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중 일 기
(이순신 지음/ 역자 송찬섭)
□ 작가소개
- 이순신(李舜臣1545∼1598)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외가인 충남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1576년(32살) 무과에 합격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함경도는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다. 특히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기습해온 여진족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 선전했지만, 병사 이일이 그를 나쁘게 평가해 결국 백의종군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됐다.
임진왜란 동안 그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면서 수많은 해전을 치뤘다.(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당항포해전,부산포해전 등)
- 송찬섭 역자(1956~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대학 박사학위 받음 1985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1862년 농민 항쟁, 우리 역사를 찾아서, 농민전쟁 100년의 인식과 쟁점, 한국사의 이해, 길은 사이에 있다,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농민이 난을 생각하다>등이 있다.
□ 책 소개
이 책은 임진왜란 7년 동안(1592년~1598년)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전란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史料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상뿐 아니라 조선 수군 연구와 전략, 전술에
대한 기록이다.
중앙과 감영·수영·읍진을 잇는 통치 체계, 제찰사·순찰사·순변사·수사·만호 등의
군령 체계, 그 밖에 각종 어사·선전관·의금부도사 등 중앙 관리가 파견되어 통제하는 실상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통해 당시 국방 운영 체계와 그러한 일을 책임진 유성룡, 이원익, 이수광, 유몽인, 윤두수,남이공,박홍로 등의 전쟁 중 활동도 볼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반 병사의 활동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수군 자체가 천한 역이었듯이 병사들은 천민이 많았다.
거북선을 만들거나 활, 화살, 총포 등 군기를 만들던 장인들의 활동, 심지어 그가
고심하여 잠 못 이룰 때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어 주며 위로하였던 부하들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관직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참여한 의병들도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시대 천대받던 승려들이 만든 의병 부대 그리고 성응지 등 여러 의병 부대가 나온다.
또 군량을 조달하거나 둔전을 경영하는 등 수영의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 책의 내용
○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하였다.
그는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으며 이듬해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592년 4월 마침내 우려했던 왜군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5월에 옥포·합포·적진포에서, 6월에 당포·당항포에서, 7월에 한산도·안골포에서, 9월에 부산에서 연이은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이순신도 그 공으로 정2품까지 승직되었다.
○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이순신은 1593년에 들어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시키고,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통하였다.
7월에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전쟁 물자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공에 힘입어 이순신은 8월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한산도는 그 뒤 1597년 파직될 때까지 그의 활동의 중심지였다.
○ 1594년 명·일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3월에 당항포 등 싸움에서 이겼다. 명나라 수군이 구원을 구실로 들어왔으나
싸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같은 명나라의 태도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육군의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거제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럼으로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전쟁은 뜸했으나 이순신은 여전히 다가울 싸움에 대비하였다.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준비하고 배와 무기를 만들고 제조하였다. 활쏘기를 하면서 단련하기도 하였다.
아직 웅천 등지에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였다.
그런 중에도 견내량 등지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전쟁은 소강 상태가 계속되고 이순신은 왜적의 동향을 실피며 공무를 처리하고
군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신경을 썻다.
4월 들어 왜적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군졸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훈련을 계속하는 한편, 전라 일대를 꼼꼼히
순시하며 대비하였다.
○ 1597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관직은 파직되고 서울로 끌려가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약 한달 만에 특사되어 고향 아산을 거쳐 쳐계로 내려와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7월에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모은 전선 13척으로 9월 명량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는
10월 고하도에 수군 진을 설치하였다.
○ 1598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2월에 이순신은 다시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전쟁은이제 막바지로 치달았다. 7월에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이 내려와서 함께
연합 함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11월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달아나는 적을 쫒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요 약
『난중일기』는 짤막짤막한 문장을 통해, 때로는 서정적인 시구를 통해 이순신
자신의 인간적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낸다.
7년간의 진중 생활 중에는 반복적인 일기도 많다. 그러나 그 속에 그의 사상, 생애, 활동의 진면모가 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
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 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켤코 용서하지 않겠다.” 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난중일기』속에는 그러한 이순신의 여러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
이순신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중에서 그는 늘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어머니로부터의 소식이 늦거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순신은 종종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다.
1593년 5월4일 일기에 이순신은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모함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풀려나와 백의종군 길을 가던 중에 어머니
상을 당한, 1597년4월19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아들과 조카에 대해서도 항상 염려와 따뜻한 보살핌을 보냈다.
아들 열이 병에 걸리자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면이 적과 싸우다 죽자 그는 울부짖으며 슬퍼했다.
