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에 흔히 ‘제 발등을 제가 찍는다’고 한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제 발등을 찍어서 사망한 음악가가 있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가였던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였다.
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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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슈트라우스,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중 [위대한 왕녀님(Großmächtige Prinzessin)] / 에디타 그루베로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쿠르트 마주어(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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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출신 만능 엔터테이너, 륄리
륄리는 1632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어를 계속 쓰고 싶으니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소년을 데려와달라”라는 오를레앙 공작(公) 가스통의 장녀인 마리 도를레앙(Anne Marie d'Orléans, 1627~1693)의 간청이 없었더라면, 륄리는 평생 피렌체에 남을 뻔했다. 피렌체의 마을 축제에서 어릿광대 복장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던 14세의 소년 륄리는 마리 도를레앙의 명으로 파견된 프랑스 궁정 기사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고 한다.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손녀였던 마리 도를레앙은 당시 유럽 왕정 최고의 상속녀였다. 음악과 춤에 재능이 많았던 이 소년은 파리로 건너온 뒤 ‘개천에서 용이 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엔 시종이었지만 바이올리니스트와 기타 연주자, 무동(舞童)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다.
루이 14세의 절대적 신뢰를 받다
1653년 당시 15세였던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가 [밤의 발레]라는 작품에서 태양의 신 아폴로로 출연해 춤을 춘 것을 계기로 륄리는 왕실 작곡가로 발탁됐다. 륄리는 이 발레의 공동 작곡가로 추정된다. 1661년 륄리는 왕실 음악 교사와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루이 14세는 재상이었던 마자랭 추기경의 사망을 계기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프랑스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Alexis Roland-Manuel, 1891~1966) 의 표현처럼 “루이 14세가 곧 국가라면, 륄리는 음악 자체”였던 태양왕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륄리의 서면 허가 없이 음악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행위에는 1만 리브르의 벌금을 물리고 무대와 집기를 압수한다”라는 왕명을 내릴 만큼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륄리는 사실상의 독점권을 이용해 1673년부터 오페라를 쏟아냈다. 독창이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중창과 춤의 비중이 두드러진 프랑스 오페라 양식이 확립된 것도 이 즈음이다.
하지만 1680년대에 이르면 륄리에 대한 국왕의 신뢰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였다. 루이 14세가 서른을 넘어 무용을 그만두면서 왕실에서 발레가 위축된 것도 이유로 꼽힌다. 혹자는 륄리의 방탕한 애정 행각에 루이 14세가 넌더리를 냈다고도 한다.
제 발등을 찍어 부른 죽음
결국 1687년 루이 14세가 중병에서 쾌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테 데움(Te Deum)]이 륄리의 생명을 재촉했다. 륄리는 가수와 음악가 150명을 고용해 자비로 보수를 지급할 만큼 공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륄리는 당시 지휘 관습대로 리허설 도중에 긴 막대기를 바닥에 내리치면서 박자를 맞추다가, 그만 자기 발끝을 내리찍고 말았다. 괴저(壞疽)가 온몸으로 퍼질 것을 우려한 의료진은 발가락 절단을 권유했다. 하지만 륄리는 “그러면 춤을 출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그는 뇌수 감염으로 숨졌다.
귀족이 되고 싶은 평민, 평민 귀족
1660년부터 10여 년간 륄리와 호흡을 맞춰 10여 편의 작품을 함께 무대에 올렸던 극작가가 몰리에르(Jean Baptiste Moliere, 1622~73)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희극과 발레가 결합된 ‘코미디 발레’라는 양식이 유행했다. 사실상 이 양식을 창안한 최고의 콤비가 몰리에르와 륄리였다. 이 가운데 1670년 10월 14일 륄리와 몰리에르의 합작으로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에서 초연된 작품이 [평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이다. [평민 귀족] 초연 당시 몰리에르는 주인공 주르댕 역을 연기했다. 작곡을 맡은 륄리도 작품 말미에 이슬람 율법 학자로 출연해 춤을 췄다.
