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당대의 생활, 제도, 풍속, 인물의 모든 것을 용재총화에 담다 - 성현

히메스타 2016. 8. 23. 09:25

 

성현 이미지 1

성현(, 1439~1504) 하면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을 편찬한 대표적인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성현의 진면목은 당대의 풍속과 제도, 인물에 대해 모든 것을 정리한 [용재총화()]가 대변해 준다. [용재총화]를 중심으로 성현의 생애와, 15세기 학자 성현이 기억한 조선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성현은 누구인가?

 

성현은 조선전기 세조부터 연산군 시대를 살아간 학자이자 예술인이었다. 성현의 저술로는 [용재총화] 이외에 [악학궤범], [허백당집], [부휴자담론()] 등이 전하여 그가 여러 분야에 해박한 학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중 [악학궤범]이 가장 유명하지만, [악학궤범]의 유명세는 성현이 저술한 다양한 저작들의 존재를 묻히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현의 자는 경숙(), 호는 용재()ㆍ허백당() 등을 다양하게 사용했고, 시호는 문재()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창녕 성씨는 고려말과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고조부였던 성여완()은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냈고, 창녕부원군 성여완의 세 아들 성석린(), 성석용(), 성석인() 형제들에게서 가문이 번창했다. 그러나 성현의 집안은 성석린과 성석용의 아들들이 모두 사육신 사건과 연루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다행히 성석인 계통은 화를 면하였고, 성엄()과 성념조()가 다시 가문을 부흥시켰다. 성현의 작은 아버지 성봉조()는 세조와 동서() 사이가 되면서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성씨()만한 집안도 없다’고 하여 가문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성현의 가계도. 주요 인물만을 기록하였다.

성현은 1439년(세종 21)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념조와 순흥 안씨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외가인 순흥 안씨 또한 명문가로 그의 어머니는 안유()의 손녀이며, 그의 처가는 한산 이씨로 부인이었던 이씨는 목은 이색()의 현손녀이기도 했다. 성현이 태어난 곳은 확실하지는 않고, 현재의 아현동 약현성당 근처 약전에서 주로 살았다. 12세에 부친을 잃고 18세 차이가 나는 큰형 성임(, 1421~1484)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다. 성현은 어린 시절 김수온()을 비롯하여 형들의 친구인 강희맹(), 서거정()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성현은 특히 김수온에게서는 음악을, 강희맹에게서는 그림, 서거정에게서는 문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현은 강희맹, 서거정 등 훈구파 학자들의 영향 속에 성장하여, 후에는 당대의 사림파 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김종직(), 유호인()과도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2년(세조 2년) 성현은 2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진출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30세로 경연관이 되었는데, 형 성임을 따라 명나라 북경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다. 명나라에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는 이후 [관광록()]으로 엮었다. 1475년(성종 6)에는 한명회()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왔는데,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은 성현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은 더욱 탄탄해졌다. 1488년(성종 19)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명나라 사신 동월()과 왕창()을 접대하면서 시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성현의 시는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는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당시 유자광은 ‘경상도관찰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장악원의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라며 성현의 음악적인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고, 결국 성현은 예조판서와 장악원제조를 겸직했다. [악학궤범()]은 이때에 편찬한 것이었다. 연산군 즉위 후 성현은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으며, 1504년에 [용재총화()]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다.

성현은 기질이 호방하고 장난을 잘 쳐 “미친 듯 어지럽다”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유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용재총화]의 서문에서는 “심심풀이로 보기에 족하다”고 표현하여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용재총화]에 담았음을 표현하였다.

[용재총화]의 저술 배경

 

[용재총화]는 말 그대로 ‘총화()’로, 저자 성현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역대로부터 조선 성종대 성현이 살았던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 관한 사항까지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저술로서 가치가 있는 점은 성현이 살고 있던 당대 조선사회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는 점이다. 성현은 평소 여러 책을 섭렵하고 여행하기를 좋아했으며, 네 차례나 중국에 사행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가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패관잡기류의 전통을 이어받아 관직 생활, 풍속, 인물, 생활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형님들이 패관잡기를 저술한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성현의 큰 형인 성임은 중국의 [태평광기()]를 정리하여 [태평통재()]를 간행하였으며, 둘째 형인 성간 또한 성임과 함께 집현전 시절 많은 골계류와 패설류를 읽었음이 확인되고 있다.1)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현 또한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모아 [용재총화]를 편찬할 수 있었다.

