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당나라에 저항한 백제의 마지막 임금 - 풍왕

히메스타 2016. 8. 24. 15:08
 
풍왕 이미지 1

백제 마지막 임금은 의자왕(, 재위: 641〜660)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 역사가 안정복(, 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의자왕이 아닌 풍왕(, 재위: 661〜663)으로 기록하고 있다. 풍왕은 백제인이 인정한 백제 최후의 임금이었다.

왜국에 건너간 백제 왕자

 

풍은 의자왕의 아들로 풍장()이라고도 하며, 성씨가 부여()씨이므로 부여풍(), 혹은 여풍()이라고도 불린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 서명() 3년 3월조에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을 보내어 인질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는 631년으로, 이때의 백제왕은 무왕(, 재위: 600〜641)이었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풍장이 왜국에 온 연대를 잘못 기록했거나, 백제왕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일본서기] 643년 11월 기록에 “백제의 태자 여풍이 벌통 4개를 삼륜산에 놓아 길렀으나 끝내 번식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볼 때, 그가 일찍부터 왜국에 건너가 살았던 인물임에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백제는 아신왕 6년(396년) 이후로 왜국에 왕자를 파견해왔다. 왕자를 파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왜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풍 왕자는 왜국의 나라() 분지에 소재한 미와산에서 벌을 키우며 조용하고도 편한 삶을 살았다. [일본서기]에서는 그를 태자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644년 의자왕이 아들 융()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배치된다. 왜국에서 일본열도에 머물고 있는 풍 왕자를 높여주기 위해 태자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 또는 백제에서 왜국에 왕자를 파견할 때 격을 높여주기 위해 태자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있겠다. 어찌되었든 풍 왕자는 백제의 태자는 아니었으나, 의자왕의 많은 왕자들 가운데 서열이 높은 왕자였음은 분명하다. 그가 631년 왜국에 파견된 것을 택한다면, 의자왕이 600년에 태어났음을 고려할 때 그는 615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의자왕의 첫째, 혹은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왜국에는 그의 동생인 새성()과 숙부인 충승() 등 다수의 백제 왕족들이 머물고 있었지만, 그는 백제인들 가운데 대표자로 대접받고 있었다.

왕으로 추대되다

 

평온했던 그의 삶은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660년 7월, 당나라 13만 대군과 신라 5만 대군은 갑작스럽게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기벌포와 황산벌에서 적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제 의자왕은 7월 18일 침략해온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의자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 땅에는 당나라의 행정기관들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때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백제 곳곳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당나라-신라군과 계속해서 전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부터 남잠()과 정현(), □□□성()(삼국사기에서 탈자로 기록됨)을 비롯해 두시원악()에서 좌평 정무()가, 구마노리성()에선 달솔() 부여자진()이 백제의 왕통을 다시 계승시키기 위해 부흥군을 일으켰다. 복신()과 도침() 등은 임존성을 거점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 백제 부흥군은 곳곳에서 신라군과 당군을 격퇴하며 한때 수도 사비성 함락을 눈앞에 둘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특히 복신과 도침 등은 부흥군의 지도부를 형성하며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복신과 도침은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고, 풍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 10월 복신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사지원과 함께 풍 왕자를 귀국을 청했다. 하지만 풍은 곧장 귀국할 수는 없었다. 홀로 귀국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왜국을 설득해 원군을 지원받아 귀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의 제명()천황은 한반도와 가까운 축자(, 현재 후쿠오카 지역)로 행차하여 직접 백제 구원군을 모집했다. 제명천황이 661년 7월에 죽었음에도 왜국은 국상()을 미루고 백제 구원군을 파견하는 일에 여전히 매진했다. 왜국에게 백제를 구원하는 일은 당시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풍왕의 귀국은 661년 9월에야 이루어졌다. 군사를 모으는 일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왜국 천지()천황이 보내 준 5천여 군사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백제 부흥군과 풍왕

 

