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o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모든 길은 다 갈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
o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o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 꽃피는 해안선 - 여수 돌산도 향일암 >
o 자전거는 길 위에서 겨울을 났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o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o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
처럼 보인다.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
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o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번져 있다.
-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o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
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에 떨
어진다.
-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
은 느리고도 무겁다.
o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o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꽃은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봄빛 부서지는 먼 바다를 쳐다본
다. 바닷가에 핀 매화 꽃잎은 바람에 날려서 눈처럼 바다로 떨어져 내린다.
o 봄은 숨어 있던 운명의 모습들을 가차없이 드러내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봄빛 속에서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 춘수(春瘦)다.
o 13세기 고려 선종 불교의 6세 조사로 지눌 문중의 대선사였던 충지는 산사의 어느
봄날에 시 한 줄을 썼다.
- 아침 내내 오는 이 없어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 이것은 깨달은 자의 오도송(悟道頌)이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의 봄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o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薛瑤)는 시 한 줄을 후세에 남겼다.
-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 이 젊은 여승의 몸은 꽃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
을 써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한문학자
송종섭은 이 시에 대해서 “아, 한 젊음을 늙히기에 저리도 힘듦이여!”라고 썼다.
< 흙의 노래를 들어라 - 남해안 경작지 >
o 봄의 흙은 헐겁다. 남해안 산비탈 경작지의 붉은 흙은 봄볕 속에서 부풀어 있고,
봄볕 스미는 밭들의 이 붉은 색은 남도의 봄이 펼쳐내는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깊다.
- 이 붉고 또 깊은 밭이 남도의 가장 대표적인 봄 풍광을 이룬다.
- 밭들의 생김새는 “뱀과 같고 소 뿔과 같고 둥근 가락지 같고 이지러진 달과 같고
당겨진 활과 같고 찢어진 북과 같다”(목민심서)라고 다산(茶山)은 말했다.
o 그 경작지에서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하게
풀리면서 열린다.
-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오른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
나는 물의 싹이다.
o 봄 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o 겨울을 밭에서 나는 보리는 이 초봄 흙들의 난만한 들뜸이 질색이다. 한창 자라날
무렵에 헐거워진 흙들이 뿌리를 꽉 껴안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o 새로 돋아난 봄 냉이를 엷은 된장에 끓인 국이 아침 밥상에 올랐다.
-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속에서 새로운 천지를 열어주었다. 기쁨과
눈물이 없이는 넘길 수가 없는 국물이었다.
- 몸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풀이 돋는 것 같았다.
o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 된장은 국 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고 원형질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o 사람은 새처럼 옮겨 다니며 살 수가 없으므로 이 기진맥진한 강가에서
또 봄을 맞는다. 살아갈수록 풀리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은 점점 더 고단하고
쓸쓸해진다.
- 겨우, 그러나 기어코 봄은 오는데, 그 봄에도 손잡이 떨어진 냄비 속에서
한 움큼의 냉이와 된장은 이 기적의 국물을 빚어낸다. 사람도 봄나물처럼
엽록소를 피부에 지니고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냉이된장국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o 달래는 냉이와 한 짝을 이루면서도 냉이의 반대쪽에 있다. 똑같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태어났으나 냉이는 그 고난으로부터 평화의 덕성을 빨아들이고,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끝을 만들어낸다. 달래는 기름진
땅에서는 살지 않는다.
-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는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달래는 인간
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o 달래와 냉이는 그렇고, 쑥된장국은 또 어떤가.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
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으로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o 재첩은 콩알만한 크기의 민물 조개다. 섬진강 아랫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그
국물의 색깔은 봄날의 아침 안개와 같고, 그 맛은 동물성 먹이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의 맛이다.
- 차마 안쓰러운 이 국물은 그 안쓰러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데워준다.
o 쑥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으로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o 미나리는 전혀 종자와 근본이 다르다. 겨울 강가의 얼음 갈라진 틈으로,
이 새파란 것들은 솟아오른다.
- 미나리에는 출신지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가 묻어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 미나리의 맛은,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의 맛이다. 맛의 질감으로 분류한다면
미나리는 톳나물이나 두릅나물에 가깝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 지옥 속의 낙원 - 식영정, 소쇄원, 면앙정 >
o 무등산은 삶 속의 산이다. 세상이 끝나는 곳에서 솟아오른 산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와 있는 산이다. 산이 세상을 안아서, 산자락마다 들과 마을을 키운다.
이 산은 부드럽고 넉넉하다.
- 무등산은 월출산처럼 경쾌하게 흔들리지도 않고, 팔공산처럼 웅장한 능선의
위용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무등산은 서울의 북한산처럼 하늘을 치받는 삼엄한
골세(骨勢)와 돌올한 기상을 보이지 않는다. 이 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 요약자 주: <돌올한> - 높이 솟아 우뚝하다. 빼어나다.
o 정자는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이다. 정자는 삶과 격절된 자리도
아니고 삶의 한복판도 아니다. 정자는 처자식 출입 금지 구역이지만, 정자에서
놀 때 처자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 정자의 위치는 세상을 깔보지도 않고, 세상을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정자의 내부 구조와 원림(園林) 내의 공간 배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도 않는다.
-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o 시선의 일방성에는 폭력이 숨어 있다. 이 폭력도 근대성의 일종이다.
소쇄원에는 공간의 중심이 없다. 소쇄원의 정자들은 좌향이 어긋나 있고, 면앙정은
그 아래로 펼쳐진 담양 들판을 정면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 정자에서는 시간이 공간을 흔든다.
o 담양의 옛 정자들 중에서, 아마도 죽림재가 가장 유가적(儒家的)이고,
식영정이 가장 도가적(道家的)이지 싶다. 식영정의 격절감은 차갑고 우뚝하다.
o 400년 후에 자전거를 타고 온 한 후인의 눈에 이 정자들과 낙원의 서늘함은
불우하다. 소쇄원·식영정뿐 아니라, 다른 많은 정자들도 그 불우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불우한 자들이 낙원을 만들고 모든 낙원은 지옥 속의 낙원이다. 소쇄원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o 멀리서 보면 담양의 대숲은 들판에 흩어진 섬과 같다. 봄의 대숲은 연두색이다.
- 대숲은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봄의 대숲은 자작나무숲이나 오리나무숲처럼 생명
의 기쁨으로 자지러지지 않고, 여름의 대숲은 다른 활엽수처럼 비린내 나는 습기
를 내뿜지 않는다. 대숲은 늘 스스로 서늘하고, 잘 말라서 질퍽거리지 않는다.
대숲은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하다. 이것이 몽밀(蒙密)이다.
- 대나무로는 무기도 만들고 악기도 만든다. 대나무로는 연장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사군자도 친다.
o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 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도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이 핀다. 꽃이 피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 대꽃은 흉흉하다. 담양의 노인들은 “대꽃이 피면 전쟁이 난다.”라고 말한다.
< 망월동의 봄 - 광주 >
o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고 광주 시인 김준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
매일> 지면에서 통곡했다. 그 시를 발표하고 김준태와 편집국장 문순태는 종적을
감추었다.
- 광주에서, 그때의 피해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핥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o 5·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이 연극으로 꾸며져 광주 공연을 앞두고 있고,
시인 황지우는 <5월의 신부>라는 시극(詩劇)을 무대에 올린다.
- 임철우는 이 시대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한지를 고통스럽게 묻고 있고,
황지우는 치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산 자의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o 목발을 짚고 꽃가게를 경영하는 총상 피해자 이세영 씨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 “깨어진 구둣가게 꿈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목발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한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
< 만경강에서 - 옥구 염전에서 심포리까지 >
o 달이 하루에 두 번씩 물을 끌어당겨서 바다를 부풀게 하는 자연 현상과 달이
한 달에 한 번씩 여자의 목숨을 빨아당겨서 부풀게 하는 생명 현상이
모두 다 조(潮)이다.
