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라노’ 연애조작단일까?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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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의 서비스에 가입한 뒤 조기 축구를 즐기던 남자의 취미는 순식간에 첼로 연주로 바뀌었다. 구수한 호남 사투리는 말끔한 서울 말씨로 변했다. 남자가 사모하는 여성의 동선을 미리 파악한 뒤 우연을 가장해 비가 오는 날에 마주치도록 하는 건 기본이다. 패션과 억양은 물론이고 만남부터 고백까지 치밀한 시나리오를 통해 사랑의 성사 확률을 높이는 것이 이 대행사의 전략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하나. 왜 이 대행사의 이름은 ‘시라노’일까.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1619~1655)에서 가져온 것이다. 작가이자 검객이었던 시라노는 『다른 세상, 혹은 달나라와 제국들』이나 『태양의 나라와 제국들』 같은 공상 과학 소설과 희곡을 남겼다. 작가 사후에 출간된 이 두 편의 소설은 폭죽을 타고 달로 날아가 네 발 달린 달나라의 주민을 만난다는 재기 발랄한 발상으로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의 『걸리버 여행기』와 볼테르(Francois-Marie Voltaire, 1694~1778)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탕아 시라노의 삶
하지만 당대에 그가 명성을 얻었던 분야는 검술이었다. 1639~40년에는 왕실 근위대로 ‘30년 전쟁’에 참전했고, 1640년 아라스 전투에서는 총상과 자상을 입었다. 그는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때에도 칼부림을 부리곤 해서, 1,0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결투에 휘말린 것으로 추산된다. 귀족 집안 출신의 시라노는 영지인 모비에르와 베르주라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파리로 올라온 뒤에는 학생들이 거주하는 ‘라탱 지구’에 살면서 수사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정작 그가 매료됐던 건 학업보다는 방탕한 삶이었다. 술과 도박을 일삼았고 ‘사랑의 계곡(Val d’amour)’으로 불렸던 유곽에 드나들었으며 빚이나 싸움박질로 가산을 탕진했다.
결국 그는 36세의 이른 나이로 절명했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불분명하다. 굵은 나무토막이 머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사고 후유증으로 숨졌다는 추정이 유력하다. 후원자였던 다르파종 공작의 마차에 동승했다가 습격을 받았다거나, 매독 같은 질병으로 요양소에 갇혀 있다가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화신으로
이렇듯 실제 시라노의 삶은 방탕아에 가까웠지만, 프랑스 문학사에는 낭만적인 음유 시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시라노가 지고지순한 사랑의 화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살았던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1868~1918) 덕분이었다. 로스탕은 스무 살 때 단막 희극 『붉은 장갑(Le Gant rouge)』으로 데뷔한 이후 꾸준하게 시와 에세이, 희곡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불세출의 히트작이 29세 때인 1897년 12월 28일 초연한 희곡 『시라노 드베르주라크』였다.
시라노의 삶에서 착안한 이 작품은 초연 이후 300일 연속으로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에르나니(Ernani)』 이후 프랑스 연극으로는 최대의 성공이었다. 정작 작가는 작품이 실패할 것으로 여기고, 초연 직전에 극단 단원들에게 “이런 무모한 모험에 끌어들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직후에는 당시 프랑스 재정부 장관이 무대 뒤에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작가의 가슴에 직접 달아줬다. 그 뒤 이 작품은 영어와 독일어, 러시아어로 번역되면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이나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돈키호테』에 비견되는 프랑스의 국민 문학으로 대접받았다.
이종사촌 카트린과의 낭만적 연애담
로스탕이 시라노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주목했던 건, 이종사촌 카트린과의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사연이었다. 1635년 카트린은 크리스토프 남작과 결혼식을 올렸고, 5년 뒤인 1640년 아라스 전투에 시라노는 크리스토프 남작과 함께 참전했다. 카트린은 시라노의 친척이자 전우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시라노는 부상을 입었고, 근위대 장교였던 남작은 전사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카트린은 세속과 인연을 끊고 프랑스 가톨릭 부흥 운동 당시에 조직됐던 성체회(聖體會ㆍla Compagnie du Saint-Sacrement)에 들어갔다. 1630년에 창설된 성체회는 신의 뜻에 따라 독실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철저하게 비밀리에 조직을 운영한 것이 특징이었다. 카트린은 부상당한 시라노를 돌보며 그를 방탕한 삶에서 구하고 가톨릭에 귀의시키고자 애썼지만, 시라노는 1655년 36세로 타계했다. 카트린 역시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로스탕은 시라노와 카트린의 사연에 낭만적 상상력을 가미해 애틋한 연애담으로 빚어냈다.
들창코 시라노의 외모 콤플렉스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베르주라크』에서 동명(同名) 주인공 시라노는 파리 최고의 검객이자 시인이다. 즉석에서 시를 읊으면서도 동시에 상대를 혼쭐낼 화려한 칼 솜씨를 자랑한다. 그는 문무(文武) 겸비의 재사(才士)답게 ‘살아 있는 권력’인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내가 코르셋으로 꼿꼿이 세우는 것은 늘씬한 허리가 아니라 내 영혼”이라고 할 만큼 자긍심으로 가득한 것이다. 끼니를 굶을 지경인데도 한 달치 숙식비를 주변에 호기롭게 뿌려대고, 100명의 검객이 매복한 채로 동료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에 칼을 뽑고 달려가는 ‘상남자’다. 하지만 이런 시라노에게도 약점이 있으니 지독하게 못생긴 들창코였다.
