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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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모차르트, 오페라 [미트리다테] 중 아리아 [내 마음은 슬픔으로 박동하고(Nel sen mi palpi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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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숙적, 미트리다테스의 최후
흔히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고 하지만, 실은 패자의 반론도 넉넉하게 받아준다는 점이야말로 역사의 숨은 매력이다. 오늘날 터키와 크림 반도 일대의 폰투스(Pontus) 왕국을 다스렸던 미트리다테스 왕(Mithridates VI of Pontus, 기원전 135~63)이 파르티아(Parthia) 왕에게 보냈던 편지도 마찬가지다. 로마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요청하기 위해 보냈던 당시 편지는 이웃 국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했던 로마에 대한 규탄으로 가득했다. 이 편지만 놓고 보면 로마는 영락 없이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요, 미트리다테스 자신은 로마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투사였다.
실제 미트리다테스의 삶은 로마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기원전 88년부터 20여 년간 세 차례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은 그의 이름을 따서 ‘미트리다테스 전쟁’이라고 불린다. 흑해 일대의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그는 다른 국가들처럼 로마와 타협하거나 굴복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로마의 적’을 자처하는 편을 택했다. 1차 전쟁 당시 그의 지시로 학살된 로마 주민은 8만~15만 명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독재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78), 술라의 측근이었던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 기원전 118~57),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와 함께 ‘삼두정치’를 이끌었던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48) 등 3차례에 걸친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이끌었던 로마의 총사령관들도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폼페이우스와 대결했던 마지막 3차 전쟁은 10년간 지속됐다. 미트리다테스는 45일간 계속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 전쟁에서 패한 뒤 독을 마시고 자결한 것으로 전한다. 로마 제국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숙적의 삶도 68세로 막을 내린 것이다. “로마인이 공격했던 왕들 가운데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만큼 용감하게 저항하고 더불어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은 왕도 없었다”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샤를 드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 1689~1755)의 평가처럼, 미트리다테스는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183/182) 이후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으로 손꼽힌다.
지극히 영민한 야만인
지금껏 전하는 미트리다테스의 일화 중에는 유독 잔인하고 광폭한 성격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거대한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투사의 성격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승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도 과장되고 왜곡되는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둘 다 조금씩 진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미트리다테스는 선왕의 타계로 10세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섭정에 나서자,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을 음해하는 정적들의 감시를 피해 소아시아 일대를 방랑하면서 숨어 지냈다. 방랑 시절에 독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서 그는 독초와 해독약을 직접 조제할 줄 알았다고 한다. 치사량에 이르지 않을 만큼만 독을 써서 저항력을 키우는 면독법(免毒法)도 그의 이름을 따서 ‘미트리다티즘(Mithridatism)’으로 불린다. 미트리다테스는 언어 감각도 탁월해서 자신이 다스리는 20여 개 지역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한다. 야만인이되 지극히 영민한 야만인이었던 셈이다.
성년이 된 뒤 돌아와 왕좌에 오른 그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둔다. 당초 공동 왕위 승계자로 지목됐던 남동생은 처형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다고 의심했던 아들을 셋이나 죽였다. 결국 그의 아들 가운데 파르나케스(Pharnaces II of Pontus) 왕자가 반기를 들고 로마에 투항하면서 그는 마지막 전쟁에서 패한다. 파르나케스는 배반의 대가로 아버지의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카이사르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나라를 잃었고, 이어진 또 다른 전투에서 숨지고 만다. 당시 카이사르가 파르나케스 왕을 꺾고서 했던 말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였다. 아버지의 끈질긴 저항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무한 패배였다.
라신을 자극한 영웅의 몰락 이야기
쓰러질지언정 굽힐 줄 몰랐던 미트리다테스의 삶은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 가운데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99)이 자신의 희곡 『미트리다트』 (Mitridate, 미트리다테스의 프랑스어식 표기)에서 주목했던 건, 다름 아닌 영웅의 몰락이었다. 라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미트리다테스는 “그가 거둔 승리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의 패전들만으로도 로마 공화국의 가장 위대한 세 명의 장군들, 즉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의 영광을 이루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라신에게 미트리다테스는 패배했지만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라신은 서문에서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할 경우에는 어둠과 비천함 속에 사느니 차라리 위대한 왕에 걸맞게 당당한 최후를 맞이하기로 각오했다”라는 역사가 디온 카시우스의 『로마사』 구절을 인용했다.
이 작품은 라신이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의 회원이 된 1673년 무렵에 초연된 것으로 추정된다. 빼어난 낭독자였던 라신이 튈르리 정원에서 『미트리다트』를 낭독하면, 이를 실제 상황으로 착각한 주변의 일꾼들이 절망에 빠진 작가가 행여 연못으로 몸을 던지지 않을까 염려해서 몰려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작가는 희곡에서 미트리다트와 결혼을 앞둔 여인 모님과 두 아들 파르나스(파르나케스의 프랑스어식 표기)와 크시파레스를 등장시켜서 ‘사각 관계’를 만들어낸다. 파르나스는 아버지의 왕국을 탐내고, 크시파레스는 아버지의 여인 모님과 사랑에 빠진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권력과 사랑을 각각 욕망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미트리다트는 거짓 양위의 계략으로 크시파레스와 모님의 사랑을 눈치 채지만, 복수와 처벌보다는 양보와 희생을 택한다.