- 밀물의 서해는 우주의 관능으로 가득 찬다.
- 내 조국의 서해는 어떠한 바다인가. 서해는 조국의 여성성이다.
o 동해로 흘러드는 강들은 날카롭게도 명징하고 눈부시다.
동쪽의 강들에는 산의 격절감이 녹아서 흐른다. 가파르고 빠른 강들이 일출을 향해
나아간다. 서해에 닿는 강은 들을 흐른다.
그래서 서쪽의 강들은 유장하고 아득하다.
크고 흐린 강들이 해 지는 곳을 향해 느리게 나아간다.
o 만경강은 아직도 파행(跛行)하는 자유의 강이다. 큰 댐이 없고, 하구언이 없고,
시멘트 제방이 없고, 강변도로가 없고, 수중보가 없고, 강가에 갈비 먹는
집이 없어서, 비틀거리면서 굽이치는 유역은 언제나 넓게 젖어 있다.
-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물러간 저녁 무렵의 파구에서, 강의 크나큰 자유는 아득한
갯벌 위에서 헐겁고 쓸쓸했다.
- 삼포리 바닷가에서 만경강은 동진강과 만나 바다와 합쳐지는데, 달이 물을 깊이
빨아당기는 사리간조의 만경강 하구에서 바다는 물의 바다가 아니라 갯벌의
바다였다.
- 간조와 만조 사이의 젖은 갯벌 위에서 저녁의 빛들은 비늘로 퍼덕거렸다.
o 서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긴다. 갯벌은 육지와 바다의 완충이며 진행형의 대지다.
갯벌은 오목하고 부드럽다. 바다 쪽으로 나아갈수록 갯벌의 입자는 굵어진다.
굵은 입자일수록 멀리 가서 가라앉아, 사람과 가까운 쪽이 가장 부드럽다.
o 공깃돌만 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 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와 방어 의지도 없이, 다만 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다의 새들이 부리로 갯벌을 쑤셔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을 때,
그것들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라 보시이다.
o 갯지렁이의 구멍은 밀물에 쉽게 쓸려서 갯지렁이는 끊임없이 흙을 뱉아내며
새 집을 지어야 한다. 갯지렁이의 이 기구한 무주택의 운명이 갯벌에 지속적으로
산소를 불어넣어, 갯벌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터전이 된다.
o 소금은 ‘소식’처럼 이 염전에 내려온다.
- 바람이 멎어서 물이 흔들리지 않고 햇볕이 가팔라서 물이 내려앉아야 좋은
소금이 온다. 좋은 소금은 알이 굵다. 햇볕과 바다의 정수가 소금알 속에서 고요히
머물고 있기에.
o 바다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로 소금은 탄생한다.
- 염전 사람들은 소금이 결장지 바닥에 엉기는 사태를 ‘소금이 온다’고 말한다.
소금은 멀리서 오는 소식처럼 조용히 결장지 바닥에 나타난다.
o 소금은 맛의 근원이다. 소금은 단지 짠맛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맛을 맛으로
살아나게 한다. 재래식 천일염에서는 쓴 소금을 가장 나쁘게 알고, 짠 소금이
그 다음, 짜고 또 향기로운 소금을 최상품으로 친다.
- 소금의 속성은 고요해야 한다. 짜고 향기로운 맛이 소금의 핵심부에 고요히 안정
되어 있어야 하고, 어떠한 잡것도 거기에 섞여서는 안 된다.
- 짠맛은 바다의 것이고, 향기는 햇볕의 것이다.
- 좋은 소금은 바닥에 달라붙지 않고, 모래처럼 서걱거린다.
o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뜨거운 폭양 아래서 짜고 향기롭고 굵은 소금은 익는다.
바람 부는 날의 들뜬 소금은 쓰다.
< 도요새에 바친다 - 만경강 하구 갯벌 >
o 저무는 만경강 하구 갯벌 위로, 새들은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새들은 살아서 돌아온다.
o 새 떼들 돌아오는 저녁 하늘에서, 이미 며칠 전에 이 갯벌에 당도했던 도요새의
종족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울면서 패거리를 불러모아 또다시 북행하는 발진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 그것들은 고향이 없으므로 타향이 없다.
o 갈대는 빈약한 풀이다.
바람 속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풀은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늙음을 간직한다.
그것들은 바람인 것처럼 바람에 포개진다. 그러나 그 뿌리는 완강하게도 땅에 들러
붙어 있다.
o 밥 먹기의 어려움은 도요새나 저어새나 대동소이하다.
- 도요새는 먹이를 조준하지 못한다. 도요새는 뻘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먹이를
덮어놓고 쪼아댄다. 어쩌다가 걸려드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먹이를 향해 쉴새없이 부리를 내리꽂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의 부리는 딱딱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민감하다. 부리를 무작위로 선택한 뻘흙 속에 찔러넣고 그 안에
넘길 만한 것이 들어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넘어가는 것보다 뱉어내야 할 것이
언제나 훨씬 더 많다.
- 저어새의 부리는 넓적하다. 밥주걱처럼 생겼다. 저어새는 이 넓적한 부리로
하루종일 뻘밭을 훑는다.
o 갈대는 바람과 더불어 피고 진다.
- 갯가의 풀들은 바다 쪽으로 갈수록 키가 작아진다. 갈대가 사람 쪽으로 가장
가깝고, 갈대숲 너머는 갯잔디, 그 너머는 칠면초, 그 너머는 퉁퉁마디이다.
밀물 때면 먼 풀들은 물에 잠기고, 새 떼는 갈대숲으로 날아든다.
o 바람 속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풀들은 빛나는 꽃을 피우지 않고, 영롱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 갈대나 억새가 그러하다.
- 갈대는 곤충을 부르지 않고, 봄의 꽃들처럼 사람을 유혹하지도 않는다.
- 갈대는 바람 부는 쪽으로 일제히 쓰러지고 바람의 끝자락에서 일제히 일어선다.
갈대는 싹으로 솟아오를 때부터 바람에 포개지는 모습을 갖는다.
- 갈대에게는 푸르른 기쁨의 시절이 없다. 갈대는 새싹으로 솟아오르는 시절부터
바람에 포개진다.
o 그것들은 어렸을 때부터 땅에 얽매인 채로 바람에 풍화되어 간다. 4월의 빛나는
산하에서는 겨울을 난 갈대숲이 가장 적막하다. 모든 씨앗들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묵은 갈대숲은 빈껍데기로 남아서 그 껍데기까지도 바람에 불려간다.
손으로 만지면 먼지처럼 바스라진다.
- 바다로 불려간 씨앗들은 다 죽고, 갯벌 위로 떨어진 씨앗에서 어린 갈대 싹들이
돋아나 다시 바람에 포개진다.
<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안면도 >
o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o 울창한 숲이 신성한 숲이 아니고, 헐벗은 숲이 남루한 숲이 아니다.
- 이 세상의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o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o 사람의 언어가 숲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숲이 사람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은 숲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숲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o 안면도의 소나무숲은 마을의 숲이다. 대문 밖이 숲이고, 밭이 끝나는 곳이 숲이고,
울타리 너머가 숲이다. 숲의 신성은 멀고 우뚝한 것이 아니라 가깝고 친밀해서
사람의 숨결을 따라 몸속으로 스미는 것임을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알겠다.
o 봄의 안면도에는 겨울을 다 지난 후에도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곧고, 높고, 힘센 나무들이 자존(自尊)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며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의 전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 그 소나무들은 음풍농월의 충동과는 거리가 멀다.
소나무들은 경건하고도 단정하다.
o 봄의 소나무숲은 다른 활엽수림의 신록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들떠 있지도 안다.
