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시조. 이 글을 지은 주인공은 바로 조선시대 기생이었던 매창(梅窓, 1573~1610)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시를 비평한 그의 저술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근래에 송도의 진랑(眞娘: 황진이)과 부안의 계생(桂生: 매창)은 그 사조(詞藻)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하며, 매창을 황진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명기(名妓)로 평가하였다. 그녀는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에 큰 명성을 얻으면서,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劉希慶),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李貴) 등과 같은 많은 문인ㆍ관료들과 교유했다. 부안(扶安) 출신의 기생인 매창이 미천한 신분임에도 당대의 학자들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부안 출신의 기생, 매창
매창은 본명이 향금(香今)이고, 자는 천향(天香)이며, 호가 매창이다. 계생이라고도 하였다. 1573년(선조 6)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매창집(梅窓集)]의 발문을 보면, 그녀의 출생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계생(桂生)의 자(字)는 천향(天香)이다. 스스로 매창이라고 했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에 나서 경술년[1610]에 죽었으니, 사망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평생토록 노래를 잘했다. 지은 시 수백 편이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지금은 거의 흩어져 사라졌다. 숭정(崇禎) 후 무신년[1668] 10월에 아전들이 읊으면서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구해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매창집], 매창전집, 부안문화원, 2010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아,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기생은 관비 출신 중에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관아에 속한 기생은 ‘기안(妓案: 관기 명부)’에 올라 관리를 받았다. 그녀들의 이름은 호방(戶房)에서 출석을 점검할 때 부르기 편하도록 지어졌는데, 매창은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ㆍ계생(桂生)ㆍ계랑(癸娘)ㆍ계랑(桂娘)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매창은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매창집]에 적혀 있듯이 스스로 ‘매창(梅窓)’이라고 자호(自號)했다.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궁중이나 관아의 연회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담당하여, ‘여악(女樂)’이라고도 불렸다. 서울 기생들은 장악원(掌樂院)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배웠고, 지방 관아 기생들은 교방을 통해 이를 습득했다. 또한, 기생들은 주로 양반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문장과 서화(書畵) 학습도 중요하게 시행하였다. 그녀들은 갈고 닦은 실력으로 양반들과 함께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19세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를 잘 지은 ‘시기(詩妓)’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면서 매창을 언급하였다.
송계 권응인의 [패관잡기]에, “우리나라 여자들의 시로 말하면,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용성의 창기(娼妓) 우돌(于咄), 팽원의 창기 동인홍(動人紅)만이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하나 전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송경(松京)의 삼절(三絶)로 유명했던 황진(黃眞), 부안(扶安) 기생 매창(梅窓)ㆍ계생(桂生)ㆍ추향(秋香), 호서 기생 설죽(雪竹)ㆍ취선(翠仙), 진주 기생 승이교(勝二喬), 부안 기생 복랑(福娘), 성천 기생 일지홍(一枝紅) 등은 모두 시에 능하기로 유명하다.”하였다. 창기로서 시에 능하다는 것은 대단히 뛰어난 일이기 때문에 대략 언급한 바이다.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1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
황진이ㆍ매창ㆍ일지홍 등의 기생들은 웬만한 시인 가객 못지않은 뛰어난 글재주를 보여주었다. 특히, 서경덕과 교유한 황진이나 이귀ㆍ허균 등과 교유한 매창의 경우처럼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교유하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들의 재주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비록 천민 신분이었지만 기생들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양반들과 풍류를 나누었고, 서로의 애틋한 감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매창과 유희경, 그 만남과 사랑
매창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1)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남자는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천민 출신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었다. 뭇 양반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성이 높았던 매창이 신분이 높지 않았던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과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여기에는 천민 출신 시인 백대붕(白大鵬)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희경과 백대붕은 함께 시를 잘 짓기로 소문이 퍼져 ‘유백(劉白)’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매창도 이들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1591년(19살)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586년(14살)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김준형, [이매창 평전], 한겨레출판, 2012, 94쪽.)
젊은 시절 부안을 지날 때였다. 이름난 기생 계생이, 유희경이 서울의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물었다.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 가운데 누구신지요?” 대개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지역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파계를 했다. 시로 풍류로써 통했기 때문이다. 계생 역시 시를 잘 지었는데,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유희경, [촌은집], <행록(남학명 찬)>
위의 글은 남학명(南鶴鳴)의 [행록(行錄)] 중 일부로, 유희경과 매창의 만남을 보여준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은 매창을 찾아온다. 유희경은 그때까지 뭇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에게는 큰 관심을 보였다. 매창이 이미 유희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희경 또한 명성이 자자한 매창에 대해 알고 있었음은 그녀에게 지어준 시 <계랑에게[贈癸娘]>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유희경, [촌은집], 권 1, <증계랑(贈癸娘)>
이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매창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부안으로 내려와 직접 매창을 보고 나서, 그 소문이 떠도는 소문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매창의 매력에 흠뻑 빠져,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표현했다. 시에 능통했던 유희경과 매창.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을 시를 통해 주고받았다. 유희경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매창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7편으로 확인된다. 유희경은 28세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매창을 연인처럼 무척이나 사랑했던 듯하다. 매창이 삐쳐서인지 얼굴을 찡그렸을 때, 자신에게 선약(仙藥) 하나가 있어 고운 얼굴의 찡그린 흔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주고 싶다고 하였다. 찡그린 모습까지도 귀여워하며, 그녀를 달래주고자 하는 유희경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유희경은 창덕궁 옆을 흐르는 계곡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이곳을 침류대(枕流臺)라 하였다. 당시 침류대에는 이수광ㆍ신흠ㆍ허균ㆍ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이 모여들었으며, 유희경은 침류대의 주인으로 자처하였다. 유희경에 대해 허균은 “사람됨이 청수(淸秀)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다.”고 평했으며, 조우인(曺友仁)은 “당시 사대부들조차 예법에 관한 한, (유희경을) 따라잡을 자가 드물었다”고 할 만큼 유희경은 예법에 아주 밝았던 인물이었다.