사랑마저 양보하는 부성애
본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지만, 부성애(父性愛)를 표현해야 하는 당사자가 미트리다트라는 점은 다분히 의미심장했다. 그는 로마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뒤, 크시파레스에게 모님을 당부하고 숨을 거두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서는 자식마저 가차 없이 희생시켰던 폭군이 이 작품에서 아들에게 사랑마저 양보하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실제 이 작품은 루이 14세가 가장 사랑했던 라신의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루이 14세의 측근이었던 당조 후작은 1684년 11월 5일 일기에 “그날 저녁 국왕이 코메디 프랑세즈에 와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미트리다트』를 골랐다”라고 기록했다.
희생적 영웅담의 불운
파멸로 치닫는 비극보다는 희생적 영웅담에 가까운 『미트리다트』의 특징은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자식에게 배반 당한 군주와 다른 자식에게 모든 걸 양보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관객과 비평가들도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제 루이 14세 당시 이 작품은 [페드르](Phèdre)나 [앙드로마크](Andromaque)와 함께 가장 자주 공연되는 라신의 비극이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공연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격렬한 감정 표현과 파국을 선호하는 낭만주의 시대에는 작품의 결말이 다소 뜨뜻미지근하고 밋밋하게 비친 것도 사실이었다.
모차르트의 손에서 부활한 미트리다테
연극적으로는 불운한 작품이었지만, 음악적으로는 5차례나 오페라로 작곡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작곡 당시 14세의 ‘음악 신동’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91)였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 왕정에 자신의 음악적 기량을 알리기 위해 연주 여행을 다녔다. 이 오페라를 작곡하기 전인 1769년에는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15개월에 이르렀던 당시 이탈리아 여행은 이 조숙한 신동이 오페라 작법(作法)에 눈뜨는 계기가 됐다.
모차르트는 이듬해 밀라노 대공의 궁정 극장에서 오페라 [미트리다테] (Mitridate, re di Ponto)의 작곡을 의뢰 받았다. 이 궁정 극장은 1776년 화재로 소실됐으며, 그 이후에 새롭게 건립한 극장이 지금의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이다. 모차르트는 파르마와 볼로냐, 피렌체로 향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여러 작품을 써 나갔다. 1770년 10월에는 볼로냐 백작의 야외 빌라에 머물면서 작품 완성에 매달렸고, 그 달 중순에는 밀라노로 돌아와 오페라에 필요한 아리아 20여 곡의 작곡을 마쳤다. 당시 초연을 맡은 밀라노의 가수들이 끝도 없는 요구 사항을 늘어놓는 바람에, 모차르트는 이들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의 1막 첫 아리아는 테너의 주문으로 이틀 사이에 5차례나 고쳤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같은 진통은 한층 공들여 노래를 다듬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미트리다테의 왕비 아스파지아가 1막에서 부르는 아리아 [내 마음은 슬픔으로 박동하고] (Nel sen mi palpita)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내 마음은 슬픔으로 박동하고, 슬픔은 내게 울라고 말하네. 난 저항할 수가 없네,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네.”아스파지아의 아리아 [내 마음은 슬픔으로 박동하고]
단조풍의 이 아리아는 14세 소년의 솜씨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격조와 우아함으로 가득했다. 그해 12월 26일 밀라노에서 오페라가 초연됐을 때 모차르트는 현지에서 “거장 만세(Viva il Maestro)”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작품은 21차례나 공연됐다. 라신의 프랑스어식 제목인 『미트리다트』는 모차르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에서는 [미트리다테]로 불린다.
야만인에게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다
문명과 야만, 제국과 오랑캐, 중심과 변방,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항 대립에서 미트리다테스는 언제나 후자에 속했다. 하지만 라신의 희곡과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이 변방의 야만인에게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이 작품들을 통해 미트리다테스는 그저 잔인하고 흉폭한 악당이 아니라, 약혼녀의 진심을 눈치 채고 사랑을 양보하기도 하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20세기 들면서 문명이나 제국 중심의 가치관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나 철학적 반성이 쏟아지고 있다. 서구 자본주의와 공산 진영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제3세계론’이나 비동맹주의, 서구적 관점에서 동양을 묘사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의 탈식민주의 비평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흐름과 더불어 미트리다테스 역시 제국에 맞선 투사인 동시에 인간적 면모를 지닌 도전자로 재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로마 제국에 맞선 미트리다테스를 9ㆍ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에 비유한 스페인 작가 이그나시 리보(Ignasi Ribó, 1971~)의 소설 『Mitrídates ha muerto』가 출간되어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리보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의 미국은 과거 로마 제국과 다름없는 팽창주의 국가이며, 9ㆍ11 테러는 미트리다테스의 로마인 학살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테러의 주범에게 자칫 도덕적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 소설은 미트리다테스가 지금도 얼마든지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미트리다테스에 대한 재평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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