봄의 소나무숲은 겨울을 견뎌낸 그 완강한 푸르름으로 진중하고도 깊고 푸르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에게는 안면송(安眠松)이라는 고유명사가 있다.
o 안면도에서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이처럼 잘생긴 소나무숲이다.
안면도를 떠날 때 비가 내려, 젖은 숲은 젖은 향기를 품어냈다.
- 숲의 신성은 마을 가까이에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오대산의 전나무숲과
가리왕산의 단풍나무숲과 점봉산의 자작나무숲들도 일제히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o 안면도의 모감주나무숲은 지금 새의 붉은 혀와 같은 새싹을 내밀고 있다.
씨앗 한 개 속의 숲은 머지않아 푸른 잎으로 덮여서 어둡고 서늘할 것이다.
o 여름의 숲은 어둑신하고 서늘하다. 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민다.
o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의 숲이 더 값지다.
-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o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o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
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는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고 과학이다.
o 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오직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만
말하여질 수 있다.
서울의 산은 적막하지 않다. 서울의 산은 도심과 가깝고, 일상과 잇닿아 있다.
- 휴일의 산이 군중으로 뒤덮이는 인산(人山)이라 하더라도 산에는 여전히 적막과
일탈의 유혹이 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리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하다.
o 퇴계는 도피와 일탈로서의 산행을 나무랐다. 산속에서 ‘청학동’을 묻는 자들의
몽환을 퇴계는 꾸짖었다. 산에 가서 ‘안개와 노을을 마시고 햇빛을 먹으려는 자
들’을 퇴계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산에 속아 넘어가서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인간들을 퇴계는 가엾게 여겼다.
-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라는 것이 산에 처하는 퇴계의 마음이다.
산이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으로 다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
을 때 산은 아름답다. 산에 관한 퇴계의 글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퇴계의 산은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구현되어야 할 조화의 산이다.
- 퇴계의 산행은, 돌아서서 산과 함께, 산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오기 위한 산행이고
인간의 마을을 새롭게 하기 위한 산행이다.
< 다시 숲에 대하여 - 전라남도 구례 >
o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o 피아골 계곡의 암자에서 차 한 잔 나누어 마신 한 승려는 “온 산에 새잎 돋는
사태 속에 깨달음이 있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알지만 거기에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이것도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법명을 묻자 그는, 그런 걸 묻지 말고 새잎 돋는 산이나 쳐다보고 가라고 한다.
o 5월의 지리산 숲은 온 천지의 엽록소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지르듯이
피어난다. 나무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피어나 숲을 이루고 숲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산을 이루어, 수많은 수종(樹種)의 숲들이 들어찬 지리산은 초록의
모든 종족들을 다 끌어안고서 구름처럼 부풀어 있다.
o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고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 흰 눈에 덮힌 겨울 산에서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우뚝하지만, 온 산이 화사한
활엽수들의 신록으로 피어날 때, 연두의 바다 속에 섬처럼 들어앉은 상록수의
숲은 더욱 우뚝하다.
o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 숲이다. 하얀 나뭇가지
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 자작나무 숲은 생명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
나무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o 자작나무 숲의 모든 이파리들은 제가끔 떨린다. 빛나는 숲이다. 잎이 다 떨어진
뒤에는 흰 가지들이 겨우내 빛난다.
- 자작나무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
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사람이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그 잎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 사는 숲처럼 보인다.
o 은사시나무숲의 신록은 수줍고 또 더디다. 다른 모든 숲들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두터워져갈 때, 은사시나무숲은 겨우 깨어난다. 갓 깨어난 은사시나무숲은 희뿌연
연두의 그림자와 같다.
o 오리나무·갈참나무·떡갈나무 숲들의 신록은 거칠고 싱싱하다. 그 숲의 이파리들은
아름다움의 정교한 치장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여름의 검푸른 초록을 향해 거침
없이 나아간다.
- 이 숲의 이파리들은 억센 사내들의 힘줄 같은 잎맥을 가졌다. 이 숲은 봄의 현란
함이 아니라 여름의 무성함 속에서 완성되는, 넓고 힘센 활엽수들의 숲이다.
이 숲에서는 짙은 비린내가 나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폭포 소리가 난다.
o 섬진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자전거를 달릴 때, 신록의 산들과 여러 빛깔의 숲들이
강물 위에 거꾸로 비쳤다. 숲의 아름다움은 아직은 너무 멀다.
- 모래톱 물가에서 혼자 사는 왜가리 한 마리가 물음표(?) 모양으로 서서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o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다. 여기에는 잡것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이 국물이 갖는 위안의 기능은 봄의 쑥국과 거의 맞먹는다.
- 이 맛은 무릇 모든 맛의 맨 밑바닥 기초의 맛이다. 맺히고 끊기는 데가 전혀 없이
풀어진 맛이다. 부추가 그 풀어진 맛에 긴장을 준다.
- 푸른 부추가 뽀얀 국물에 우러나서 그 국물의 빛깔은 새벽의 푸른 안개와 같다.
< 찻잔 속의 낙원 - 화개면 쌍계사 >
o 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o 화개(花開, 경남 하동군 화개면)는 꽃피는 땅이다. 낮은 포근하고 밤은 서늘해서
늘 맑은 이슬이 내린다. 이슬을 맞고 차나무가 자란다. 봄에 이 나무의 새순을 달여
먹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옛 글에는 “두 겨드랑이 밑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다”
(동다송)라고 적혀 있다.
o 녹차밭에 내리는 봄빛은 기름지고 두텁다. 차는 혼자서 마시는 차를 으뜸으로
여기고 여럿이 마시는 차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동다송).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o 차는 살아 있는 목구멍을 넘어나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o 녹차는 맨 처음 돋아난 새순을 귀하게 여긴다. 햇차 맛 속에는 겨울을 견디어낸
잎의 향기가 있다. 차밭 주인들은 남의 차를 맛보지만, 그 맛을 말하지는 않는다.
o 5월 초순에 화개 골짜기에는 우전(雨前) 차가 나온다. 우전은 곡우 닷새 전에
딴 햇차로, 무릇 차의 으뜸으로 여긴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의 입맛이다.
조선의 차는 입하에 가까워져야 온전해진다고 초의는 말했다.
o 차를 따서 불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 맛은 이 ‘덖음’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찻잎에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차나무 밭에는 벌레가 없고, 놓아먹이는 염소들도
차나무 밭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 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하는 과정이다.
< 숲은 죽지 않는다 - 강원도 고성 >
o 숲은 재난의 자리를 삶의 자리로 바꾸고,
오히려 재난 속에서 삶의 방편을 찾아낸다.
o ‘건국 이래’ 때 불탄 숲은 대부분 인공조림되었고, 극히 일부(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일대 100헥타르)는 자연복원되었다.
자연복원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을 전혀 대지 않고 불탄 나무까지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렇게 4년이 지난 후 자연복원된 구역이 인공조림된 구역보다
훨씬 더 빠르고 건강하게 숲의 꼴을 회복해하고 있다.
- 숲이 꼴을 갖추어가자 벌레와 작은 짐승들도 저절로 모여들었다.
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사람이 공들여서 돈 들여서 한 일이 아니다.
숲은 저절로인 것이다.
o 건강한 숲이란 키 작은 나무에서부터 키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나무의 층위와
다양성을 확보한 숲이다.
o 영동 산불을 오래 연구한 강원대학교 정연숙 교수는
- “우리나라는 목재를 95퍼센트 수입하고 있다. 숲의 경제성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나무를 심기보다 나무를 가꾸는 일이 숲의 경제성을 위해 더 중요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숲은 재화를 공급하는 공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숲의 경제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o 타버린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고 있다. 숲은 죽지 않는다.
숲은 기어이 살아서 숲을 이룬다. 그루터기마저 죽어버린 숲에는 먼 숲에서
풀씨들이 날아와 숲을 이룬다.