이순신이 보살핀 것은 그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그의 군사나 동료, 궁핍한 백성들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1596년1월23일 일기를 보면, “아침에 옷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라고 쓰여 있다.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1597년 5월 13일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라는 글도 있다. 그의 군사가 백성의 것을 훔쳐 먹었을 때는 엄하게
말하고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이순신은 늘 걱정이 많았다. 그는 오랜 진중 생활 중 때때로 부하들과 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하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다. 전쟁 중이라 바다 위 생활을 오래 하고, 육지에 내려오기가 무섭게 배를 만들고 군비를 정비하고 틈틈이 둔전까지 경영하는 동안
이순신은 병이 끊이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아프거나 구토, 설사,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일 또한 한두번이 아니었다.
때때로 잘 못 먹는 술에 흠뻑 취하여 고통을 겪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일기를 읽다 보면 이순신이 점을 치는 장면이 많은 것도 드러나는데, 그가 점을 많이 치는 것도 힘들고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위로받고자 했던 것 같다.
이순신은 아들 면이 아프다는 소식에 점을 치고는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거나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라는 괘를 얻고는 좋아했다.
또 아내에 대해서도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거나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 같다.“는 괘를 얻고 좋아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유성룡을 걱정하며 점을 치기도
하였다.
전쟁의 상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이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꿈을 꾸고는, 점을 쳐서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는 갓이 발길에 걷어채는 것으로서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풀이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이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기를 보면 그가 원균을 나쁘게 본 데는 대개 그럴 만한 근거가 따르기는 한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그럼에도 그가 영웅으로 불려진 데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면서도 그가 관장한 고을의 공문이나 백성들의 소장을 처리했다. 시간을 미루지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 4월에 임란이 일어났는데. 그 직전인 2월에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어용 성과 못 그리고 봉수대 등을 수리하였다.
전라좌도에 속한 여러 고을과 진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병선을 수리하지 않거나,
무기를 만들고 관리함에 있어 잘못이 있으면 책임자를 엄하게 처벌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도 철저히 하였다. 특별히 날씨가 나쁠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군관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그 자신도 공무를 마치면 수시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활쏘기는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이순신은 전쟁에서 화학 무기가 승패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임을 알고,
전쟁 전에도 또 전쟁 중에도 무기 개발에 힘썼다. 이순신이 일본의 조총을 본뜨고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새로이 정철총통을 만들어 자랑스럽게 비변사에 올려 보내는
날의 일기는 사뭇 즐거움이 묻어난다.
이순신과 절대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 거북선 건조도 그러한 준비로부터 가능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전함은 그 성능이 대단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왜선 수십 척이 우리나라의 전선 한 척을 당하지 못한다.”
했다.
전래로부터 내려오던 판옥선을 비롯한 조선의 배는 거북선이다.
1591년 전라 좌수사가 되었을 때 이순신은 전쟁을 직감하고 새로운 배를 만드는 일에 힘썻다.
그 배는 판옥선과 같은 한선 위에 쇠로 된 뚜껑을 만들어 덮었으니,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았다. 배의 이름은 자연스레 거북선이 되었다.
거북 모양의 돌격용 전선은 사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것은 ‘이순신’이다.
거북선이 적선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포를 쏘면 왜적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면 이순신은 판옥선을 비롯한 모든 배들을 일제히 출격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체로 이 승리는 거북선에 의한 것이었다. 그간 무서울 것 없이 쳐들어왔던 적
수군을 경상도 남해안에 꽁꽁 묶어 두는 계기가 되었던 한산대첩 또한 거북선에
힘입은 바 크다.
이순신은 전술에 밝았고,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알았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여러 지휘관이나 부하들에 대한 평가도 매우 철저하였다.
이순신을 비롯하여 정운,어영담,김인영,나대용,권준,배흥립,이언량 등은 그의 충실한
부하 지휘관이었다. 이순신은 그들의 활약을 칭찬했고 그들의 죽음에 몹시 슬퍼했다.
그러나 함부로 도망간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형하였으며 아군의 위급을
못 본 체하는 자에 대해서도 냉혹하게 벌했다.
1597년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1백여 척의 전함이 모두 깨어지고 바다 속에 가라앉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 다시 통제사가된 이순신은 거의 초토화된 수군을 수습하여 한 척의 거북선도 없이 오직 전선13척을 가지고 명량 싸움에 나섰다. 그때 적의 함대 수백 척을 보고 겁을 먹은 거제 현형 안위가 도망하려 하자 이순신은 뱃전에서 그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결국 안위는 싸움에 앞장섰고, 대패할 것만 같았던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그 이듬해 11월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 노량 싸움 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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