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나는 조선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 석주명

히메스타 2016. 8. 25. 16:17

 

 

석주명 이미지 1

나비연구가로 유명한 석주명(, 1908~1950)은 생물학자로서, 한국을 연구하는 국학자로서 불꽃같은 삶을 산 인물이다. 한국 나비의 종류를 정하고, 그 이름을 지은 나비분류학자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일찍이 외국인들이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한 오류를 바로잡은 일이었다.

나비 연구에 바친 일생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평양에서 석승서와 김의식 사이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당시 황소 한 마리 보다 비싼 타이프라이터를 어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다. 1921년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이 시절 석주명은 공부보다는 연극이나 음악을 더 좋아한 학생이었다. 숭실고보에서 동맹 휴학 사태가 일어나자 석주명은 자퇴하고 이듬해 윤치호가 설립한 송도고보로 전학하였다.

송도고보로의 전학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송도고보에는 유명한 조류학자 원홍구(, 1888~1970)가 박물학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석주명은 그의 지도와 영향으로 1926년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鹿)고등농림학교에 유학하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송도고보 시절 덴마크 농업에 흥미를 느끼고 낙농에 취미를 갖게 되어 축산 방면으로 진로를 결정하여 농학과를 선택했으나, 축산 선생은 가르치는 것이 영 시원치 않아 1년 뒤 생물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석주명 연구에 따르면, 당시 가고시마고농에는 농학과, 임학과, 양잠학과, 농예화학과의 4과가 있었을 뿐, 생물과는 없었다고 한다. 석주명이 스스로 생물과로 전과했다고 말한 것은, 생물과 관련된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석주명은 가고시마고농에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 교수의 사사를 받았고, 또 교내 에스페란토 연구회 활동을 통해 시게마쓰() 교수로부터 에스페란토 를 배우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1929년 가고시마고농 졸업과 동시에 함흥의 영생고보 박물 교사로 부임했다가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로 직장을 옮겼다. 스승인 원홍구가 평남 안주농업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송도고보에 교사 자리가 생긴 것이었다. 석주명은 모교인 송도고보로 이직한 후 박물관에서 본격적으로 나비연구를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1942년까지 송도고보에서 일한 시기는 바야흐로 그의 나비연구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전공과 관계있는 일을 하기로 하였으나 시력에 자신이 없으니 곤충을 택해야 했고, 곤충이라면 누구나 밟는 첫 단계인 나비를 채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1942년 초 본격적인 나비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석주명은 자신의 학문적 근거지였던 송도고보를 그만두었다. 이후 몇 달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채집 여행을 떠난 석주명은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의 촉탁연구원으로 들어갔고, 다음해에는 제주도에 생약연구소의 시험장이 생기자 그곳으로 옮겨 2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5년 5월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석 달 후 바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석주명의 인생에는 일제강점기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에게 교수 자리를 양보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미친듯이 공부에만 신경 쓴 탓에 가정적으로도 불행했다. 1946년 9월 미군정하의 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임명되어 연구를 계속했으나, 1950년 10월 폭격으로 파괴된 과학박물관으로 향하다가 불의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조선 나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다

 

“나는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 16만 여 마리의 나비를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샘플을 분석하여 논문을 작성한 학자였다. 1936년 대표적인 논문 <배추흰나비의 변이연구>에서 그는 16만개가 넘는 나비를 하나하나 분석하였다. 날개의 형태, 무늬, 색채, 모양, 길이 등을 조사하여 얻은 결론을 통해 석주명은 다른 종으로 보고된 20여 개의 학명이 실제로는 배추흰나비에 속하는 종임을 밝혀내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집대성하여 1939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의 의뢰를 받아 영문 저작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발간했다. 이는 국내과학자의 이름으로 영문단행본을 펴낸 유일한 것이었다.