<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 여수의 무덤들 >
o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o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흙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흙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o 바다에 나아가 고기잡던 사람들은 죽어서 바닷가에 묻힌다. 물가에 가까운 무덤은
파도에 쓸려가 버렸다. 이런 무덤은 물가에서 멀수록 명당이다.
o 봄의 무덤들은 평화롭다. 푸른 보리밭 속의 무덤들은 죽음이 갖는 단절과 차단의
슬픔을 넘어선 지 오래다.
- 그 무덤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죽음은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고 달이 뜨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편안한 순리로 느껴진다.
- 죽음이, 날이 저물면 밤이 되는 것 같은 순리임을 아는 데도 세월이 필요한 모양다.
o 돌산도에는 고인돌 옆에 요즘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다. 구석기 이래로 죽음의
수만 년이 봄볕 속에서 나란히 포개져 있다. 사람들은 죽어서, 수만년 지층의
켜처럼 가지런히 누워 있다.
- 놀라운 평등의 풍경이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 그리운 것들 쪽으로 - 선암사 >
o 술을 억수로 마신 다음날 아침에 누는 똥은 불우하다.
- 똥이 항문을 가득히 밀고 내려가지 못하고,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온다.
똥이 똥다운 활력을 잃고 기신거리면서 툭툭 끊긴다. 이것은 똥도 아니다.
삶의 비애는 창자 속에 있었다. 이런 똥은 단말마적인 악취를 풍긴다. 똥의 그
풍요한 넉넉함이 없이, 이 덜 썩은 똥냄새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주인을 찌른다.
o 선암사 화장실은 늘 서늘하고 밝고 냄새가 거의 없다. 창살 밖으로, 오가는 사람도
보이고 산천도 보인다. 자연과 계절이 화장실 안에까지 들어와 있다.
o "대·소변을 미련 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자.”(선암사 화장실
내부의 게시문)
- 이럴 수만,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소변을 누듯 망집의 욕망도 훌훌
우리 몸 밖으로 내던질 수 있다면. 아, 인간이여, 헛된 욕심의 총화여, 슬픔이여.
o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o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陽明)하다.
- 남자 칸과 여자 칸은, 서양 수세식 변소처럼 철벽으로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 안에서 적당한 거리고 떨어져 있다. 화장실 남녀 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선암사 화장실에 정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o 선암사 화장실에서 나는 잃어버린 삶의 경건성과 삶의 자유로움과 삶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눈물겨웠다.
- 아, 그리운 것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 그리운 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운 것들을 향해 가자. 가자. 가자.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이 가자.
-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도산서원과 안동 하회 마을 >
o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o 퇴계 이황의 존영과 도산서원은 지금 천 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 경북 안동 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
이나마 더듬어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o 도산서당의 건축 구조적 특징은 그 염결한 단순성에 있다. 그 단순성의 심층 구조
를 들여다보는 일은 안동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며 공부일 것이다.
*요약자 주: <염결하다> - 마음이 깨끗하고 인품이 조촐하며 탐욕이 없다.
-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
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 온화하다.
o 도산서원의 지붕은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검박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넘쳐나지 않는다. 이 단순성은 위대하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내린 눈발처럼 그의 마지막 말은 “매화에 물
주라”는 당부였다.
o 도산서당의 위치는 인간세와 차단된 격절의 공간도 아니고 인간세와 매몰된 오탁의
공간도 아니다.
o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고,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 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 손님을 모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
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에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바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
도 오랫동안 신위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 퇴계는 70세에 이르러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였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
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
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o 하회에 갈 때는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쓴 『민속마을 하회여행』 또는 『안동 하회
마을』같은 책을 읽어야만 하회의 두터운 문화적 층위를 이해할 수 있다.
- 임재해 교수는 하회의 아름다움이 ‘조화’에 있다고 말한다. 적대관계나
갈등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수많은 대립 요소가 하회에서는 조화와
포용에 도달해 있다.
- 양반과 상민, 유교 문화와 무속, 자연과 인간, 기와집과 초가가 강물 굽이치는
그곳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무대로 삼아 조화와 공존을 이루며 화해로운 삶의
질감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하회의 중요한 본질일 것이라고 임교수는 말했다.
o 하회의 집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비스듬히 외면하고 있다.
존재의 품격은 이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비스듬히 껴안고 가는 이의 삶의 품격. 그래서 마을의 길들은 구부러져 있다.
o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어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
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o 추사(秋史)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을 걸었다. ‘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
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 오래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
<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 경주 감포 >
o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길은 길이 아닌 곳과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o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o 한국 미술사학의 선각자인 고유섭은 이 바다에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 한 편을 썼다. 이 수필의 제목은 지금 비석이 되어 바닷가에 서 있다.
- 그에게 잊히지 못하는 것은 그 바다와 929번 도로의 역사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악기와 무기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꿈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7세기는 계속 중인 모양이다.
<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 소백산 의풍 마을 >
o 숯불에 갈비 구워먹는 ‘가든’과 낮이고 밤이고 러브하는 ‘파크’가 온 국토의 산자수
명한 명승 처처에 창궐하였다. 요즘에는 산봉우리마다, 툭 터진 들판마다, 마을
어귀마다 이동통신회사의 기지국 안테나들이 들어섰다.
- 이제 가든과 파크와 기지국은 이 국토의 가장 압도적인 풍경이다.
o 흐린 날의 겨울 산맥은 멀어서 존엄해 보였다. 거기에 비는 심정으로 기어를
풀어내렸다. 1단으로 겨우겨우 저어서 나아갈 때, 이윽고 몸이 길에 붙기 시작했다.
몸은 비록 겨우겨우 나아갔으나, 길에 붙은 몸은 겨울 산맥이 무섭지 않았다.
o 봄은 이 산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산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o 강원도 영월 깊은 산속에 김삿갓의 옛집이 있다.
- 그는 20세 무렵에 방랑길에 올랐다. 산천의 아름다움이 그를 떠돌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더러움이 그를 떠돌게 했다. 그의 조부 김익순은 선천부사였는
데 홍경래에게 투항했다.
그는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하늘에 사무치게 통탄하는 글’로 장원급제했다.
어렸을 때 멸족을 피해서 노루목에 숨어서 자란 그는 조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운명은 충과 효를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 그는 백발이 다되어서 고향 가까운 부석사까지 왔지만 마구령 너머 고향집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 동복 땅에서 한 행려병자의 모습으로 죽었다. 한평생
길로 떠돌던 그는 길바닥에서 죽음으로써 길 없는 세상에서의 생애를 완성했다.
< 고해 속의 무한강산 - 부석사 >
o 고해의 산맥을 넘어온 들녘가에서 푸른 절벽처럼 우뚝한 절은 노을에 젖어 있었다.
- 소백 연봉 뒤로 저무는 석양이 무량수전에 비치어, 일몰의 부석사는 무한강산이
다. 몸이 기진했을 때, 풍경은 기갈처럼 몸속으로 파고든다.
o 저녁빛이 배흘림기둥에 스밀 때 부석사 앞 소백산맥은 무한강산이다. 절이 떠서
부석사(浮石寺)가 아니라 그 절마당에서 사람이 둥둥 떠서 부석사인 것 같다.
o 부석사 안양루에서, 소백 연봉은 말 떼가 질주하듯이 출렁거리면서 지평선 너머로
달려갔다.
o 부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백산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을 달리는 산맥으로
떠오르기 십상인데, 그 풍경은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설명하려는 자에게
침묵을 명령하는 듯하다.
- 그 풍경을 설명하려는 시인·묵객들의 끈질긴 허영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o 의상은 한평생 옷 세 벌과 물병 한 개와 밥그릇 하나 외에는 몸에 지닌 것이 없었다.
세상 잡사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문도들과 화엄의 교학을 문답할 때도 말을 지극히
아꼈고, 말이 번다한 후학들을 엄히 꾸짖었다.
