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뛰어난 경륜으로 정조의 개혁을 보필한 제상 - 채제공

히메스타 2016. 8. 23. 10:28

 

채제공 이미지 1

한국사에서 18세기는 중흥과 개혁을 대표하는 시기 중 하나였다. 정치에서는 그동안 정계를 지배해 온 소모적인 당쟁을 지양하고 통합의 논리인 탕평을 추구했으며, 경제에서는 생산력을 확대하고 수취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사상과 문화에서도 북학()과 새로운 문체ㆍ화풍 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동양 전체가 그랬지만, 그런 노력에는 한계가 적지 않았고, 조선은 서구가 주도한 근대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채제공(. 1720~1799)은 그런 18세기를 대표하는 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79세의 긴 생애 동안 영조와 정조라는 뛰어난 두 국왕이 이끈 국정의 중심에서 의미 있는 여러 개혁을 주도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소수파인 남인, 특히 서인에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청남()이었다. 그가 주목할 만한 여러 개혁을 추진하고 성공시킬 수 있었던 데는 기득권이 상대적으로 적은 정파에 소속되었던 까닭도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권을 강화해 국정을 안정시키고 견결한 정치적 의리를 구현하는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출생과 성장

 

채제공은 자가 백규()고 호는 번암()이며 시호는 문숙()이다. 본관은 평강()으로 아버지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채응일()이고, 어머니는 이만성(. 본관 연안)의 딸로 선조 때 이조판서ㆍ호성()공신ㆍ연원부원군()을 지낸 이광정()의 5대손이다.

그의 직계 조상은 그리 현달하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경력은 조부 채성윤()이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ㆍ좌윤에 올랐으며, 5대조 채진후()의 형이 효종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채유후()라는 사실 등이다.

채제공은 숙종 46년(1720) 4월 6일에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공식적 생애는 상당히 일찍 시작되었다. 그는 15세 때 향시에 급제한 뒤 23세(1743, 영조 19) 때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는 평균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시점에 합격한 것이다. 그는 국왕에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 권지부정자(. 종9품)로 벼슬을 시작했다.

채제공은 숙종~영조 때 대사헌ㆍ대사간ㆍ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오광운(, 1689~1745)을 스승으로 모셨다. 오광운과 관련해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가 조선 후기 경세론의 중요한 저작인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서문을 썼다는 사실이다. 스승의 이런 면모는 채제공의 개혁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채제공은 17세 때 오광운의 형인 오필운(. 본관 동복〔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의 딸과 혼인했다(1737, 영조 13). 이런 혼맥은 그가 스승에게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출세

 

채제공은 2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출세하기 시작했다. 영조 24년(1748, 28세) 11월에 사관인 예문관 한림()을 선발하는 시험이 열렸는데, 그는 거기서 수석을 차지했다. 그 뒤 30세(1750, 영조 26) 때부터 5년 정도에 걸쳐 채제공은 이조ㆍ병조좌랑(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ㆍ집의(종3품), 사간원 정언(정6품), 홍문관 부수찬(종6품)ㆍ부교리(종5품)ㆍ동부승지(정3품)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영조 29년(1753, 33세)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는 균역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현지에 나타난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그는 젊은 나이로 상처()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1751, 영조 27, 31세).

중견 관료로 활약하다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1784년작). 65세 때의 초상으로 보물 제1477-2호로 지정되었다. 개인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채제공은 38세(1758, 영조 34) 때 도승지에 임명됨으로써 핵심적 신하의 대열에 진입했다. 4년 뒤 사도세자가 사사된 임오화변(, 1762, 영조 38)이 일어난 데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시기는 정치적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국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도승지에 발탁된 것은 그의 위상과 국왕의 신임을 보여준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가 소속된 남인의 정치적 지향은 왕권을 강화해 개혁과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인은 다음 국왕으로 오를 위치에 있는 사도세자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는데, 채제공은 그런 노선을 앞장서 실천했다. 그는 도승지가 된 해에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는 영조의 비망기(: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가 내려오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다. 훗날 영조는 이런 면모를 기억하면서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말했다. 그 뒤 그가 정조의 가장 중요한 신하가 된 까닭은 이런 태도가 깊은 인상을 준 것이 크게 작용했다.

3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채제공은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대사간과 도승지(1759. 39세)를 시작으로 대사헌ㆍ경기도 관찰사(1760)ㆍ공조참판ㆍ예조참판(1761)ㆍ함경도 관찰사(1768)ㆍ병조판서ㆍ예조판서ㆍ호조판서(1770)ㆍ예문관 제학(1771) 등을 거쳐 좌참찬(1775. 55세)에 오른 것이다. 사관은 이 무렵 “다른 신하들은 윤허 받지 못한 일도 그가 나서면 허락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평가했다. 위의 경력에서 약간 공백이 있는 것은 탄핵을 받아 파직되거나 물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모친상(1762)과 부친상(1765)을 잇따라 당해 삼년상을 치른 결과였다.

1776년(영조 52) 3월 52년에 걸친 영조의 긴 치세가 끝나고 정조가 등극했다. 그때 채제공은 노년에 접어든 56세였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채제공은 정조가 즉위한 직후부터 개혁 정책을 보좌하고 추진했다. 첫 사안은 시노비(: 각 관서에 소속된 노비)의 폐단을 시정하는 절목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 골자는 도망간 노비를 국가에서 추쇄(: 추적해 체포함)하는 제도를 없애고 시노비를 점진적으로 감축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뒤 시노비를 해방(1801, 순조 1)하는 첫 발걸음이 되었다. 정조 초반 채제공은 병조ㆍ예조ㆍ형조판서(1777, 정조 1)ㆍ한성판윤(1778)ㆍ호조판서(1780) 등으로 활동했다.