[평민 귀족]은 제목부터 단단히 골치를 안긴다. 원제인 ‘부르주아’는 평민, ‘장티옴(gentilhomme)’은 귀족을 뜻한다. 이 때문에 작품은 흔히 ‘평민 귀족’이나 ‘서민 귀족’으로 번역한다. 귀족이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평민 주르댕에 대한 풍자적 의미가 담긴 제목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봉건적인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산업 혁명 이후 상공업자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부르주아’라는 단어에도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귀족보다 낮은 평민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이 말이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와 대비되는 자산가(資産家)라는 의미로 격상된 것이다. 이전 지배층이 사라지자 신흥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았다.
프랑스 판 『양반전』
작품의 주인공인 부유한 상인 주르댕의 평생소원은 신분 상승이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귀족의 옷차림을 고집해서 하녀의 비웃음을 사지만 귀족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한다. 재단사의 조수가 자신을 ‘귀족’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듬뿍 팁을 주고, 자신을 동등한 친구로 대접해주는 척하는 도랑트 백작에게는 아낌없이 거금을 빌려준다.
반면 자신의 딸 뤼실과 결혼하고자 찾아온 딸의 연인 클레옹트는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일언지하에 딱지를 놓는다. 이 때문에 클레옹트가 자신을 터키의 왕자라고 속이고 뤼실과 결혼에 성공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주르댕은 끝까지 속은 줄도 모른 채 터키 귀족 ‘마마무시(Mamamouchi)’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좋아한다. ‘마마무시’는 ‘아무런 쓸모없는’이라는 아랍어를 몰리에르가 변형시켜 만든 조어(助語)다. 주르댕의 속물근성과 허영심이야말로 이 작품에 웃음을 불어넣는 동력이다. 프랑스 판 『양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했다.
주르댕의 ‘귀족 놀이’에 극적 장치로 쓰이는 것이 음악과 무용, 검술과 철학이다. 주르댕은 귀족들이 지니고 있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과목 별로 과외 선생을 모시고 속성 과외를 받는다.
난생처음으로 수사학과 문법을 배운 주르댕이 “맙소사! 40년 동안 내가 한 말이 산문(散文)인지도 몰랐다니”라고 한탄하는 대사는 당시 최고의 유행어였다.
이러한 작품 설정은 지식, 교양, 취미, 감성과 같은 문화 자본(capatal culturel)이 사회적 계층이나 교육 수준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갈파했던 20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분석과도 닮아 있었다. “음악 취향만큼 한 사람의 ‘계급’을 분명하게 확정해주고 틀림없이 한 사람을 분류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라는 부르디외의 말은 흡사 몰리에르의 희곡을 사회학적으로 풀이한 것만 같았다.
륄리와 몰리에르의 결별과 몰리에르의 죽음 이후
루이 14세가 륄리에게 공연 독점권을 하사하면서 불거진 갈등으로 몰리에르와 륄리는 결국 결별했다. 몰리에르는 작곡가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를 새로운 파트너로 맞아서 1673년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네 번째 공연 도중 무대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뒤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륄리와 몰리에르의 결별과 몰리에르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연극과 음악, 무용도 서서히 분화의 길을 걸었다. 몰리에르의 연극은 대체로 륄리의 음악 없이 공연되고, 륄리의 음악도 무대 상연용이 아니라 별도의 관현악곡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에 이르러 연극과 음악의 통합을 다시 시도했던 독일의 콤비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와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이었다.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의 [평민 귀족]
오페라 [엘렉트라(Electra)]와 [장미의 기사]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들이 후속작으로 고른 작품이 몰리에르의 『평민 귀족』이었다. 이들은 원작에서 터키 풍의 발레로 끝나는 5막을 걷어내는 대신, 극중극(劇中劇) 형식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추가하기로 했다. 호프만슈탈은 『평민 귀족』을 각색했고, 슈트라우스는 극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이들은 낙소스 섬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았던 여인 아리아드네의 후일담을 단막 오페라의 소재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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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프만슈탈, 1893년경 2 슈트라우스, 1938년 |
‘20세기의 륄리와 몰리에르’와도 같았던 이들의 야심 찬 구상에는 허점이 있었다. 연극과 오페라를 한 무대에 올릴 경우, 공연 시간이 5~6시간으로 턱없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연극 극단과 오페라 성악가, 오케스트라까지 지나치게 거대한 공연 규모도 단점이었다. 191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궁정 극장에서 슈트라우스의 지휘와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초연됐지만, 관객들의 불평만 사고 말았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목을 빼고 기다렸던 관객들은 1막이 끝나자 야유를 퍼부었다.