- “인연으로 빚어지는 모든 것들에는 주인이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 태양보다 밝은 노동의 등불 - 영일만 >
o 빛은 결국 우리들 인간의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o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올라, “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o 어부들은 비싼 값을 치르며 양식되고 냉동된 광어나 우럭을 먹지 말고 도다리를
먹으라고 권한다. 도다리는 양식으로 키울 수가 없다. 도다리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 원형의 섬 - 진도 소포리 >
o 진도는 원형(原型)의 섬이다. 음악과 놀이와 그림과 무속의 원형이 이 섬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완성되었다.
-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는 섬의 서남쪽 바닷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오랜
세월 함께 모여서 노래해온 주부·할머니들의 자생적인 노래방이 있다.
도시에 가라오케 노래방이 창궐하기 훨씬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노래 모임을
‘노래방’이라고 불렀다.
노래가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서 작동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포리 노래방은 한국 노래방의 원형이라고 할만하다.
o 날이 저물면, 저녁 설거지를 마친 주부들은 이 마을 한남례 씨 집 사랑방에 모인다.
노래방 회원은 30명 정도지만, 모통 15∼17명 정도가 모인다.
- 이 노래방은 겨울이 한철이다. 노래방 주부와 할머니 들은 다들 억척스런
농사꾼이다. 들일, 밭일에 집안일까지 한다. 농사가 시작되는 2월부터는 모임
횟수가 줄어들고 여름에는 모이지 못한다. 여름이라도 비가 쏟아져서 일하지
못하는 날에는 모여서 노래한다. 이런 날에는 한남례 씨가 집집마다 돌며
“날도 궂은데 한판 놀아보더라고”라며 노래꾼들을 모은다.
o 소포리의 겨울은 신명이 뻗쳐오른다.
지금은 설날 다 함께 모여서 놀 강강술래를 연습하고 있다.
그 신명의 힘으로 소포리 사람들은 새봄의 노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o 한남례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마을에서 가장 신명 높은 아이였다.
일에서나 놀이에서나 늘 신바람이 나 있었다.
부엌에서 일할 때도 늘 노래를 불렀다.
- “개구리가 물속에 뛰어드는 소리만 들려도 엉덩이가 들썩거렸고 어깨가
흔들렸다”고 한씨는 말했다.
o 진도의 들은 겨울에도 푸르다. 10월에 김장 배추를 걷어낸 밭에 다시 월동 작물을
심는다. 흰 눈이 쌓인 들판에 무·배추·대파 들이 돋아나서 진도의 겨울 들판은
흰색 바탕에 초록이다.
- 진도의 산들은 낮고, 작은 우마차로들이 그 산들의 중턱을 이어준다.
자전거로 이 우마차로들을 달리면서 내려다보면, 진도의 겨울 들판은 노랑에서
초록에 이르는 색의 스펙트럼이다.
o 싹이 막 돋아난 무밭의 노랑은 여리다.
이 세상에 갓 태어난 그 노란색은 흰 눈 위에서 애잔하게도 가물거린다.
- 파밭은 어릴 때는 연두에서 시작해서 점차 초록으로 이행한다.
- 배추밭은 초록에서 시작해서 점차 검은 기운이 감도는 수박색으로 변해간다.
눈 쌓인 들판 위로, 이 유순한 색깔의 스펙트럼은 끝도 없이 전개된다.
- 김치 담가 먹은 무와 배추의 아름다움을 겨울 진도에서는 알 수 있다.
o 진도군 농업기술센터의 박춘석 과장은 “춥고 메마른 땅에서 올라온 채소가 달고
고소하다”라고 말했다. 봄은 겨우내 이 섬에 머무른다.
o 운림산방은 허소치 말년의 화실이다. 이 초가집에서 허소치의 말년은 적막했고
단아했고 한유로웠다. 그러나 그는 유언에서 자식들에게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가서
살아라”라고 말했다. 한유로움과 궁벽한 것은 다르다.
o 이 운림산방은 이제 진도 관광의 명소가 되었으나, 그 옛 주인의 탈속한 체취는
크게 훼손되어 있다. 집 앞을 너무나 꾸며놓았고, 초가집 옆으로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기념관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옛 주인의 초가집은 새 건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 진도군은 지금 이 어이없는 기념관을 철거해버릴 계획을 만들어놓았다.
기념관이 정비되고 나면 운림산방은 좀더 옛모습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기 없고 단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자꾸만 짓는다고 잘하는 일이 아니다.
* 요약자 주: 이런 부조화를 영암 구림 한옥마을에서도 느꼈습니다.
하얀색 돌 건물이 덩그러니 주변의 한옥들을 압도하고 있던 그 ‘불편한 부조
화’가 왜 그리 아프게 느껴졌었는지. 재일동포가 기증한 그림들이 소중하기는
합니다만 굳이 한옥마을에 들어앉힐 필요는 없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 공무원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기 전에 들어앉힌
이후를 내다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건물이 완성된 이후의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관람객의 가상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올바른 방향으로 건의하고
유도할 수 있는 ‘입’이 필요합니다. 다만 지혜롭게...
<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 진도대교 >
o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에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다.
- ‘물들일 염(染)’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무인다운 내면의 한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
기가 십상이다. 그 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文)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武)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o 그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o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그가 남긴 시문 중의 한 절창은 이렇다.
- 가슴에 근심 가득 뒤채이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 ‘비출 조(照)’자 속에서, 달과 칼 사이에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하는 자의
살기는 극도로 억눌려 있다. 이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o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겨우 이긴다.
- 그는 영웅 된 자의 억눌림의 비극을 진술할 때는 단호하게도 말을 아끼고,
온갖 정한(情恨)에 몸을 떠는 한 필부의 내면을 진술할 때는 말을 덜 아낀다.
o 절망에 맞서는 그의 마음의 태도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고 거기에 일체의
정서를 개입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그의 내면은 무섭게 억눌리고 그의 글은 칼의
삼엄함에 도달한다. 그는 많은 부하들을 베어죽였다.
- 부하를 죽인 날 그의 일기들은 “아무개가 거듭 군령을 어기기로 베었다.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라는 식의 문체를 보인다.
o 백의종군을 시작하던 1597년 5월 16일의 일기는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로
시작된다.
- 그는 자신을 가두고 때리면서 사형의 빌미를 찾으려는 정치 권력의 정당성
여부와 그 원한에 관하여 끝끝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망가진 배 12척을 수습해서 명량해협의
우수영에 포진했다.
o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의 싸움은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었다. 정찰병들은 적선의
숫자를 보고하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으로 몰려온다”
라는 것이 제 1보였다.
이 바다가 아군에게 유리하다고 적군에게 불리한 바다는 아니었다.
양쪽 지휘관 모두 이 바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왜장 마다시의 작전 목표는
교전이 아니라, 이 해협을 통과해서 서해안으로 진공하는 것이었다.
o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을 붙잡아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 명량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사지(死地)이다.
o 군대 작전이나 진퇴, 또는 군대 운영이나 관리에 관한 한 그는 철저히도
탈정치적이었다. 그는 다만 아군의 사실과 적군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압록강가의 피난 정권은 바다의 현실에 전적으로 무지했다.
임금은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꾸물거리지 말고 속히 함대를 몰고 나가 적을 격파
하라는 교서가 연일 남쪽 바다로 내려왔다.
- 조정에 종이가 떨어졌으니 종이를 구해 보내라는 명령도 내려왔다.
바다에서 싸우는 해군이 어떻게 종이를 만들거나 구할 수가 있었을까.
이순신은 종이를 조정으로 보냈다.
o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조바심을 위로하고 복종 태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 함대는 다만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o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석에서 말했다.
- “장수 된 자는 작은 공로만 있어도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o 이순신의 갑옷은 투박하고도 단순하다. 그의 갑옷은 공격적 기상을 조형화하지
않는다. 이순신의 갑옷은 일본 무사들의 갑옷처럼 날아오르지 않고, 억눌려 있다.
