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실증적인 역사 서술을 실천한 역사가 - 이긍익

히메스타 2016. 8. 26. 15:33

 

 
이긍익 이미지 1

조선시대 정치사를 다룬 역사서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가가 주도적으로 편찬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러나 정보와 자료의 수집이 오늘날보다 훨씬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한 개인이 당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관()이라는, 요즈음으로 치면 전문 역사가나 기자와 같은 사람들을 활용하는 관찬 역사서와 달리 개인이 그 많은 사건들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있었다. 그것도 철저히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이긍익(, 1736~1806)의 [연려실기술()]이 바로 그 작품으로 , [연려실기술]은 개인이 남긴 조선시대 최고의 역사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당쟁의 아픔을 역사서 서술로 극복하다

 

자신이 살아온 한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이면서 실증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길이 읽힐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은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원칙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은 누구일가? 필자는 주저 없이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을 손꼽고 싶다.

이긍익의 자는 장경(), 호는 연려실(), 본관은 전주()이다. 부친 이광사(, 1705~1777)는 서법()에 특히 뛰어나 동국진체()로 평가를 받았으나, 소론의 중심인물로 당쟁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광사는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부령으로 유배를 갔으며, 신지도에 유배지를 옮겨간 후 사망하였다. 이긍익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부친이 당쟁에서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야인으로 지내며 책을 엮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이긍익은 13세경에 역사에 관심을 가진 후, 평생의 노력을 집대성하여 조선의 야사() 총서()라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을 남겼다. 불운한 환경을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극복한 것이다.

이긍익이 활동한 시기의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에만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그는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는 등 개방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이긍익의 집안은 이광사가 양명학자인 정제두(, 1649~1736)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를 갔고,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정제두에게서 이광사로 이어지는 양명학을 일명 강화학파()라 부르며, 그 학맥은 이광사()―이충익()―이면백()―이시원()―이상학()―이건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긍익의 후손이기도 한 이건창(, 1852~1898)은 조선시대 당쟁사를 정리한 [당의통략()]을 저술하여, [연려실기술]과 함께 조선시대 정치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를 한 집안에서 배출하는 인연을 만들었다.

‘연려실’이란 ‘명아주()를 태운() 방()’이란 뜻으로 이긍익의 호다. 중국 한()나라 때 유향()이라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나타나서 지팡이에 불을 붙이고 홍범오행()의 글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마 밤에도 불을 밝히면서 열정적인 저술 활동을 했던 자신의 삶을 형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로 썼는데, 기사본말체는 역사를 시대순으로 구성하되, 시대별 주요 사건에 대해 본()과 말()을 설정하여, 각 시대별 사건에서 주요한 내용들이 우선적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 서술 체제이다. [연려실기술]은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전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보면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고사본말()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 저자가 생존했던 숙종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 역대의 관직을 위시하여 전례ㆍ문예ㆍ천문ㆍ지리ㆍ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을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힌 ‘별집()’의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종의 책들은 수록된 내용은 거의 일치하지만, 전체 권수가 같지 않은 경우도 있다. 원집이 가장 정형화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속집은 원집과 달리 인용된 도서의 제목이 들어가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별집은 원집과 속집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한 것이다.

[연려실기술]에서 이긍익이 기본적으로 견지한 정신은 ‘술이부작(: 서술해서 전할 뿐 스스로 창작하지 않음)’이다. 가능한 자료만을 나열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자신의 견해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물론 인용된 서책을 취사선택했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긍익은 서문에 해당하는 <의례()>에서, “지금 내가 편찬한 [연려실기술]은 널리 야사를 채택하여 모아, 대략 기사본말체를 좇아서 자료를 얻는 대로 분류, 기록하여 다음에 계속 보태어 넣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내가 자료를 얻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여 무엇보다 역사 서술의 원칙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400여 종에 달하는 광범한 인용 서적들

 

<의례>에서 밝혔듯이 이긍익은 ‘술이부작’의 정신으로 [연려실기술]을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대표적인 역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신의 평가가 빠진 것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 서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료의 취사선택 과정에서 이미 저자의 가치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려실기술]의 경우에도, 인물 선정에 참고한 김육의 [해동명신록()]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이긍익 자신의 관점에서 인물을 가감한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400여 종의 자료를 광범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려실기술]은 객관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역사서라고 평가해도 좋을 듯하다.