[용재총화]에는 전설과 민담, 소화(), 전기 소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설과 민담은 비현실적인 내용이 주가 되는데, 성현이 유학자인 점을 고려하면 소재의 선택이 매우 자유로움을 볼 수가 있다. 소화나 일화는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속임을 당하거나 조롱당하는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화는 성현이 살아갔던 시대의 주요한 사건과 인물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것으로, 성현이 현실을 보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1456년에 일어난 단종 복위운동을 ‘병자지란()’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현의 훈구파적인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현은 성종대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 중 한 사람이었고, 조선의 대표적인 음악이론서인 [악학궤범]을 저술한 만큼, 국가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다. 16세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최립()은 그의 문집인 [간이당집]에서 ‘국조()의 문장은 비교적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오직 점필(, 김종직)ㆍ괴애(, 김수온)ㆍ사가(, 서거정)ㆍ허백(, 성현) 등 서너 분의 공만이 대가의 대열에 끼인다고 일컬어져 올 뿐이다.’2)라고 하여 성현을 높이 평가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조선사회 모습을 기록에 담다

 

성현의 [용재총화]. 고려부터 조선 성종대까지의 문물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등 풍속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10권에 담았다. 조선전기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용재총화]는 총 324편의 글이 10권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각 권은 편차() 없이 서술되어 있으며, 일정한 주제가 없이 구분되어 있다. 저자가 평소에 쓴 글을 자유롭게 모아 둔 형식이다. 내용은 고려로부터, 성현이 생존했던 조선 연산군대까지 형성되고 변화된 민간 풍속을 비롯하여 문물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종교, 문학, 음악, 서화 등 풍속과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인물에 관한 일화는 [용재총화]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여 당대의 6인물 평가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1권의 첫 부분은 경학()과 문장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역대의 문장가, 서예가, 화가, 음악가를 기록하고 있다. 문장가뿐만 아니라 화가와 음악가의 비중이 많은 것이 주목되는데, 예술인도 중시했던 조선전기 지성사의 분위기를 엿볼 수가 있다. 성현은 예술가의 조건으로 타고난 자질을 중시하였다. ‘물상()을 묘사하는 것은 하늘에서 타고난 재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할 수 없다.'거나, '음악은 여러 기술 가운데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다. 타고난 자질이 있지 아니하면 그 진취를 얻을 수 없다.'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

1권에서는 한양의 명승지에 대한 기록이 있어 주목이 된다.

한성 도중()에 좋은 경치가 적기는 하나 그 중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다음이며, 쌍계동()ㆍ백운동()ㆍ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 계림제() 북쪽의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를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가 된다. 물이 벼랑 사이로 쏟아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듯한데,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과 같다. ... 인왕동은 인왕산 밑에 있는데, 굽이쳐 도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복세암()은 골짜기 물이 합쳐서 시내를 이루는 곳이며,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 성 밖의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내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속에 여제단()이 있으며, 그 남쪽에 무이정사()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 돌을 쌓은 것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을 이루고 절 앞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차일암()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 같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둘렀던 우묵한 곳이 있다. 바위가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으며, 흐르는 물이 어지러이 쏟아지는데, 맑은 날의 우레처럼 귀를 시끄럽게 한다. 물은 맑고 돌은 희어 선경()이 완연()하니, 와서 노는 사대부들이 그치지 않는다.

위의 기록을 보면 성현이 살았던 600년 전 한양의 명승지가 지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이 명승지로 묘사한 삼청동, 인왕산, 세검정 일대의 지역은 18세기 정선의 화폭에도 자주 등장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서울에서 비경을 간직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승정원, 집현전, 홍문관 등 주요 관청의 역사와 관청에 담긴 일화를 비롯하여 과거제도의 구체적인 모습, 신참례()와 같은 풍속까지 세밀히 기록하여 당시 생활사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담은 점은 [용재총화]의 가치를 더욱 높게 한다. 신참례에 관한 기록을 보자.