그 갑옷은 다만 적을 죽이기 위해서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자기 방어의
실용성만으로 고요하다.
- 그의 갑옷을 억누르는 것은 시대와 역사 전체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한없는
경건성이다.
o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 길들의 표정 - 덕산재에서 물한리까지 >
o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o 길에 대한 신경준의 사유는 ‘도로고(道路考)’ 속에 들어있다.
-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지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 신경준의 지리책을 읽을 때, 집에서 길로 나가는 아침과 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은 본래 이처럼 신선하고 새로워야 마땅하다.
o 아직도 상징의 표정이 발랄하게 살아 있는 길 위를 저어가는 일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행복이다.
o 산맥을 넘어가는 길들은 산의 가파른 위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길들은 산허리의 가장 유순한 자리들을 골라서 이러지리 굽이치는데, 이 길들은
어떤 산봉우리도 마주 넘지 않고 어떠한 산꼭대기에도 오르지 않으면서도
고갯마루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산봉우리들을 눈 아래 둔다.
- 변산반도의 바닷가를 돌아가는 30번 국도나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19번 국도의 표정은 밝고 화사하다.
o 자전거는 덕산재 마루턱에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까지는 25킬로미터의 내리막 포장길이다.
- 산간 마을들은 눈 속에서 고요히 엎드려 있었고, 산길에는 이따금씩 멧돼지를
쫓는 사냥꾼들만 지나다녔다.
- 그 길은 느리고도 질겼다. 길은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달려들었고, 산을 피하면서
산으로 들러붙었다. 그리고 그 길은 산속에 점점이 박힌 산간 마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서 가는 어진 길이었다. 그 길은 멀리 굽이치며 돌아갔으나
어떤 마을도 건너뛰거나 질러가지 않았다.
< 산간마을 사람들 - 도마령 조동 마을 >
o 여기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조동리, 도마령 고개 아래 산간 마을이다.
엄덕주 노인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죽은 모든 사람들의 무덤 자리를 알고 있다.
엄노인은 젊었을 때부터 목청이 좋고 노래를 잘해서 이 마을에서 초상이 나서
상여가 나갈 때 요령을 잡았다.
- 엄 노인은 사람이 죽어서 산으로 가는 이 마지막 사업을 입산(入山)이라고
말한다. 그의 ‘입산’이라는 말 속에서, 산은 삶이 다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깊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아야 할 쪽은 상여 속에 누워서 입산하는
죽은 자가 아니라 빈 상여를 메고 하산해야 하는 자들일 것이다.
o 엄 노인의 레퍼토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 젊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비통하고 구슬픈 노래를 불렀고, 오래 살아서
아늑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고요하게 멀리 퍼지는 노래를 불렀다.
상여가 비탈을 올라가거나 개울을 건너갈 때는 두 박자로 부르고, 논둑길을 따라
길을 건너갈 때는 길게 늘어지는 박자로 부른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그의 고생을 특별히 슬퍼하는 가사를 만들어서 부른다.
- 소리를 한 번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거절했다.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그는 말했다.
o 이 마을 포수 홍민표 씨는 사냥이 생계의 중요한 일부이다. 여름에는 물가에서
민박을 치고 겨울에는 눈 덮인 산을 뒤져서 멧돼지를 쏜다.
- 산속의 멧돼지들이 다들 한두 번씩은 사냥개와 포수의 추적을 따돌린 경험이
있어서, 멧돼지들은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잡아서
돌아오는 날보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훨씬 더 많다.
- 그 다음날 그는 또 산으로 들어간다. 산은 삶과 죽음 양쪽을 다 받아주었고,
봄이 오는 산맥은 뿌옇게 부풀어 있었다.
< 문경새재는 몇 굽이나 - 하늘재, 지름재, 조소령, 문경새재 >
o 산천은 아름다운 만큼 쓸쓸했고, 마을이 다하는 들판 너머에 새재는 높이
솟아 있었다.
o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 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 문경재새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는 서울-충주-상주-부산을 연결하는 조선
500년의 간선도로였다.
o 조선 도로의 역사 속에서, 문경새재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과 자아 사이의 상처의
표정으로 산맥 속에 걸려 있다. 지금 문경새재는 적막하고, 인간과 무관해 보이는
봄이 그 무인지경의 산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새재는 아직도 곳곳에서 인간을 포위
하고 있을 것이었다.
o 새재 마루턱에서 날이 저물었다. 자전거는 한밤중에 출발지인 관음리로 돌아왔다.
이날 주행거리는 55킬로미터였다.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높은 고개를 잇달아
넘어와, 몸은 창자 속까지 산바람에 절었다.
o 관음리(경북 문경시)에서 미륵리(충북 충주시)로 넘어가는 하늘재 고갯길에는
고려 초기의 불상과 불탑들이 길가에 남아 있다.
- 하늘재는 서기 156년에 열린 고갯길이다. 조선 초기에 문경새재가 열리기
전까지 이 길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간선도로였다. 영남에서 경기도나 충청도로
갈 때는 신라 사람들도 이 고개를 넘었고 고려 사람들도 이 길을 다녔다.
- 하늘재 너머 미륵리 엣 절터는 월악산, 주흘산, 포암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협착
하지 않다. 그 땅은 포근하고 넉넉한 느낌을 준다. 지리학자 최창조는 이곳을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고 있다. 그래서 하늘재를 넘는 일은 신성한 일이었을
것이고 길을 가는 옛사람들은 길이 끝나는 곳에 평화와 안식이 깃들기를 기원
했던 모양이다.
< 가마 속의 고요한 불 - 관음리에서 >
o 하늘재 옛길가 관음리 마을에서는 오래된 백자 가마에 장작불을 때고 있었다.
시루떡처럼 익어가는 가마 옆에서 불 아궁이를 들여다보며 하룻밤을 묵었다.
- 하늘재 아래 오래된 백자 가마 아궁이 속에서 불길은 없었던 생명을 빚어내서
숨을 불어넣는 여성성(女性性)의 힘으로 타올랐고, 가마의 내부 구조와 그 구조
물들의 기능은 거대한 인공의 자궁처럼 보였다.
o 불길은 물길과 같다.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은 빠져나가면서 또 흘러
들어온다. 불길은 새롭게 흔들리는 바람이다.
- 그 때 더운 가마는 자궁 속에 아기를 가진 젊은 어머니와 같다. 세습 도공 김씨는
가마에 불을 때는 일을 ‘그릇을 굽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가마를 익힌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 한마디는 흙·물·바람·불을 결합해서 없었던 생명을 만들어내는
백자 가마의 근원적인 여성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o 가마 속에 쟁여진 수많은 그릇들의 개별성은 잘 익은 가마의 완숙성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 속은 맑고 고요하고 깊다. 그곳은 불의 핵이고
불의 보석이다. 그곳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이 맑게 가라앉은 곳이다.
- 그 뜨거운 곳은 거의 차가워 보인다. 여기서는 많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다.
산소가 많이 필요한 불길은 거죽에서 너울거리며 뻗어나가는 겉불꽃이다.
겉불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젊은 불길이다. 겉불꽃은 출렁거리면서 가마 속을
흘러가고, 속불꽃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기름처럼 고요히 가마 속을 흘러간다.
o 가마를 익히는 불길은 열(熱)이 아니라 흐름이다. 겉불꽃은 공기와 더불어 발랄
하게 놀아난다. 겉불꽃은 자유로고 무질서하고 불안정하다.
대체로 말해서 분청사기와 막사발의 그 자유롭고 여유로운 질감은 이 겉불꽃이
놀다간 자리이다.
그래서 막사발들은 사람처럼 제각기의 표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o 속불꽃은 바람과 뒤엉키는 그 놀아남의 흔적을 들키지 않는다.
