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들어 장관과 차관의 인사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관료들의 약진이다. 외부 기관이나 정치인, 대학교수 등이 장관이나 차관으로 진출했던 자리에 내부 승진 인사가 발탁된 사례가 많다. 내부 승진 인사의 기용은 결국 그동안의 실무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뛰어난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정권이 바뀌는 상황에서도 계속 관료의 직책을 맡는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인조의 즉위로 북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북인 출신임에도 인조 정권에서 계속 요직을 맡은 인물들이 있었다. 광해군과 인조대에 연속으로 호조판서를 지낸 김신국(金藎國, 1572~1657)은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신국은 누구인가?
김신국은 선조ㆍ광해군ㆍ인조대에 활약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정파적으로는 북인에 속했으며,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립되자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소북의 영수로서 활약했다. 소북이 다시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하는 유당(柳黨)과 남이공을 중심으로 하는 남당(南黨)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유당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광해군대의 정국 최대 이슈였던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모론(廢母論)에는 적극 찬성을 하지 않았으나, 폐모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일시 유배되기도 했다. 광해군 11년(1619) 호조판서를 제수받아 인조반정 때까지 역임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광해군대의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평안도 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권의 성격이 전혀 다른 광해군과 인조 양대에 걸쳐 6번이나 호조판서를 맡았던 것은 그만큼 김신국이 실무에 능했던 관료임을 증거하고 있다.
김신국의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瘳),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조부 사원(士元)은 곡성현감을 지냈으며, 아버지 급(汲) 역시 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풍천(豊川) 임씨(任氏)로 판교 보신(輔臣)의 딸이다. 김신국의 혼맥에는 북인계 인물과의 교분이 두드러진다. 김신국은 윤경립(尹敬立)의 딸과 혼인하고 딸을 남이공의 아들인 두북(斗北)에게 출가시킴으로써 남이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김신국의 존고부(尊姑夫)였으며 그의 아들인 이경전(李慶全)과도 교류가 있었다. 김신국의 학문적 사승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부인 사원에게 수학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산해에게도 젊었을 때 학문적 영향을 받았음이 나타난다.
김신국은 특히 병법에 능통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충주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왜적과 맞섰으며, 1593년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권율은 “진실로 경제의 재목이다(眞經濟之材)”라고 칭찬하였다. 훈련도감의 제조(提調)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김신국을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고 병사(兵事)에 뜻이 있다”라고 하여 군색랑(軍色郞)으로 임명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또한 무신으로 재주가 있는 자를 발탁하여 병서와 진법을 가르치고자 김신국을 추천하였는데, 유성룡이 남인임을 고려하면, 김신국이 당색과 관계없이 무재(武才)를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인조대의 국방 전문가
국방에 대한 김신국의 탁월한 능력은 광해군대인 1613년(광해군 5) 평안도관찰사를 맡으면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그는 후금이 필시 침략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계책으로서 진관을 설치하고(置鎭管), 조련을 밝게 하고(明操鍊), 군율을 엄히 하고(嚴軍律), 사기를 장려하고(勵士氣), 상 주기를 중시하고(重賞貧), 기계를 수선하고(繕器械), 전마를 공급하는(給戰馬) 7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김신국은 방어의 도는 큰 것에 있지 않고 착실히 준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병법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기다리고 편안한 것으로서 수고로운 것을 기다린다(以主待客 以逸待勞)”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김신국은 광해군대에 변방의 임무에 밝은 인물이 등용되는 비변사 당상(堂上)에 강홍립(姜弘立) 등과 함께 추천되었으며,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평안도관찰사에 즉각 기용되는데, 이것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그가 국방에 대한 실무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38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인조의 명을 받아 강화도의 형세에 대해 보고한 후 바로 강화유수를 제수받았다. 