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서양 음악사의 뒤안길, 1848년 혁명 속의 작곡가들

히메스타 2016. 12. 8. 14:46

 

오늘도 세계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체코 수도 프라하의 카렐 다리. 이 다리를 동쪽으로 건너와 오른쪽으로 돌면 블타바강 강변에 1936년 세워진 스메타나 박물관을 바로 찾을 수 있다.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를 기리는 장소다. 건물 바로 앞에 스메타나의 동상이 건물과 카렐 다리를 등지고 앉아 있다.

체코 프라하에 있는 카렐 다리. <출처: Wikipedia>

이곳에는 늘 관광객들이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세월 속에 굳어진 스메타나의 모습과 그 뒤의 박물관, 배경을 이루는 카렐 다리와 블타바 강, 멀리의 프라하 성이 그림엽서와도 같은 정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스메타나의 대표작인 교향시 ‘블타바(몰다우)강’의 유장한 선율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80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스메타나의 얼굴에서도 여러 가지 상념이 전해진다. 그의 등 뒤를 수놓는 카렐 다리는 그에게 단지 ‘고국의 관광명소’에 그치지 않았다. 24세 약관의 나이로 그는 이 아름다운 중세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전 유럽을 뒤흔든 ‘1848년 혁명’의 한 풍경이었다.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스메타나, [몰다우](블타바) / 베를린 필하모닉(연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2 요한 스튜라우스 1세, [라데츠키 행진곡] / 베를린 필하모닉(연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3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 중 서곡 /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연주), 하인리히 홀라이저(지휘)
4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서곡 / 베를린 독일 오페라 오케스트라, 주세페 시노폴리(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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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의 음악가, 혁명의 노래를 작곡하다

 

1948년 6월 프랑스 수플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그린 그림. <출처: Wikipedia>

1848년 혁명은 대부분의 한국인, 아니 비유럽인들에게 친숙하지 않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를 결산한 빈 회의(Congress of Wien, 1814~1815)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은,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독일 통일을 제외하면 큰 격변 없이 한 세기 가까운 평온을 유지한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긴 평온에 하나의 뚜렷한 금을 긋고, 다가올 더 큰 격변을 예고한 사건이 1848년 전 유럽을 흔들었던 시민혁명이었다. 음악사적으로는 낭만주의 중기에 해당한 시기였다. 이 혁명은 당대 수많은 대작곡가들의 삶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겨놓았다.

혁명의 파장은 전 유럽과 남미에까지 미쳤지만 오늘날 그 인상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혁명가들의 요구가 ‘왕정 전복’이나 ‘프롤레타리아 집권’처럼 뚜렷하지 않고 다양하며 산만했다. 그리고 또 하나, 혁명이 가져온 ‘과실’이 많지 않았다.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왕정이 전복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일부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혁명은 깨끗이 진압되었고 수구적 사회체제가 계속 유지되었으며 혁명주의자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여 계층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귀족층은 절대왕정 타도를, 시민층은 봉건제도 타파를, 근로계층은 더 많은 노동의 과실을 요구했다. 귀족층은 왕정에 대항하면서 시민계급을 위협했고 시민계급은 귀족층에 반항하면서 한편으로는 근로계층을 억눌렀다. 독일과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던 소국가들을 합쳐 국민국가를 세우기 원했고, 오스트리아의 각 민족은 거대한 제국을 찢어 민족국가를 세우기 소망했다. 단일하고 투명한 성과를 일궈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스메타나 초상화. <출처: Wikipedia>

스메타나의 고국인 체코의 경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제국에 통합되어 있었으므로 독립국가를 세우거나 최소한 자치권을 부여받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혁명의 진동이 프라하를 뒤흔들었을 때 그 지도자는 스메타나의 친구이자 시인인 카렐 하블리체크(Karel Havlicek, 1821~1856)이었다. 애국심이 끓어오르던 스메타나도 혁명 그룹의 시민군에 가담했다. 그가 작곡한 시민군 노래, 프라하 대학 학생회가, 그리고 ‘자유의 노래’는 프라하의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애창되었다.

곧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가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블리체크는 스메타나를 비롯한 시민군의 리더들에게 카렐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바람같이 들이닥친 훈련된 황제군은 일거에 바리케이드를 쓸어버리고 프라하에 구체제를 회복했다.