옛날에 신입자(: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를 제재한 것은 호사()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용()이라 하고, 닭이면 봉()이라 하였으며, 술은 청주이면 성()이라 하며, 탁주이면 현()이라 하여 그 수량도 한이 있었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참()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구관()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면신()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관( 성균관ㆍ예문관ㆍ승문관ㆍ교서관)뿐만 아니라, 충의위()ㆍ내금위() 등 여러 위()의 군사와 이전()의 하급인들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동좌()를 불허하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악()이 없으면 간접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끝이 없다.

신참례는 특히 오늘날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용재총화]에는 ‘감찰이라는 것은 옛날의 전중시어사(殿)의 직책인데,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자가 방주()가 된다. 상ㆍ하의 관원이 함께 내방()에 들어가 정좌하며 그 외방()은 배직한 순위에 따라 좌차()를 삼는데, 그 중에서 수석에 있는 사람을 비방주()라 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귀()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보인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한 긴 나무를 귀()로 하여금 들게 하는데, 이것을 경홀()이라 하며 들지 못하면 귀는 선생 앞에 무릎을 내놓으며 선생이 주먹으로 이를 때리고,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으로 내려간다. 또 귀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가 연못에 들어가 사모()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러워진다. 또 거미 잡는 놀이를 하게 하는데, 귀로 하여금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지르게 하여 두 손이 옻칠을 하듯 검어지면 또 손을 씻게 하는데, 그 물이 아주 더러워져도 귀로 하여금 마시게 하니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사헌부에서 특히 신참례가 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현은 궁중에서 행해지던 처용희(), 나례(: 귀신을 쫓는 의식)을 비롯하여 민간에서 행해지던 세시 풍속까지 상세히 적고 있다. 성현은 세간에 유행하는 풍속들과 함께 세속의 고사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들 이야기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속담에 “아침에 마신 술은 하루의 근심이요, 맞지 않는 가죽신은 1년의 근심이요, 성질 나쁜 아내는 평생의 근심이다.” 라는 말이 있으며, “배가 부른 돌담과 말 많은 아이와 헤픈 주부는 쓸모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은 비록 속되나 역시 격언이다.’고 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3권부터는 인물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시중 강감찬()이 늙은 중으로 변한 호랑이를 쫓아낸 이야기, 신돈()의 호색(), 최영의 홍분(: 풀이 없는 벌거벗은 무덤), 정몽주의 죽음 등 고려시대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성종대 최대의 성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어우동의 이야기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소경의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통간한 이야기, 처녀의 음란한 시 등 유학자가 그대로 기록하기 힘든 이야기를 많이 싣고 있다. 이것은 성현이 유학자이면서도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음식과 남녀관계는 인간의 큰 욕망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해 있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자유분방한 유학자 성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용재총화]에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지만, 승려들과 문인들의 교류와 같은 내용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서 불교에 대한 배척이 심하지 않았던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빙고(), 온천, 여의(), 독서당, 활자의 종류, 토산물, 일본의 풍속, 야인의 풍속 등 흥미로운 소재 선택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용재총화]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성현의 기록정신이다. 당대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걸러냄 없이 그대로 서술하여 사회상을 정확하고 역동적으로 보여 주었다. ‘술이부작()’의 관점을 견지함으로써, 유교적 이념에 걸맞는 이야기들만 골라내 수록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의 기록과 차별성을 보이는 점은 [용재총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동안 성현의 모습은 [악학궤범]의 저자로서 조선전기 음악을 집대성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용재총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유롭게 당대의 모습을 전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인 편찬 사업을 책임질 만큼 큰 비중을 지닌 유학자였지만, 성현은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풍속과 생활, 제도, 일화, 사람들의 생각을 [용재총화]에 담았다. 성현과 같은 인물이 재조명되고, 그의 저술이 폭넓게 활용된다면 조선전기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보다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