김신국은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임을 강조하고, 남한산성이 방어처로서 부적절함을 지적하였다. 김시양이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이 조선의 보배라고 한 데 대하여, 김신국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남한산성 때문이라면서, 병자호란 당시 군권을 장악했던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등의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신국은 국방 강화를 위해서는 성책(城柵)의 설치와 함께 무엇보다 병농일치(兵農一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김신국은 “여러 도로의 병사 5, 6만을 나누어 10번(番)으로 하고 항상 5, 6천으로 3개월마다 성에 들어가게 되면 30개월이 일주기가 됩니다. 2월부터 7월까지는 더하여 2, 3천 명으로 농경의 보조로 삼습니다. 무릇 농가 1인이 농사지으면 족히 2, 3인의 식량이 됩니다. 만약 7,8천 명으로 비옥한 토양에서 밭갈기를 하면 2만 인의 종세(終歲)의 식량이 가히 판별됩니다. 봄에 밭을 갈고 한가할 때 전투를 가르치고 5, 6천인을 장기간 주둔하게 하여 오직 무기를 연습하고 계기를 수선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다시 번갈아 훈련하면 3년에 5, 6만 인이 모두 가히 쓸모가 있는 병사가 됩니다. 식량과 곡식이 2만 명의 식량을 족히 공급할 것을 기다려 더욱 병법에 힘을 써야 합니다. ...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토지로 인하여 제승(制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병농일치에 의한 제승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병농일치론은 조선초기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에 의해 제기된 이래 부분적으로 논의되다가 인조 5년에는 한준겸, 이시발 등이 전결출병(田結出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병농일치의 논리를 구체화시켰다. 유형원은 ‘병농의 분리는 막대한 해악이다’라는 인식하에 사경일병(四頃一兵)을 원칙으로 하는 토지제도의 정비, 엄정한 보인제(保人制)의 부활과 정비를 주장하였는데, 김신국의 견해와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김신국의 병농일치론이 전시(戰時)에 제승하려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하여, 유형원의 그것은 당시 사회경제의 모순을 토지제도의 광범한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화폐 유통과 은광(銀鑛)의 개발
조선시대에 주조된 상평통보. 상평통보는 숙종대에 이르러 널리 유통되었다. 여기에는 양란 이후, 빈약한 농업생산에 기반을 둔 국가재정의 궁핍을 극복하려는 김신국과 같은 선구적 관료의 역할이 지대했다. <출처: (cc) Lawinc82 at ko.wikipedia.org>
광해군대에는 특히 전란을 겪은 후 이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와 국부(國富) 증대 방안이 구가의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부 증대를 위한 화폐 주조와 광산 개발, 유통 경제에 대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김신국은 광해군대인 1619년부터 1623년의 인조반정까지 4년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이러한 정책의 추진에 핵심에 섰다. 김신국은 호조판서로 임명된 직후 ‘식화(食貨)는 왕정이 먼저 할 바이며 축적(蓄積)은 생민의 대명(大命)’이라는 인식하에 은광 개발과 주전(鑄錢)의 통용을 건의하였다.
정권이 교체된 인조대인 1625년, 김신국은 다시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가 다시 발탁된 데에는 광해군 후반 정치적으로는 큰 혼란이 있었지만 경제정책은 안정성을 유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신국은 그해 국용을 절제하고(制國用), 전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며(行錢幣), 바다의 이익을 거두는(收海利)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1)김신국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구입액을 고려하여 비용을 절약함)의 철저한 이행과 서리(胥吏)들의 이익추구 방지가 국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기본임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폐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2)임진왜란 후 시장의 발달, 대동법의 확대에 따른 조세의 금납화, 명나라의 화폐유통에 따른 직ㆍ간접적인 자극은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선조 연간부터는 화폐의 적극적 유통을 주장하는 이덕형, 유몽인, 이수광(李睟光) 등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났다.