부안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이별 후에도 두 사람은 사랑을 잊지 못하고 서로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만나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리움은 더욱 커지는 걸까? 유희경은 서울에 있어 부안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그대의 집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누나”2)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문득 매창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3)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했듯이 매창 또한 유희경을 그리워했다. 맨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매창이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하고 읊은 시조는 바로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이 글은 1876년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는데, 시조 아래 주석에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었다. 이에 이 노래를 지어 수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임을 알 수 있다.
- 유희경, [촌은집], 권 1, <회계랑(懷癸娘)>
- 유희경, [촌은집], 권 1,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지만, 너무 짧은 재회의 시간이었다. 함께 시를 논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이것은 이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매창이 3년 뒤인 16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정미(丁未: 1607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하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름난 기생 매창과 천민 출신의 유희경. 두 연인은 신분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은 시를 통해 평생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시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을 통해 문인들과 소통하다
이매창의 묘. 황진이에 버금가는 명기이자 조선 여류 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 그녀는 서른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교류하던 문인들, 특히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글을 남겼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소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매창은 1600년을 전후하여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며, 다른 사람들의 문헌에도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허균(許筠, 1569~1618)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대 최고의 시 비평가였던 허균은 매창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였고, 이에 많은 문인들이 매창을 찾아 시를 주고받으려 하였다.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로는 권필ㆍ심광세ㆍ임서ㆍ한준겸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조선 최고의 시기(詩妓)로 부상하였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이었다. 그해 7월, 허균은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왔다. 이때,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곳에서 허균은 매창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이 허균의 문집에 남아 있다.
23일(임자).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권 18, 문부 15, 기행(紀行) 上 <조관기행(漕官紀行)>
허균은 매창의 외모를 ‘불양(不揚)’이라고 설명했다. 즉, 생김새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허균은 재주와 정감이 있는 매창과 대화하면서 그 매력에 빠졌고, 종일토록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허균은 매창을 이귀의 정인(情人)이라고 했는데, 이귀는 1599년 부안과 지척인 김제군수로 내려왔다가 매창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매창은 부안을 비롯한 인근 주변 지역에 내려오는 문인들과 많은 만남을 가졌고, 각종 행사나 연회에 러브콜을 받았다. 허균은 후에 부안으로 내려와 우반동[愚磻洞]에 정사암을 수리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매창과 허균은 빈번하게 만나 함께 시를 짓기도 하고, 불교와 도교도 공부했다. 허균은 당시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ㆍ도교는 물론 서학(西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매창 또한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매창의 시 <月明庵에 올라>에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언급한 것과 허균이 서울에 올라간 후 매창에게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4) 라고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허균, [성소복부고] 권 21, 문부 18, 척독(尺牘) 下 <계랑에게 보냄 기유년(1609) 1월>
매창은 허균을 통해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의 시도 접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허난설헌은 꽃다운 나이인 27세(1589)에 요절하였고, 동생 허균은 친정에 남아 흩어져 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고(蘭雪軒藁)]를 만들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난설헌고]의 초고를 전달하여 1606년(선조 39) 중국에서도 간행되게 하였다.5)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의 시를 아껴, 그것을 간행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매창은 이 책을 얻어서 읽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매창집]에 실린 시들 중 서너 편은 허난설헌의 시와 유사하다.6) 이외에 매창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한 인물들 중에는 한준겸(韓浚謙)과 권필(權韠)도 있었다. 한준겸은 매창에게 <노래하는 기생 계생에게 주며[贈歌妓癸生]>라는 시를 건넸으며, 매창을 당나라 중기의 이름난 기생인 설도(薛濤)에 비유하기도 했다. 권필은 매창에게 주는 시에 <여자 친구 천향에게 주며[贈天香女伴]>라고 적을 만큼, 친근감을 표현하였다. 매창에게 있어서 유희경ㆍ허균ㆍ이귀ㆍ한준겸 등 당대의 문사들은 마음을 함께 나누며 시를 노래하는 친구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매창의 삶은 너무 짧았다.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매창은 평소에 “나는 거문고와 시가 참말 좋아요.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했으며, 그 말에 따라 그녀의 무덤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전해진다.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논사류 2, 인물
- 김준형, [이매창 평전], 한겨레출판, 2012, 249쪽.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介潔: 깨끗하고 굳음)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허균, [성소부부고] 권2, 시부 2, <병한잡술(病閑雜述)>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매창. 그녀는 시를 매개로 하여 당대의 학자들과 깊은 교유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글재주로 당당하게 뭇 양반 학자들과 시를 논했던 매창의 흔적은 그녀의 시비(詩碑)가 남아있는 전북 부안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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