그가 귀국하자, 당시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 등이 마중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치를 모두 맡기며 환영해 주었다. 661년 2월 이후로 백제 부흥군은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하는 중이었다. 661년 3월〜4월에 벌어진 두량윤성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은 신라군을 격파하는 등 차츰 백제 옛 터를 회복하고 있었다. 부흥군의 숫자는 3만 명이 훨씬 넘었고, 약 200여성을 회복할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661년 7월 이후로 당나라는 662년 2월말까지 고구려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백제 부흥군을 막아낼 힘이 부족했다. 따라서 662년 2월 당나라 고종()은 당시 사비성 하나만을 겨우 지키고 있는 당나라군에게 하나의 성만으로는 홀로 지키기가 어려우니 철군하거나 신라에게 의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막강해진 부흥군의 지도자인 도침은 자신을 영동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이라 칭하며 권력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승려 출신 도침은 당시 부흥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복신은 백제 왕족 출신으로 부흥군 내에서 가장 전공()이 컸다. 그럼에도 도침이 복신보다 자신을 앞세우며 방자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자극을 받은 복신이 662년 4월〜5월 사이에 도침을 살해하고 말았다. 도침을 제거한 복신은 이제 부흥군 내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반면 풍왕은 비록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오랜 세월 왜국에 가있던 터라 부흥군 내에서 별다른 지지 기반이 없었다. 풍왕은 비록 부흥백제국의 왕이었지만, 제사만을 주관하는 실권 없는 왕에 불과했다. 복신은 왜국에 사신을 보낼 때에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보내는 등 외교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차츰 풍왕이 복신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둘은 겉으로는 협력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였다.

풍왕, 복신을 살해하다

 

662년 12월 부흥백제국은 수도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했다가,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생겼다. 천도를 주도한 자가 복신인지, 풍왕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지만, 천도 실패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커졌을 것은 분명하다.

두 사람의 불화는 당과 신라에서도 모두 알 정도로 커져 있었다. 풍왕은 복신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러자 663년 6월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풍왕이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가 덮쳐 죽일 것을 꾀했다. 하지만 풍왕이 이를 먼저 알고서 복신을 급습해 그를 사로잡았다. 복신이 먼저 반란을 계획한 것인지, 풍왕이 먼저 복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어쨌든 풍왕은 복신을 사로잡은 후, 그의 목을 베고 머리를 소금에 절여 버렸다. 그간 복신에게 냉대받았던 감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군의 분열과 실패

 

도침이 피살 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지휘부의 분열은 곧 부흥군의 전력 약화로 나타났다. 662년 7월 진현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당군에 패하는 등, 서서히 당나라와 신라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흥백제국 최고의 장수인 복신마저 죽였으니, 부흥군의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신라와 당은 663년 8월 복신의 죽음을 알고, 곧장 부흥백제국의 수도인 주류성을 향해 공격해왔다. 한편 왜국에서는 663년 3월과 8월에 걸쳐 배 1천여 척에 3만 7천명의 대규모 지원군을 백제에 보냈다. 풍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강 하구에서 왜군과 만나, 이곳에 있는 당나라 수군을 공격했다. 풍왕과 백제 부흥군은 8월 28일, 왜국의 선단 1천여 척과 함께 기상을 살피지 않은 상태에서 당군을 향해 쳐들어갔다. 하지만 당나라 함대가 좌우에서 협공을 하자, 순식간에 대패하여 수많은 익사자를 남긴 채 배도 되돌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백강 전투의 패배로 백제 부흥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9월 1일 풍왕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몸을 피했다. 9월 7일에는 주류성마저 함락되었다. 그러자 나머지 백제의 성들도 적에게 항복했다. 비록 664년 3월 백제의 남은 사람들이 사비성에 모여들어 저항했지만, 주류성 함락과 풍왕의 도피는 곧 백제 부흥군의 종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정복은 663년을 백제 멸망의 시기로 잡아 백제 역사를 32대왕 678년(B.C 18〜A.D 663)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최후까지 당나라에 저항하다

 

풍왕은 부흥군의 대장군인 복신을 죽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백강 전투에서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백제 부흥에 실패한 임금이었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나 외교활동에 전념하면서 편히 살던 그에게 조국의 부흥이란 대업은 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굴한 인물은 아니었다.

풍왕이 고구려로 몸을 피한 것은 단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목숨만을 부지하겠다면 왜국으로도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가 고구려로 몸을 피한 것은 고구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는 664년 풍왕이 왜로 망명한 아우인 부여용()과 서로 힘을 합치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는 풍왕을 백제의 왕으로 일정하게 대접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고구려 수도에 머물며 당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668년 7월, 고구려마저 당나라 100만 대군과 신라 20만 대군의 연합공격을 받아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왕과 귀족, 기술자 등 약 20만 명을 당나라로 끌고 있다. 당나라에 잡혀간 포로 가운데는 풍왕도 끼여 있었다.

당나라는 풍왕을 영남(: 오령산맥 남쪽. 현 광둥성, 광시성 일대)으로 유배()하였다. 백제 의자왕, 고구려 보장왕을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머물게 했던 것과는 대우가 달랐다. 그것은 그가 끝까지 당나라에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백제 마지막 왕의 최후는 역사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