개정판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참담한 실패를 맛본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은 전면 개작에 착수했다. 결국 이들은 몰리에르의 원작을 빼는 대신, 오페라 앞에 짧은 프롤로그를 새롭게 써넣기로 했다. 1916년 빈 오페라극장에서 다시 공연된 개정판이 지금도 주로 공연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다. 당초 몰리에르의 『평민 귀족』을 위해 슈트라우스가 작곡했던 극 부수 음악은 륄리의 작품처럼 별도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전면 개작을 통해 다시 두 작품으로 분리된 셈이었다.
당초 연극과 음악의 통합을 꿈꿨던 이들의 예술적 야심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의 ‘전술상 후퇴’에도 소득은 적지 않았다.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희극과 비극 등 지극히 상반된 성격이 공존하는 드라마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 기회가 됐던 것이다. 이 작품의 서막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의 막이 오르면, 빈 최고 부호의 저택에서 젊은 작곡가가 정극(正劇)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무대 뒤의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적인 희가극도 준비 중이다. 당초 두 공연을 하룻밤에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불꽃놀이를 거행하기 위해 공연에 배정된 시간이 줄어들자 오페라와 희가극을 한꺼번에 공연하라는 부호의 명령이 떨어진다.
한 작품이 된 오페라와 희가극
이때부터 무대 뒤편은 뒤죽박죽이 된다. 젊은 작곡가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오페라를 고칠 수 없다고 버텼지만, 그의 스승인 음악 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마지못해 수정에 나선다. 이 작곡가는 1912년 초연 실패 이후 개정판을 써야 했던 슈트라우스 자신의 초상이기도 했다. 결국 비극적인 오페라와 희가극은 한 작품으로 합쳐진다. 서막에 이어서 공연되는 극 중 오페라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다.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 아리아드네와 장난기 많은 희극 여배우인 체르비네타도 이 오페라에서 만나게 된다. 실제로 오페라의 여주인공 아리아드네는 서정적인 리릭 소프라노, 체르비네타는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맡는 경우가 많다. 이 오페라에서 부르는 아리아드네와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마저 지극히 대조적이다.
“모든 것이 정결한 나라가 있지. 그곳의 이름은 저승. 여기는 모든 것이 순수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하지.”아리아드네의 아리아 [모든 것이 정결한 나라가 있다]
“남자들이란 정절을 지키지 않아요! 이 괴물들에겐 도대체 끝이 없어요! 짧은 밤과 한나절, 한줄기 바람, 흘긋거리는 눈빛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은 바뀐다고요.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이 잔인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변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나요?”체르비네타의 아리아 [위대한 왕녀님]
결국 술의 신 바쿠스가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와 입 맞추면서 오페라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이전에도 극 중 극 형식을 지닌 작품은 적지 않았지만, 드라마의 본질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는 사실상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처음이었다. 희극과 비극이 묘하게 뒤엉킨 이 오페라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희극과 비극,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 예술의 우열은 존재하는 것일까. 원작자 몰리에르라면 너털웃음을 지으며 예의 이렇게 답했을 것만 같다. “모든 법칙을 넘어서는 위대한 법칙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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