놀랍게도 스메타나는 투옥되지 않았다. 통제의 압력을 완화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우려는 체제 측의 의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혁명의 지도자인 하블리체크도 감형 끝에 석방되었다. 스메타나는 8월에 프라하에 피아노 학원을 세우기까지 했다. 학원을 위해 새 작품을 써달라는 그의 간청을 리스트가 받아들여 ‘6개의 개성적 소품’을 보내준 것도 새 학원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고국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블타바(몰다우)’를 발표한 것은 27년 뒤인 1875년의 일이었다. 그사이 스메타나는 다시 깊어진 고국의 정치적 억압과 세 딸의 잇단 죽음 등 개인적 불운이 겹친 가운데 스웨덴의 예테보리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가 1861년 프라하로 돌아와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억압적 내무장관인 알렉산더 폰 바흐가 쫓겨나고 한층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혁명의 열기도 어느새 사람들의 회고담에나 등장하는 추억이 되어있었다. 블타바 강의 유장한 물줄기를 작품에 담아내며, 스메타나는 혁명의 열기를 핏줄의 고동으로 느끼던 20대의 젊은 날을 한때나마 회상했을 것이다.

체코 프라하의 아름다운 블타바강 전경. <출처: Wikipedia>

정치 노선에서도 대립한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매년 1월 1일 열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본 프로그램에 이어 약속처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왈츠의 왕’․1825~1899)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계속해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왈츠의 아버지’․1804~1849)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고 끝난다.

알려져 있듯 두 왈츠 대가는 부자() 사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애정이나 살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왈츠의 아버지’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가족들과 절연해 집을 나왔고, 아들들이 음악가로 성공한 뒤에는 ‘라이벌’로서 이들을 견제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 관점도 크게 달랐으며 이는 1848년 혁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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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슈트라우스 1세. <출처: Wikipedia>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99년) <출처: Wikipedia>

아들 슈트라우스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하며 은행가로 키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아버지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섭외해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을 매질하며 ‘매질로 음악을 너에게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비엔나 시립 공원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동상. <출처: Wikipedia>

집안의 갈등은 장남 요한이 19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와 정부와 딴 살림을 차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는 장래 ‘왈츠의 왕’이 될 아들 요한의 음악적 장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독자적인 악단을 조직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출연시킨 카지노 등 시설에 자신이 출연을 거부함으로써 장남의 앞길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미 높아지기 시작한 아들의 인기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혁명이 발발한 1848년, 아들은 23세, 아버지는 44세의 한창나이로 명성을 겨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독립군을 진압한 보수파의 영웅 라데츠키 장군을 찬양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해 인기를 끌었다. 아들은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프랑스 국가로 혁명파가 사랑한 [라 마르세이에즈]를 공개적으로 연주했다가 체포됐다. 곧 풀려났지만 그는 2년 전 아버지가 받은 ‘황실무도회 감독’ 자리를 받기 직전이었음에도 이 사건 때문에 임명이 거부되었다.

1년 뒤인 1849년에 ‘왈츠의 아버지’가 열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들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악단을 인수해 자기의 악단과 합쳤다. 이제 그의 앞날에 장애물은 없었다. 동생 요제프와 에두아르트도 왈츠와 폴카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풍운아’ 바그너를 덮친 가장 큰 풍랑

 

리하르트 바그너 (1871년) <출처: Wikipedia>

음악사상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이름은 단지 걸작들을 남긴 한 대작곡가라던가, 독일 음악극을 완성한 인물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관현악법, 주제 발전, 화성 등 당대 음악의 문법과 텍스추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장려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꽃피웠다. 말하자면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일종의 ‘저수지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방랑하는 홀란드인]을 비롯한 그의 음악극 내용처럼 그의 일생은 풍운의 연속이었다. 26세 때 작품 흥행 실패로 아내와 함께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파리로 도주했던 것이 그 풍운의 시작이었다. 이어 혁명이 그의 인생을 두들겼다.

1842년 [리엔치] 초연의 성공 이후 드레스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는 작센 궁정음악가 칭호도 받았다. [방랑하는 홀란드인], [탄호이저]도 이 시기에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바그너는 프루동, 포이어바흐 등의 급진 이념에 경도되어 있었고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교유하고 있었다. 유럽 혁명의 영향으로 1849년 5월 드레스덴에서는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여기 가담해 높은 건물에 올라가 시민들을 선동한 바그너에게도 현상금 전단과 함께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후 13년 동안 그는 독일 땅을 밟을 수 없었다.

‘마틸데 베젠동크’ 초상화. 1850년 <출처: Wikipedia>

스위스의 취리히에 도착한 그는 부호 베젠동크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베젠동크의 호의를 배신할 운명이었다. 그의 부인으로 시인이었던 미모의 마틸데 베젠동크와 사랑에 빠져든 것이다. 그의 부인이 마틸데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입수함으로써 로맨스는 끝이 났다.