석주명이 나비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본인의 노력이 가장 큰 것이었지만, 행운도 따랐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연구를 시작한 무렵만 해도 지침이 될 만한 참고 도서도 없었고 특별히 지도해 줄 사람도 없어 연구랄 것도 없이 단순히 채집해서 정리하는 분류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1년 ‘송경곤충연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펼칠 즈음, 마치 자신의 연구를 돕기 위하여 출판된 것처럼 마츠무라의 [일본곤충대도감()]과 우찌다() 등의 [일본곤충도감()]이 간행되었다. 일본 곤충학 대가들의 책이었다. 이들 도서를 바탕으로 석주명은 자신이 채집한 표본들을 정리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그 결과물을 1932년 논문으로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석주명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기존 도감에 실린 내용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연구 결과에 같은 종으로 분류된 표본들이 도감에는 다른 종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종이명의 나비를 정리하다

 

10여 년에 걸친 변이연구를 통해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를 250여종으로 정리하였다. 석주명이 250여종으로 정리하기 전, 조선산 나비에 명명되었던 나비 수는 무려 921종에 달했다. 그러나 921종은 단순한 개체변이(같은 종인데도 개체 하나하나의 형질이 조금씩 다른 현상)로서, 사실상 동종이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 나비가 921종에 달하는 기존의 연구는 그 오류가 드러났다. 석주명은 1939년 [조광()] 6월호에 “1934년의 논문에서 179개의 동종이명을 학계에서 말소시켰는데 아직까지 학계에 아무 항의도 없다는 것에서 과거의 학자가 얼마나 개체변이를 확대시하고 많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밝혔다. 특히 일본 곤충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마츠무라는 1926년부터 ‘서양의 린네, 동양의 마츠무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많은 학명을 만들어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한두 마리의 표본을 조사하여 새로운 이종으로 명명하는 식이었다. 석주명이 자신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음에도 마츠무라는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었다.

곤충학에도 국학이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상식()하는 쌀은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이 없어서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 석주명, [나비 채집 20년의 회고록]

석주명은 단순한 나비연구가가 아니었다. 그는 산과 들에 날아다는 나비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하는 나비도 찾아다녔다. 전통 고전() 문헌에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비를 찾았고, 나비와 관련한 역사적 인물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조선에 서식하는 나비로 연구 주제를 한정한 것도 국학 연구의 일환으로 나비를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조선 나비만을 연구했으며, 외국 나비는 조선 나비 연구에 참고하기 위한 연구용일 뿐이었다. 75만개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여 조사한 석주명은 전국을 다니면서 한국 나비의 분포 상태를 기록하였고 그 결실로 [한국산 접류 분포도()]가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방언 연구와 우리말 나비 이름

 

석주명은 나비 연구가로 유명하지만, 우리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진 연구자였다. 특히 방언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가 방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또한 나비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각 지역을 다니며 나비를 채집하는 동안 지방마다 독특한 방언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의 방언 연구는 1943년부터 2년여 동안,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그는 심지어 근무 기간을 1년 연장하면서까지 제주도 방언을 조사하여 [제주도방언집]을 출간했다. 이 외에도 석주명은 [조선 나비 이름 유래기], [에스페란토 소사전] 등 언어 관련 저서들을 쓰기도 했다.

“언어에서 개인차를 제거하여 귀납하면 방언이 성립하는 것이고, 여러 방언 사이의 차이점을 조절하면 민족어가 되는 것이고, 민족어들 사이의 공통점들을 계통 세우면 언어 분화의 계통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이만하면 방언과 곤충 사이에는 일맥 상통하는 점이 많아서 방언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곤충을 연구할 수 있겠고, 곤충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방언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주명, [국학과 생물학]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지식은 우리말 나비 이름 짓기로 이어졌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부 나비를 제외하고는 일본식 이름만 있고 우리말로 된 나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 249종에 우리말 이름을 직접 지었다. 각시멧노랑나비, 떠들썩팔랑나비, 무늬박이제비나비, 은점어리표범나비, 청띠신선나비, 번개오색나비 등등 순수한 우리말 나비 이름의 70% 이상은 석주명이 지은 이름이다.

석주명이 추구한 조선학 사랑은 조선의 전 산야를 직접 발로 뛰고 샅샅이 누빈 산물이었다. 그는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라는 책을 쓰면서 “무릇 우리나라 안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고 우리와 관계가 있고, 관계가 있는 바에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비단 나비학자만이 아닌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가지고 ‘조선적 가치’를 추구한 훌륭한 조선학 연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