시련의 세월

 

그러나 지금까지 순조롭던 그의 경력은 60세(1780, 정조 4) 때 큰 시련을 맞았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인 홍국영(, 1748∼1781)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일 때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인물이었다. 그런 공로로 그는 정조 초반 커다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홍국영의 월권이 지속되자 정조는 그를 축출하고 영조 후반 자신의 대리청정에 공로를 세운 소론 준론 계열을 등용했다. 영의정에는 그 정파를 대표하는 서명선()이 임명되었다.

이런 정국의 변화에서 채제공은 그동안 홍국영과 가까이 지내면서 결탁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다. 그는 사직했고, 노량(: 오늘날의 노량진 일대)과 명덕산() 일대에서 7년 동안 은거했다(명덕산은 동대문 밖 10리 쯤에 있다고 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채제공의 호인 번암은 번계〔〕라는 개천에서 유래했고, 그것은 오늘날 도봉구 번동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므로 번동 일대의 산으로 추정된다).

정승으로 개혁을 주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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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 오사모와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으로 오른쪽의 초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제1477-3호. 도강영당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채제공 초상 시복본(1792년작). 73세 때의 모습으로 정조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보물 제 1477-1호.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실의의 세월을 보낸 뒤 채제공은 정조 10년(1786)에 평안도 병마사로 다시 관직에 나왔다. 당시로서는 사망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66세의 노령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후 그는 재상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는 중요한 업적들을 산출했다.

우선 채제공은 복직한 지 2년 만에 우의정(1788, 정조 12, 68세)에 발탁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3년 동안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으로 재직했다. 이것은 100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중요한 개혁들을 추진했는데, 먼저 그동안 당쟁의 핵심적 원인 중 하나였던 이조전랑()의 통청권(: 정3품 이하 주요 문신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과 자대권(: 후임을 자신이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혁파하자고 주청해 윤허를 얻었다. 이것은 일찍이 동서 분당(1570, 선조 8)의 원인이 될 정도로 중요한 관직인 이조전랑의 권한을 줄임으로써 당쟁을 완화하고 탕평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채제공선생뇌문비(). 뇌문비는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놓은 비로, 이 비는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비문은 정조 임금의 필체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가장 중요한 업적은 신해통공(. 1791, 정조 15)일 것이다. 이것은 육의전(: 비단ㆍ무명ㆍ종이ㆍ모시ㆍ생선 등 여섯 가지 주요 물품을 국가에 독점적으로 납부하던 상점)을 제외한 시전()의 특권을 박탈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당시 활발하게 성장하던 상업과 상공업의 변화를 인정하고 촉진한 이 정책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고 평가된다.

채제공은 남인의 정치적 목표인 왕권 강화와 관련된 의견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는 경연에서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극()’을 세울 것()을 포함한 여섯 가지 일을 아룄다.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화성() 성역에서도 실무를 주도했다. 그는 수원에 조성하는 현륭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묘)의 공사를 총괄하는 총리사(使)로도 임명(1788)된 데 이어 수원 유수()ㆍ장용외사(使)ㆍ행궁 정리사(使)를 겸임(1793)함으로써 화성 건설과 운영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채제공은 정조 17년(1793) 5월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73세의 노령이었다. 이때 그는 사직소를 올리면서 임오화변 때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에게 책임을 물어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해 큰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그 뒤 우의정과 좌의정(이상 1795)으로 옮겼다가 정조 22년(1798) 6월 노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이듬해 1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100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는 독상에 임명할 정도로 신임한 노신하를 잃은 그날 정조의 발언은 인상적이다.

지난 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그 사람이 어찌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이 대신과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오직 나만 아는 오묘한 관계〔〕가 있었다. 이 대신은 세상에 드문 인물〔〕이었다. 그가 하늘에서 받은 인품은 우뚝하게 기력이 있었고, 일을 만나면 바로 나아가 두려워하거나 꺾이지 않았다. 시를 지으면 비장하고 강개해 사람들은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가()의 유풍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해 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을 관장했으며 어서를 다듬고 내의원에서 선왕의 건강을 돌보는 데 정성을 다했다.

내가 즉위한 뒤 참소가 빗발쳤지만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나는 매우 위험한 중에 그를 재상으로 발탁했다. 그 지위가 높고 직무는 국왕과 가까웠으며 총애와 신망이 두터워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기운이 빠지게 했으니 “저렇게 신임을 독점한 사람은 예전에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할 만했다. 또한 50여 년 동안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조는 더욱 탄복할 만하다. 이제는 다 끝났다.

채제공에게는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경기도 용인() 북동()에 안장되었다(1799년 3월 26일). 이렇게 그를 신임했던 정조도 1년 반 뒤에 승하했다(1800년 6월).

채제공은 사후()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에서는 남인이 많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제자인 이가환() 등도 옥사했다. 이 때문에 채제공은 ‘사학(: 천주교를 말함)의 뿌리’로 지목되어 관직을 추탈 당했다. 그러나 이런 측면은 오히려 그의 사상이 폭넓고 유연한 면모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된다. 채제공은 개혁과 관련해서 근본적이며 급진적인 태도보다는 운영 방법을 개선하는 점진적 경로를 선호했고 당론의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사상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제자들이 서학에 관련된 것도 스승의 이런 태도에서 발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추탈된 관직은 20여 년 뒤 회복되었고(1823, 순조 23) 이듬해에는 [번암집]이 간행됨으로써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태종 때의 조준ㆍ하륜이나 세종 때의 황희ㆍ맹사성처럼 채제공은 정조의 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이었다. 그는 조선의 중흥을 모색한 마지막 개혁의 시대를 보필하고 주도함으로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그런 발자취를 노년에 닥친 시련을 이겨내고 남겼다는 사실도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