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피셰르 이반과 쿠르트 마주어 - 동구권 붕괴에 기여한 지휘자들

히메스타 2016. 12. 12. 14:00

 

“신사 숙녀 여러분, 이번 시즌의 첫 공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특히, 이곳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음악을 듣기 위해 처음 오신 우리의 시리아인 손님들을 환영하고자 합니다.”

2015년 9월 6일 독일 베를린의 유서 깊은 음악회장 콘체르트하우스. 말러의 교향곡 7번을 지휘하기 위해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앞에 선 헝가리인 지휘자 피셰르 이반(Fischer Iván, 1951~)이 마이크를 들었다. 예고된 이벤트였지만 객석은 숙연해졌다.

피셰르 이반

“지금 헝가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려스럽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치고 실의에 잠긴 채 자신들의 의지에 반해 발이 묶여 있습니다. 독일과 헝가리, 유럽의 당국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이분들이 즉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고 싶은 곳에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현재의 낡아빠진 이민규정은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이 관대하고 따뜻하게 피난민들을 포용할 때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음악이 이러한 노력에 공헌하기를 바랍니다.”

객석은 열렬한 갈채로 가득 찼다.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 [신비의 합창] / 부다페스트 음악제 관현악단, 피셰르 이반(지휘)
2 바르톡, [오케스트라를 위한 트란실바니아 춤곡] 중 3악장 / 부다페스트 음악제 관현악단, 피셰르 이반(지휘)
3 R.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 - 1번] 중 ‘봄’ /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쿠르트 마주어(지휘)
4 베토벤, [교향곡 5번] 중 1악장 /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쿠르트 마주어(지휘)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 앨범 정보 보러가기

역사에 남은, 가장 뜻 깊은 소풍

피셰르 이반은 1983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BFO)를 창립해 음악감독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겸해 왔다. 그가 시리아 난민들을 콘서트에 초청하고 난민 문제 해결을 촉구한 것은 결코 돌발적이거나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헝가리 국경에서 발이 묶인 난민’은 이미 26년 전 그와 그의 악단, 그의 조국, 나아가 세계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1989년이었습니다. 당시 부다페스트에는 동독을 탈출한 수 백 명의 난민들이 들어와 있었죠. 이들은 처음 서방국가 대사관으로 몰려갔고, 몰타 기사단의 구호시설이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미래는 불확실했죠.”

8월 18일 부다페스트의 콘서트홀인 콩그레스 센터에서는 베토벤의 곡만으로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직원의 실수로 발코니 표 수백 석이 판매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음악감독인 피셰르가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냈다.

“동독에서 온 사람들을 콘서트에 부릅시다. 독일인인 베토벤의 작품들이니까 좋아하지 않겠어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피셰르 이반, 2009년 6월.

연주가 끝난 뒤 지휘자 대기실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서독 대사관에 근무하는 독일 외교관들이었다. 그들은 음악감독 피셰르의 결정에 깊은 감사를 표한 뒤 말했다.

“덕분에 오늘 음악회에 온 동독인들에게 내일 ‘범() 유럽 야유회’에 대해 알리고 이 행사에 초대했습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쌓는 모습. 앞에 서독 군인과 뒤에 웃으면서 장벽을 쌓고 있는 동독 군인.

범유럽 야유회란 8월 1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의 작은 지역을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행사였다. 행사가 열리는 소프론 부근의 국경 마을에는 이미 철조망이 제거되어 있었고, 행사장 경계는 허술한 나무 울타리뿐이었다. 여기 동독인들이 초대된 것이었다. 이미 나무 울타리는 의미가 없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동독인 600여 명이 이 허술한 경계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즉 서방으로 탈출했다. 대부분은 전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해 초부터 헝가리에서는 소련 공산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의도에 상응하여 선도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네메트 미클로시(Németh Miklós) 국가평의회 의장은 당시 헝가리의 경제상황에 비추어 천문학적 유지비가 소요되는 오스트리아 국경 초소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점진적으로 초소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야권에서 ‘국경 개방’을 상징하는 이벤트를 제안했고, 공산당 내 개방파까지 이에 참여했으며 네메트는 이를 방관했던 것이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사실 그 때 다른 길이 없었다. 당시 동독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수용시설이 가득 찼으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유회는 당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탈출구였다. 동독 정부와 크렘린의 강경파들이 어떻게 나올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동독인들을 국경을 통해 보내는 길 외에) 어쩔 수 없었다.”