속불꽃은 맹렬하고도 적요하다. 이 막은 불은 장작에 뿌리박은 불길의 운명을 이미
떠난 것처럼 보인다.
- 이 불길은 흙을 흔들지 않고 고요히 흙 속으로 스며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표면에 깊고 깊은 심층 구조를 드러나게 한다. 깊은 것은 깊은 것들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백자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지만,
가마의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몽상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o 그러나 겉불꽃이 되었건 속불꽃이 되었건 어떻게 불이 수억 년을 잠자는 흙을
흔들어 깨워서 그 아득히 먼 아름다움을 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서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보일 수가 있는 것일까.
- 다 알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몽매한 일임을 이 오래된 가마 앞에서는 알겠다.
가마는 젊은 어머니인 것이다.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해두는 수밖에 없다.
< 가을빛 속으로의 출발 - 양양 선림원지 >
o 폐허는 폐허의 방식으로 사람을 위로한다.
o 자전거는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의 접경 마을인 양양군 서면에서 출발한다.
여기는 해발고도 400미터이다. 이 자전거는 여기서부터 미천골을 굽이굽이
우회하는 산림도로를 따라 남진하면서 태백산맥에 쏟아져내리는 가을의 빛
속으로 들어간다.
- 흰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가을의 빛과 산간 마을들의 삶의 기쁨과 슬픔 속으로
바퀴를 굴려서 나아간다.
-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o 자전거는 강원도 양양군 서면 미천골 입구의 선림원 옛 절터에서 출발했다.
선림원은 1천2백 년 전 신라 사찰의 폐허이다. 시대정신의 강건함이 무너지면 조형
예술의 비례가 깨어진다는 말은 아마도 지나친 일반화일 테지만, 선림원 페허의 3층
석탑은 이미 기울어져버린 신라 애장왕 말년의 세월처럼, 체감률의 긴장과 균형을
상실한 채 다만 하나의 상투형으로 잡초 속에 서 있었다.
o 겨울 먹이를 물어나르던 다람쥐들이 돌거북 대가리에 올라 앞발을 비볐고,
이 폐허 위에 가을빛은 무진장으로 쏟아져내렸다.
- 오직 빛만이 폐허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간의 빛들은 거듭 이 폐허에
쏟아져내릴 것이었다.
< 마지막 가을빛을 위한 르포 - 태백산맥 미천골 >
o 산맥에 가득 찬 가을빛 속에서 겨우 한줌의 빛 오라기를 추슬러 간직하는 카메라는
가엾은 기계였다.
카메라 셔터의 그 60분의 1초에 의해 세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힘겹게 화해하고, 그 가엾은 기계의 안쪽으로 세상의 무늬와 질감은 겨우 자리
잡는 것인데, 사람들이 영원성을 향하여 지분덕거리는 연장들의 안쓰러움은
대체로 이와 같고 언어 또한 저와 같아서, 가을의 태백산맥은 입을 열어서 말을
주절거리려는 인간을 향하여 입 닥쳐라 입 닥쳐라 한다.
o 11월의 태백산맥 7부 능선 위쪽은 이미 겨울이다. 잎 지는 산맥은 위쪽에서부터
허연 뼈를 드러내고, 나무들은 그 몸속에 잠재해 있던 모든 빛깔들을 몸 밖으로 밀어
내면서 타오른다.
- 온 산맥의 계곡과 능선에 한 움큼씩의 가을빛을 실은 나뭇잎들은 폭설처럼 쏟아
져내리고, 나뭇잎에 실린 빛들도 땅으로 스러지지만, 빛들이 스러진 자리에
새 빛들은 막무가내로 쏟아져내렸다.
o 내리막에서 넘어질 때 자전거 후미등이 깨졌다. 후미등이 없다면 자전거는
가로등도 없는 밤의 국도를 갈 수 없다. 손전등을 배낭 뒤쪽에 매달고 자동차 속에
섞여서 밤길 35킬로미터를 달렸다. 사람들은 신호에 신호를 잇대어가면서 가로등
없는 밤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 한밤중에 양양에 도착했다. 사람 사는 마을의 국물은 뜨거웠고, 양양은 살아서
돌아온 연어떼를 위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자전거와 연어는 양양에서
만났는데, 그날 밤 여관에서, 산맥을 넘어온 자전거는 원양을 건너온 연어 떼
앞에서 수줍게 겨우 잠들었다.
o 면옥치는 미천골 1,100미터 고지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첫 번째
마을이다. 여기는 맑은 땅이다. 푸성귀가 제 향기를 지니고 있고 공기가 맑아서
말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연어 돌아오는 남대천의 맨 위쪽 물줄기가 마을
한가운데로 흐른다. 물가의 가을 나무들이 붉어서 그 밑을 흐르는 물도 붉다.
o 다들 떠나고 20호가 남았다. 서종원 씨는 이 마을의 맹인이다.
다섯 살 때 시력을 잃었다. 맹인은 마을을 떠날 수도 없다.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해질 무렵의 붉은 물가를 더듬거렸다.
- 그는 이 아름다운 마을이 “어떻게 생긴 줄 모른다”라고 한다. 눈뜬 사람들은
자꾸 떠났다. 팔 땅이 없는 사람은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o 이 마을 농부 김순갑 씨에게는 몸으로 문질러서 지켜낸 희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2천 평 밭을 갈아서
연 2천3백만 원의 소득을 올린다.
- 올해는 당귀를 심어서 거두어놓고 말리는 중이다. 그는 노는 햇볕을 아까워했다.
- “작물을 보고 농사를 지어야 할 텐데 상인들을 보고 농사를 짓는 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마을 어린이는 그가 키우고 있는 손자 두 명이 전부다.
o 면옥치는 산맥 속에 박힌 별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꺼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 산골마을의 밤은 이르고, 맹인이 지팡이를 더듬거려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흐릿한 등불 몇 개가 피어났다.
< 노령산맥 속의 IMF - 섬진강 상류 여우치 마을 >
o 여기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옥정호 동쪽 마을로, 노령산맥의 북쪽 언저리다.
댐에 물이 차오르자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거나 더 깊은 산속으로 옮겨서 산다.
자전거는 이 산간 마을에서 출발한다.
- 섬진강은 임실군 덕치면에서부터 노령산맥의 굽이들을 이리저리 휘돌아서
파행 남류한다.
자전거는 이 섬진강 물가의 우마차로를 따라 파행 남류해서 순창까지 갈 판이다.
o 옥정호는 섬진강 상류의 호수다.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가난한 마을들을
이불처럼 덮는다. 마을 아이들이 내 자전거를 몹시 부러워하여 민망했다.
o IMF 이후에, 도시에서 망가져버린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 이 산골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그냥 돌아갔다. 아이들의 전학 수속까지 마쳐놓고 나서, 부인들이
반대해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이 고장 사람들도 있고 외지 사람들도 있었다.
- 시퍼런 물과 가파른 산뿐인 이 마을에 그들은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도 어느 낯선 산천을 기웃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o 김병운 씨와 최정운 씨는 전적으로 무죄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책임져야 할 일을 저질렀기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고향은 아직 그리던 고향이
아닌 것만 같았다.
- 이 고단한 고향에서, 돌아온 고향 사람들이 새로운 고향의 희망을 길러낼 수
있을까. 고향에서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던 고향이 아닌 고향도 결국은 그리던 고향일 터이다. 자전거는 눈부신
섬진강 길을 미루어놓고 이틀 동안 이 마을에 머물렀다.
< 시간과 강물 - 섬진강 덕치 마을 >
o 임실면 덕치면 회문리 덕치 마을 앞 정자나무 밑을 흐르는 섬진강은 아직은
강이라기보다는 큰 개울에 가까웠다. 상류의 강은 시원(始原)의 순결과 단순성만
으로 어려 보였다. 산맥과 맞서지 못하는 어린 강은 노령산맥의 가파른 위엄을
멀리 피하면서 가장 유순한 굽이만을 골라서 이리저리 굽이쳤다.