1858년 그는 혼자 취리히를 나와 베네치아로 향했다. 대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머물며 남의 여인을 탐한 사랑의 회상을 담은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했다. 1862년에야 추방령이 풀려 그는 독일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모든 예술장르를 합친 종합예술의 완성’이라는 그의 이상은 2년 뒤인 1864년 바이에른 왕으로 취임한 18세의 루트비히 2세를 매혹시켰다. 작센의 왕정을 반대했던 바그너를 위해 이웃 바이에른 왕은 아낌없는 후원을 주었고, 1876년 바그너 종합예술의 이상을 완성할 바이로이트 극장이 낙성식을 가졌다.

애국의 아이콘으로 입지를 다진 베르디

 

주세페 베르디. (1886년) <출처: Wikipedia>

바그너와 동갑내기이자 푸치니와 함께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명사인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그의 유년기에 이탈리아는 소국과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등 그의 초중기 작품들이 강렬한 애국적 민족주의적 열정을 보여주며, 그의 작품에 감동한 청중들이 ‘베르디 만세(Viva Verdi)’를 외쳤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통일운동기에 ‘베르디 만세’의 ‘Verdi’는 Vittorio Emmanuele Re d'Italia, 즉 이탈리아 왕 비토레오 에마누엘레의 약칭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흔히 짐작할법한 바와 달리 1848년 혁명기에 베르디는 스메타나처럼 그 중심에 있었던 것도, 바그너처럼 기구한 풍랑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이 짧은 시기의 혁명운동만을 놓고 보면 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1860년경 <출처: Wikipedia>

1846년, 그는 파리에서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와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스트레포니가 파리에서 성악교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결혼하지 않고 사는 데 대한 이탈리아 지인들의 냉랭한 반응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해외 생활 기간에 혁명의 바람이 찾아왔다. 1848년 혁명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밀라노 시내에서 몰아냈을 때 마침 베르디는 이 부근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친하게 지낸 대본작가 피아베에게 “여기 더 이상 독일인이 없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라! 나는 기쁨으로 취해있다”는 열렬한 편지를 써보냈지만 시인 주제페 주스티의 ‘애국적인 작품을 써 달라’는 주문은 거절해 놀라움을 샀다. 그의 냉정한 머리는 오스트리아군의 퇴각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혁명과 독립의 이상으로 들뜬 이탈리아인들은 ‘애국적 작곡가’ 베르디의 이름을 어느 때보다도 깊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간여하게 된 것은 11년이 지난 1859년이었다. 사람들이 ‘베르디 만세’를 외친 것도 이 해 [가면 무도회]의 공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년 뒤인 1861년에 이탈리아는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외면한 슈만, 절망한 쇼팽

 

동갑내기로 중기 낭만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레데릭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과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이 혁명의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쇼팽은 해외로 진출한 직후인 1831년 러시아에 저항한 바르샤바 대봉기 소식을 듣고 격분해 [혁명 에튀드]를 쓴 바 있다. 그러나 17년 뒤의 혁명은 그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의 본거지인 파리 살롱계가 혁명의 여파로 줄줄이 리사이틀을 취소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것이다. 쇼팽은 새로운 청중을 찾아 런던으로 향했고, 습하고 탁한 런던의 공기에 건강을 상하고 만다. 결국 혁명이 종식된 1849년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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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쇼팽 (1835년) <출처: Wikipedia>

로베르트 슈만 (1839년) <출처: Wikipedia>

슈만은 강한 공화주의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찾아왔을 때 그는 정치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1840년 그는 클라라와 결혼을 했고, 의가 좋았던 부부는 계속 아이를 낳았다. (결국은 여덟 명이나 되었다) 클라라는 아이들을 기르는 중에도 콘서트 피아니스트 활동을 접지 않았다. 혁명은, 가깝지만 먼 얘기였다. 슈만의 한 살 위로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멘델스존은 혁명 한 해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바그너가 연기에 휩싸인 드레스덴의 건물 지붕에 올라가 격문을 외칠 때 슈만 부부도 같은 드레스덴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족은 혁명을 피해 인근 한적한 휴양도시인 크라이샤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연주를 마치고 온 클라라가 바리케이드에 막히자 가로막는 군중을 대담하게 꾸짖고 통과했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오지만, 확인되지 않는 전언이다.

민족주의 음악의 화려한 결실로 이어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미완의 혁명이었던 1848~49년 유럽 혁명은 이 시기를 통과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삶에도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사회적으로 이 혁명이 가져온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이 격정의 시기를 통과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유와 애국심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자라고 있었다. 스메타나와 한 세대 뒤 그의 후예인 체코의 드보르자크,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에 의해 만개한 민족주의 음악의 장려한 화원도 이 혁명의 ‘후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건 작건 19세기 중반을 통과한 혁명의 이상이 움터 각국의 민족적 색채로 화려한 꽃을 피워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