2014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기념하여 독일 정치인들과 헝가리 총리 네메트 미클로시가 베를린 장벽에 꽃을 꽂고 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뚫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동독인들은 줄을 지어 헝가리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독은 더 이상 지난 수십 년과 같은 방법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네메트 의장의 회상에 따르면 야유회와 동독인 탈출, 국경 개방은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피셰르 이반은 상징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공산당 관료주의와의 불화에서 출범한 BFO

사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창립부터 공산주의 체제하의 헝가리와 맞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악단이 동구권의 붕괴에 역할을 한 것은 처음부터 운명 지어져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악단은 1983년 피셰르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코치슈 졸탄(Kocsis Zoltan)과 함께 설립했다. 전 세계에 걸쳐 악단에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이는 대체로 뛰어난 연주가들이 일년 중 특정한 기간에만 모여 앙상블을 맞추는 악단을 뜻한다. 오늘날 국내외에서 거의 일 년 내내 연주를 펼치며 헝가리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자리 잡은 이 악단의 모습과 맞지 않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이 악단이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기존의 헝가리 오케스트라 체제대로라면 연주자 ‘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통한 공산당의 간섭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상설 기구가 없이 독립된 연주가들을 연주 때마다 불러 모으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형태로 악단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재정적으로도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했다. 민주화 이후인 1992년에야 이 악단은 부다페스트 시의 재정 보조를 받으면서 이름에만 ‘페스티벌’이 들어가는, 실질적으로는 상설 악단이 되었다.

동독 붕괴에 기여한 지휘자 피셰르는 베를린 장벽 붕괴 4반세기를 맞은 2014년 11월 9일, 이를 기념하는 이벤트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기념 콘서트를 지휘한 것이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이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와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 대통령, 민주화 과정에서 헝가리 공화국 첫 총리가 된 네메트 미클로시 전 국가평의회 의장, 그리고 동구권 개방에 핵심적 역할을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동유럽에서 처음으로 공산당 지배를 종식시켰던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Lech Walesa) 대통령 등이 콘서트에 참석했다. 피셰르는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의 단원이 모인 연합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 2막을 연주했다. 25년 전의 공헌에 적합한 영예였다고 할 만하다.

동독 정부의 ‘평화 퇴진’, 라이프치히에서 시작

1989년 6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의 ‘범유럽 야유회’이후 1만 3000명 이상의 동독인이 체코와 헝가리를 거쳐 서방으로 탈출했다. 기존의 방식대로 동독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동독의 명문 오케스트라와 그 지도자가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르트 마주어(1927~2015)

높아지던 압력은 비밀경찰의 통제가 극심하던 동베를린에 앞서 라이프치히에서 터졌다. 니콜라이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열리는 기도회는 어느새 나라의 자유화를 위한 토론회가 되어 있었다. 10월 2일 월요일, 기도회 날을 맞아 2만 명의 시민이 교회 주변에 모여들었다. 행진이 시작되었고, 경찰은 군중을 사정없이 구타해 해산시켰다.

주말인 금요일과 토요일은 동독 정부수립 40주년 기념행사가 동베를린에서 열렸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참석한 가운데 에리히 호네커 통합사회당(SED,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은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행사를 원했지만 베를린에서도 시위가 일어나 행사는 소란 속에 끝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기자회견에서 변화를 촉구하며 ‘뒤늦게 오는 자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긴장 속에 새로운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2세기 넘는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녹음을 앞두고 있었다. 플루티스트가 음악감독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가 이걸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다가 길에서 여학생이 머리채를 잡혀 트럭에 던져지는 걸 봤어요.”

마주어와 동독 정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1970년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그는 호네커 서기장에게 청원을 넣어 1981년 새 게반트하우스(연주회장) 건물을 세웠다. 그에게 통합사회당 당적은 없었지만 호네커는 예외적으로 그를 ‘마주어 동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주어는 변화를 위해 자신이 역할을 할 때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에 대한 시민의 자부심과 신뢰는 높았다.

게반트하우스의 초석을 놓고 있는 쿠르트 마주어

운명의 월요일이 되돌아왔다. 10월 9일, 병원들은 다량의 혈액을 확보하고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부모와 포옹한 뒤 집을 나서는 모습이 골목마다 보였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회장 옆에 생전 처음 보는 무기를 든 군인들이 있다”고 전했다. 개혁을 요구하는 단체인 ‘뉴 포럼’ 대표들이 오전에 마주어를 찾아왔다. 평화시위를 위한 조치를 마련해달라는 취지였다.

마주어는 통합사회당에 전화를 걸었다. 시위 두 시간 전, 통합사회당 대표자 세 사람과 마주어, 신학자 한 사람, 인기 캬바레 가수 등 여섯 사람이 마주앉았다. 말하자면 ‘정부 대 시민대표 회의’였다. 대화 도중 당 대표자는 거듭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걸고 왔다. 베를린의 통합사회당 중앙 본부도 아무런 대책이 없어보였다.