[연려실기술]은 당시의 도서 분류법인 경()ㆍ사()ㆍ자()ㆍ집()을 망라하고 있다. 사부에서 인용한 서책은 [고려사], [국조보감], [삼국사절요], [동각잡기], [조야첨재], [해동잡록], [춘파일월록] 등으로서 정사보다는 야사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가()들의 야사를 널리 수집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범위한 인용 서적은 이긍익의 학문의 폭이 얼마나 넓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인 동시에, 당시 재야 학자들도 상당수의 장서()를 확보하고 있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자료의 광범위한 인용은 동시기의 [성호사설]이나, 19세기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백과사전적인 저술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긍익은 국가의 공식 기록보다는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 중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편집하였다. 문집은 100여 종이 인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문집은 이이의 [율곡집]으로 204회에 달한다. 다음으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 195회, 김시양의 [하담집] 134회, 허균의 [성옹식소록] 65회, 이자의 [음애집]과 이정구의 [월사집] 50회, 유성룡의 [서애집] 47회 등의 순서다. 이론이나 철학에 줌심을 둔 정통 성리학자보다는 실무 관료로서 활약한 인물의 문집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황이나 기대승, 김인후와 같이 성리학의 이론에 밝았던 학자들의 문집은 크게 인용하지 않았다. 실사()를 중시하는 저저의 입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외국 자료의 인용이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으로 지적된다. [당서()], [대청회전()], [사기()], [진서()] 등이 약간 인용되었을 뿐, 우리의 문헌 기록만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17세기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인용한 외국 문헌보다도 적으며, 19세기의 역사가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저술하면서 중국 문헌 523종, 일본 문헌 22종을 인용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연려실기술]이 정치사와 사건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국내 문헌만으로도 우리 역사를 충분히 서술할 수 있을 만큼 자료가 풍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선의 대표 역사가

 

[연려실기술]은 정치에 관한 기록 이외에도 학술과 문화와 관련된 내용도 담았다. 그만큼 저자인 이긍익의 학문적 관심이 풍부했음을 보여준다. 서술 구성상 소홀하기 쉬운 인물 평전을 보강함과 함께 예악(), 형정(), 법제() 등 시대에 따른 제도의 변천에 관한 내용들도 수록하여 ‘전고별집()’을 마련한 것이 대표적이다. 원집()을 정치편이라 한다면, 별집은 분류편이라 할 수 있다. 이긍익은 “전고별집이라 이름을 붙였다. 전고에 혹 신라와 고려의 구례() 및 유속()을 편수()에서 간략히 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의 역대 연혁을 알게 하여 문질()의 득실이 어떠한가를 살피게 하고자 함이다”고 하여 ‘문질의 득실’, 즉 문화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별집에서는 신라시대 이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 내용에서는 단군조선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것은 원집이 조선의 역사에 국한시킨 것과 다른 점으로, 별집에서 시대를 끌어올린 것은 문화의 변천사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조선시대의 문화만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전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발전되어 온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역사인식이 깔려 있는 부분이다.

[연려실기술]은 야사류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정치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전고별집을 제외한 원집과 속집은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굵직한 사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세종 시대를 기술한 부분에는 집현전의 설치와 사가독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에 관한 내용들도 수록하였다.

가. 임금이 문치에 정신을 기울여 2년 경자()에 비로소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다. 그 뒤에는 더 뽑아서 삼십 명이 되었다가 또 이십 명으로 줄였다. 열 사람에게는 경연의 일을 맡기고 또 열 사람은 서연의 일을 보게 하여 오로지 문한()을 맡기되,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게 하니 문장하는 선비가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ㆍ경오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어 새끼가 모두 희더니, 몇 해 사이에 요직에 오른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나. 임금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몇 십 년 동안을 길러서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관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숙직을 서야 했으므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 것을 오히려 우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가 있으며 몸가짐이 단정한 자 몇 사람을 뽑아 긴 휴가를 주어 번을 나누어 들어와 숙직을 서게 했다.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에서 그 비용을 제공하여 경사()와 백가()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를 이룩하였으니, 인재 양성의 성함을 영주(: 신선이 사는 곳)의 오름에 비하였다.

위의 기록들은 세종 시대 인재의 보고() 집현전에 관한 것으로, 사가독서 조치를 취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또한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내용들도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 “김돈, 김조에게 명하여 천추전 서쪽 뜰에다 조그마한 정자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쯤 되게 하여 정자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기()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다.”거나, “16년 계축,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그림을 그려서 돌에 새기고 또 이순지를 명하여 선유()들이 의논한 역대 제도를 수집하여 의상()ㆍ천문ㆍ역법 등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는 기록 등이 대표적이다.

[연려실기술]은 자료모음집의 성격이 강한 책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료 모음집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를 관통할 수 있는 자료들을 광범하게 모으고, 그 자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이긍익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을 한 점, 한 점 모아 나갔다. 그리고 그 비중에 따라 스스로가 본말()로 설정한 주요 사건에 대해 전후 관계에 맞게 그 자료들을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평가는 엄연히 후세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당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가 않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대한민국사’의 편찬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서술의 방식과 이념 등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후기 역사가의 사명을 확실히 인지하고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가능한 객관적으로 당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긍익. 우리 시대에 이긍익만한 역사가를 찾을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