- [인조실록] 인조 3년 10월 27일
- [후추집(後瘳集)] <호조판서시상차(戶曹判書時上箚)>
그런데 경제의 총책임자로서, 국가적 정책 차원에서 화폐의 유통을 건의하고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김신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김신국이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건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빈약한 농업생산에 경제기반을 둔 국가재정의 궁핍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김신국의 경제정책은 양전(量田)의 철저한 시행으로 농업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바탕에서 국가의 비용을 절감하는 절제와, 생산 확대를 통한 국부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이었다. 이것은 화폐유통과 함께 국용을 절제하고, 어업과 염업과 같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이익을 국가재정으로 적극 확보하려는 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김신국은 고려 성종대 이래로 화폐를 사용한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한 후, 외국과는 달리 우리만 쌀이나 옷감으로 유통한다면 백성이 곤궁해지고고 국가가 가난해진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주식환무지법(酒食換貿之法)’을 제정하여 배고픈 사람들이 동전을 가지고 시장에서 쉽게 술 마시고 먹을 수 있게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때 동전 사용의 묘미를 알 것이라 하였다. 김신국의 건의는 인조에게 수용되어, 그해 11월에 호조의 요청으로 인경궁(仁慶宮)에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고 동전의 주조 사업에 착수하였다. 김신국은 성중에 가게를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동전으로 사고팔게 하는 등 동전 유통의 현실성까지 미리 검토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강화, 교동, 연백 등 개성을 중심으로 중국 동전이 원활히 유통되고 의주와 안주 등 중국 접경지역에서도 동전이 유통되었다. 이후 숙종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전국에 널리 유통되는데, 이러한 유통의 기반에 김신국과 같은 선구적인 관료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화폐유통과 함께 김신국은 1627년 5월 단천 은광의 개발을 건의하였다.3)임진왜란 이후 은광을 개발하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우선 부족한 전쟁 물자의 조달을 위해 은의 개발이 필요했고, 중국 사신들의 조선 은에 대한 광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그 관심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제교역의 측면에서도 중국의 비단, 조선의 면포 및 은, 일본의 구리 및 은 등이 주요 교역 물품으로 등장하면서 무역의 중요한 결제 수단이 되었다.
- [인조실록] 인조 5년 5월 5일
16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은은 대부분 명으로 유출되는 상황이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명에서 조선에 은을 내려주고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군량과 군수조달 비용, 군공에 대한 포상 등을 모두 은으로 충당함으로써 국내에는 중국 은화가 크게 퍼졌다. 조선은 군수물자를 현물로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의주의 개시(開市)를 통해 요동 등지에서 구입해오는 것이 모색되었는데, 그 결제 대금으로 은이 필요하였다. 은광 개발은 당시로 보면 조선이 세계 경제의 흐름에 발을 맞추는 것이기도 했다. 16세기 이후로 은광개발을 주장한 주요한 인물로는 김신국을 비롯하여 정인홍, 이덕형, 박홍구, 유몽인, 이수광 등을 들 수 있는데, 거의가 북인계 관료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생을 국부(國富) 증진에 헌신하다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는 화폐수단이 절실히 필요한 단계에 와 있었다. 특히 전란 이후 은의 유입과 유통은 화폐의 필요성을 절감시켰고, 궁극적으로는 동전의 주조와 그 유통의 시행을 자극하였다. 김신국은 농업경제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당시 사회의 전환기적 경제상황을 인식하고 화폐유통의 실현과 은광채굴, 호패법 실시, 어염의 이익 수취 등 현실 가능한 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김신국은 국경방어의 핵심인 평안도관찰사를 광해군과 인조 양대에 걸쳐서 역임하였고, 중앙 경제의 책임인 호조판서를 역시 양대에 걸쳐 수행하면서 관료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지방의 관직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실제 체험한 바탕 위에서 정책을 추진하였기에 그의 정책은 많은 부분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실무 능력은 정치적ㆍ사상적 변동을 수반한 인조반정에 이후에도 그를 일관되게 정책 추진의 핵심에 서게 한 요인이었다.
김신국은 양란 이후 사회 재정비의 방향을 농업경제보다는 상공업 중시 쪽으로 설정, 국부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경제정책은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조치를 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김신국이 평생토록 역점을 둔 실용 중시와 국부 증진 정책은,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의 창출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된 현재에도 그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최근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들이 능력 문제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례를 여러 차례 접하였다. 정부가 바뀌어도 탁월한 실무능력으로 국정의 중심이 될 관료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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