여섯 사람은 ‘평화로운 시위를 보장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문서는 곧바로 시위 군중에게 알려졌다. 군중은 최소 7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마주어는 덧붙였다. “전하시오. 만약 군경에 의한 검거나 폭력사태가 일어나면, 시위 군중의 대피를 위해 게반트하우스를 활짝 열 것이오.”

독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게반트하우스 콘서트홀. 2011년

시위는 전 세계의 우려와 달리 평화롭게 마무리 지어졌다. 1주일 뒤 되돌아온 16일 월요일에는 12만 명이 평화시위에 나섰다. 호네커 서기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18일 사임했다. 당 중앙부의 혼란 속에서 11월 9일 저녁 공보담당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는 “동독의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언제부터죠?”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는 “당장”이라고 대답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작이었다. 통합사회당(공산당)의 붕괴, 동독의 붕괴, 동구권의 붕괴가 한순간의 눈사태처럼 진행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1971년

한편, 독일 통일과 관련해 생각나는 또 한 사람의 지휘자가 있다. 동독인들의 탈출과 라이프치히 민주화 시위, 일당독재 종식이 한꺼번에 일어난 1989년의 성탄절을 기념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자유에의 송가’(Ode to freedom) 콘서트를 지휘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다.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비롯한 여러 국가와 악단의 단원들이 연주에 참여했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동독의 마지막 순간에 참여한 마주어가 이 행사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다음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유에의 송가’ 콘서트를 ‘미국식 쇼였다’라고 평가했다.

동독 체제의 붕괴는 마주어 개인에게 서방으로 활동 영역을 크게 넓히는 기회도 마련해주었다. 1991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겸직하게 된 뒤 2002년까지 재임했고 이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2015년 12월 19일 88세로 별세했다.

냉전의 종식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악단

피셰르 이반과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쿠르트 마주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두 마에스트로와 악단은 동독과 동구권 붕괴의 과정에서 크건 작건 주인공의 하나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가슴 아프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악단도 있다. 1956년 창단돼 2001년까지 존재했던 ‘필하모니아 훙가리카(Philharmonia Hungarica)’다.

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소련군 탱크가 유혈 진압하면서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20만 명 이상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난민 중에는 지식인이 많았고 특히 뛰어난 음악가가 여럿 있었다. 헝가리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지낸 로즈냐이 졸탄이 이들을 빈 근교의 온천도시인 바덴에 불러 모았다. 이렇게 망명자들로 교향악단이 조직되었다.

필하모니아 훙가리카는 특히 1970년대에 메이저 음반사인 영국의 데카 전속으로 명성을 떨쳤다. 도라티 안탈의 지휘로 발매한 하이든 교향곡 전곡집은 음반사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서독 정부도 이 악단을 ‘서방세계와 서독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증표로 생각해 부족하지 않은 후원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1989년 동구권 민주화 혁명으로 상황은 일변했다. 독일 정부의 지원금은 매년 감소했고 단원들은 나이 들어갔으며 ‘망명자 악단’의 상징성에서 나오는 인기도 식었다. 2001년 마침내 정부의 보조금이 끊기면서 자립의 기초도 사라졌다. 악단은 마침내 이해 4월 22일 뒤셀도르프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을 레퍼토리로 마지막 연주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연주회마저 서글프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로베르트 바흐만의 지휘로 열린 콘서트는 ‘취소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이 전해지면서 단 150여 명의 관객만이 찾아왔다. 이것으로 필하모니아 훙가리카의 쓸쓸한 역사는 막을 내렸다.

한편 필하모니아 훙가리카와 비교할만한 ‘망명자 악단’으로 독일의 밤베르크 심포니를 꼽을 수 있다. 이 악단은 1946년 전 ‘프라하 독일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주축으로 창단됐다. 나치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체코인들이 자국 내의 독일인들을 쫓아낸 결과였다. 따라서 이 악단의 성립은 ‘동서 냉전’에 앞서 우선 민족 갈등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악단은 밤베르크 인근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서 ‘레그니츠 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이어 낭만주의 문호이자 음악가 E. T. A. 호프만의 고향이기도 한 밤베르크 시의 지원을 받으면서 ‘밤베르크 심포니’가 되었고 이 도시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초대 요제프 카일베르트에 이어 오이겐 요훔, 호르슈트 시타인 등의 명지휘자가 수석지휘자를 지냈으며 2000년부터 영국 출신 조너선 노트가 지휘봉을 잡고 악단의 중흥기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