 혁명의 시인 셰니에의 삶을 극화()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행 과정은 그대로 오페라의 기본 얼개가 됐다. 마지막 4막의 무대는 실제 시인이 투옥됐던 생라자르 감옥이며, 셰니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장본인인 로베스 피에르도 2막에서 잠시 단역으로 모습을 내비친다.

푸치니와 호흡을 맞춰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와 [라 보엠(La Boheme)] 등을 히트시킨 작가 루이지 일리카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안드레아 셰니에]는 1896년 3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그 해 11월 뉴욕과 이듬해 3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곧바로 공연될 정도로 작품의 명성은 빠르게 퍼졌다. 함부르크 공연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음악가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였다.

이미지 목록

초연시 제라르 역을 맡은 마리오 삼마르코, 1910년

초연시 셰니에 역을 맡은 주세페 보르가티, 1900년경

고결한 남성 주인공, 셰니에의 탄생

 

4막 형식의 이 오페라는 당시 베리스모 스타일을 반영하듯 혁명의 긴박함과 열기를 충실히 담아냈다. 음악적으로 그보다 중요한 건 낭만적이면서도 고결한 남성 주인공 셰니에의 탄생이었다. 혁명의 대의에 충실하면서도 따스한 인간애를 보여주는 셰니에 역을 위해 작곡가는 3곡의 아리아를 썼다. 이 가운데 두 곡은 셰니에가 생전에 썼던 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셰니에가 처형되기 직전에 부르는 아리아 [5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처럼(Come un bel di di maggio)]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5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처럼, 산들바람이 입을 맞추고 햇살이 감싸 안는 가운데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네. 나 역시 운율의 입맞춤과 시의 보살핌으로 내 삶의 정상에 올라가네. 각자의 운명에 따라 난 이미 죽음의 시간에 이르렀네. 내 시의 마지막 연이 끝나기 전에, 사형 집행인이 내게 삶의 종말을 고하겠지. 그러려무나. 시여, 절대적 여신이여! 당신은 시인에게 빛나는 영감과 불길을 주었으니, 내 마음에서 당신이 쏟아지는 동안에 나는 당신께 내 삶의 마지막 차가운 숨결을 드리리다.”아리아 [5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처형대에 올랐던 셰니에의 마지막 시는 오페라 4막에서 티끌 한 점 없이 청명하게 빛나는 아리아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아 셰니에]의 아리아는 시인 자신의 ‘백조의 노래’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동주나 이육사와 마찬가지로, 셰니에 역시 사후에 신화가 된 경우에 속했다. 더불어 오페라는 젊은 시인의 초상을 온전하게 간직한 ‘음악의 사진첩’이자 ‘기억의 보관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