(공격적으로) “선생, 나한테 그런 코가 있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당장 잘라 버렸을 거요!”
(호탕하게) “어이, 친구, 그 갈고리 요즘 유행이요? 모자 걸어두기에는 안성맞춤이겠는걸!”
(극적으로) “거기서 코피가 흐르면 홍해를 이루겠군!”
(감탄하며) “향수 가게에는 멋진 간판이 되겠네!”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시라노의 이 대사가 보여주듯, 주인공이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비웃을 때조차 로스탕의 작품은 화려한 비유와 대구(對句)를 통해 문학적 매력을 발산했다. 시라노를 비롯한 희곡의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시라노는 문학과 검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지만, 정작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촌 록산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대로 잘생긴 장교 크리스티앙은 여자들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마는 변변치 못한 말솜씨 때문에 고민이다. 둘은 모두 록산을 연모하지만, 록산은 시라노에게 크리스티앙을 보호해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이 때문에 시라노는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작가는 카트린을 록산으로, 크리스토프 남작을 크리스티앙으로 이름을 바꿨을 뿐 삼각 관계의 구도는 그대로 살렸다.
결국 시라노는 친구 크리스티앙을 위해 전쟁터에서도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어둠 속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대신 불러준다. 록산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부탁하지만, 시라노는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얼마나 멋진 일이오. 서로의 모습을 짐작만 하는 건. 당신 눈에는 끌리는 내 긴 망토의 검은색만 보이고, 난 당신 여름 드레스의 흰색만 보고 있소. 난 오로지 어둠이고, 당신은 오로지 빛이오!” 이렇듯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크리스티앙이 되어 부르는 연가(戀歌)는 실은 시라노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기품을 잃지 않는 남주인공의 인기
신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로스탕의 희곡에서 문학사적으로 새로운 실험이나 혁신적 요소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중세의 기사도를 낭만적으로 되살린 복고적 정서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프랑스에서 이 작품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건, 기품이나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고 희생하는 남자 주인공 시라노 덕분이었다. 1871년 보불 전쟁에 패하고 알자스 로렌을 잃은 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던 프랑스인들에게 명예와 긍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신에게 갈 때에도 들고 갈 것은 나의 장식 깃털(Mon panache)”라는 시라노의 극중 마지막 대사는 당대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기사의 긍지를 상징하는 ‘파나슈(panache)’라는 단어도 ‘위풍당당’이라는 의미로 영어 사전에 등재됐다. 1910년대에 이르면 로스탕은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로 꼽히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로스탕은 애국심을 고취하는 시를 발표했지만,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인기 속에 탄생한 오페라
시라노의 순정은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와 발레,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까지 수많은 문화 파생 상품을 낳았다. 193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연된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 1875~1954)의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알파노는 나폴리 음악원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수학한 뒤 볼로냐 음악원장과 토리노 음악원장, 페사로 음악원장을 두루 역임한 교육자이자 작곡가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사에는 1924년 세상을 떠난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미완성 유작인 [투란도트(Turandot)]를 완성한 음악가로 친숙하다.
푸치니가 3막 시녀 류의 죽음의 장면까지 작곡을 마치고 후두암으로 타계하자, 작곡가의 유족과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푸치니가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할 작곡가로 알파노를 택했다(토스카니니는 오페라 [라 보엠(La Boheme)]을 세계 초연했던 푸치니의 음악적 동반자였다. 하지만 [투란도트] 초연 당일인 1926년 4월 25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를 맡았던 토스카니니는 류의 죽음 대목까지만 연주한 뒤 관객들에게 돌아서서 “여기까지가 마에스트로께서 작곡하신 대목입니다”라고 말했다. 알파노에게 작품 완성을 의뢰해놓고도 정작 초연 당일에는 제대로 연주하지 않은 셈이었다. 그 뒤에는 알파노가 완성한 판본이 가장 자주 연주되고 있지만, 일부를 덜어내서 공연하거나 루치아노 베리오 같은 다른 작곡가들이 완성한 버전으로 공연하는 일도 적지 않다).
“록산이여 안녕! 나는 죽어가네. 오늘밤 내 사랑이여, 내 마음은 차마 표현하지 못한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난 죽는다네. 내 마음은 한순간도 당신을 떠난 적이 없다네. 나는 저 세상에서도 한없이 당신을 사랑하리니.”알파노의 오페라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가운데 시라노의 4막 아리아
사랑의 본질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라노는 어둠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록산을 향한 연서(戀書)를 망설임 없이 읽어나간다. 그 사랑의 편지를 직접 썼기에 굳이 보이지 않아도 그 내용을 환히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록산은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편지의 주인공이 시라노였다는 사실을.
이렇듯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록산이 진실로 사랑했던 건 크리스티앙의 외모였을까, 시라노의 마음이었을까. 록산은 시라노의 진심을 크리스티앙의 사랑으로 오인한 것일까, 반대로 시라노의 양보와 희생이 있었기에 둘의 진정한 사랑도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 과연 겉모습과 진심은 구분 가능한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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