- 멀리 돌아서, 마침내 멀리 가는 강은 길의 생리를 닮아 있었는데, 이 어린 강물
옆으로 이제는 거의 버려진 늙은 길이 강물과 함께 굽이치고 있었다.
o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
이어서 이 강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街)도 아니고 로(路)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道)
이다. 자전거는 이 우마찻길을 따라서 강물을 바짝 끼고 달렸다.
o 겨울 섬진강은 적막하다. 돌길에 자저거가 덜컥거리자 졸던 물새들 놀라서
날아오른다. 겨울의 강은 흐름이 아니라 이음이었다.
- 강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표정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고,
물은 속으로만 깊게 흘렀다.
- 가파른 산굽이를 여울져 흐르는 젊은 여름 강의 휘모리 장단이나, 이윽고
하구에 이르러 아득한 산야를 느리게 휘돌아나가는 늙은 강의 진양조 장단도
들리지 않았다.
o 산하는 본래가 인간이 연주할 수 없는 거대한 악기와도 같은 것인데, 겨울의
섬진강과 노령산맥은 수런거리던 모든 리듬을 땅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 겨울의 산과 강은 서로 어려워하고 있었고, 자전거는 그 어려워하는 산과
강 사이의 길을 따라 달린다.
o 겨울 강물이 낮아지자 물속의 바위들이 물 위로 드러나 장관을 이루었다.
바위들의 흐름은 구담에서 싸리재에 이르도록 계속된다.
- 수만 년을 물의 흐름에 씻긴 바위들은 그 몸 속에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모조리 물에 깎인 그 바위들은 완강한 단단함으로 물속에
박혀 있었는데, 그 단단함은 유연하고 온화한 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o 흐르고 또 흘러서 마침내 아무런 역사를 이루지 않는 강물의 자유는 얼마나
부러운가. 그 강가에서 인간의 기나긴 고통은 역사를 이루었는데, 역사를 이루던
인간의 마을은 이제 인간의 유적지로 변해간다.
- 시간과 강물이 인간의 유적지를 흘러가고, 길은 빈 마을에서 비어가는 마을로
강을 따라 뻗어가는데, 바위가 물에 쓸리듯이 사람들은 시간에 쓸리고 있었다.
< 꽃피는 아이들 - 마암분교 >
o 김용택 시인은 내 친구다. 내 고향은 서울 종로구다. 그가 서울을 흉보면, 서울이
고향인 나는 속상하다. 나는 내 친구의 고향 마을을 사랑하는데, 내 친구는 왜 내
고향을 흉보나.
- 나는 억울하지만, 그래도 내 친구의 고향이 좋다.
- 나는 그가 살고 있는 임실군 덕치면 마암면의 산골 마을, 강가 마을에 자주
놀러갔다. 그래서 그 동네 아이들이며 동네 개들도 다 사귀었다.
o 마암분교 아이들 머리 뒤통수 가마에서는 햇볕 냄새가 난다. 흙향기도 난다.
아이들은 햇볕 속에서 놀고 햇볕 속에서 자란다.
- 이 아이들을 끌어안아보면, 아이들의 팔다리에 힘이 가득 차 있고 아이들의 머리
카락 속에서는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가 난다. 이 아이들은 억지로 키우는 아이들
이 아니다.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나무와 꽃과 계절과
함께, 저절로 큰다.
o 아이들은 책에서 배우기보다 삶으로부터 직접 배운다. 점심 시간에 식당에 모여
밥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나의 오랜 기쁨이었다.
o 초이가 하급생인 다희의 동생을 업어주고 있다. 초이는 이 분교의 큰언니다.
점심 먹은 설거지도 하고 하급생들 뒷바라지를 다 한다. 초이의 마음은 햇볕이
내리쬐듯이 양명(陽明)했다.
o 삶의 질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저절로 되어지는 속에서
아이들은 배운다. 가르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배운다.
삶이 곧 교육이 되는 학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진리는 공부가 파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나르는 돼지밥통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리는 추상화된 교훈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돼지밥통을 들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우리 집 돼지는 요즘 통 먹지를 않아서 걱정이다. 야 무슨 돼지가 그래, 안 먹는
돼지도 다 있냐? 그러게 말이야, 병원에 가봐야 하나. 아냐 돼지가 무슨
병원엘 가니……. 아이들은 그런 얘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o 인수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인수네 할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인수는 많이 울었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 마음은 슬프다. 나는 정말로
슬프다’라고 인수는 그날 일기에 썼다. 인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좀 시무룩한
아이가 되었다. 점심 시간에도 혼자서 밥을 먹는다.
o 인수는 동시 짓기를 좋아한다. 인수의 글 솜씨는 김용택 시인도 인정한다. “나보다
인수가 월등해 보인다”라고 그는 말했다.
- 인수의 일기장에는 새, 꽃, 안개, 구름, 아침, 고추, 옥수수, 나무, 나비 같은
것들로 가득하다. 인수는 자라서 시인이 되려나보다.
o "왜 땅이 없고 집도 없느냐?”라고 인수 아버지한테 물었다. 인수 아버지는
“본대(본디)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또 한 번 속으로 울었다.
- 누구나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더 가난해지고 얼마나
더 경건해야 옳을 것인가.
< 한강, 흐르지 않는 세월 - 암사동에서 몽촌까지 >
o 강물이 하구에 퇴적층을 만들 듯이 삶은 느리게 겨우겨우 변해간다.
o 산하는 자연 현상인 동시에 인문 현상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산은 신성화되어
있지만, 강은 인간화되어 있다. 조선 영조 연간의 지리학자 신경준은 “하나의 근본
으로부터 만 갈래로 나누이는 것이 산이요, 만 가지 갈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물이다”라고 말했다.
o 산은 이념적이고 초월적이며 교조적이다. 그 교조의 맨 꼭대기가 백두산이다.
‘대동여지도’에서도 백두산은 자연과학을 넘는 특별 대접을 받고 있다.
- 강은 마을 사이를 흐른다. 강은 현실적이고 생활적이며 종합적이다.
- 산은 수직의 공간을 단절시키고 강은 수평의 공간을 소통시킨다.
o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한강 상류의 새벽 강은 물안개에 덮여 있고 그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른다. 시원(始原)은 푸르고 순결하고 힘차다. 젊어서는 늘 시원
쪽으로 가고 싶었다.
o 여의도에서는 밤섬이 보인다. 한강의 철새들은 저녁이면 다들 밤섬에 모여서 잔다.
비오리는 비오리끼리, 청둥오리는 청둥오리끼리 구획을 이루며 잔다.
서해의 갈매기들이 내륙 깊숙이 날아들어와 암사동 앞 한강까지 와서 논다.
-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특정 지역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서 각인된다고 한다. 무서운 추억이다. 추억이 본능이며 생명력인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한강을 찾아오는 철새의 집안은 수만 년 동안 대대로
이 강을 찾아온다.
- 새들도 사람처럼 본관을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는 이것저것
다 들여다보고 가려면 반도 못 가서 날이 저문다.
< 강물이 살려낸 밤섬 -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
o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流)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연(連)이다.
맹자에 나온다.
o 강은 상류와 하류 양쪽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상류의 끝은 시원(始原)이고,
하류의 끝은 소멸이다. 하류의 소멸이 상류의 시원을 이끌어내서, 신생은
소멸 안에 있다.
- 그러니 흐르는 강가에서 유와 연은 흐르고 싶은 인간의 자기 분열일 뿐,
강물 속에는 다만 진행 중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o 서울 도심구간에서 한강은 겨우겨우 흐른다.
한강은 우리에 갇힌 맹수와도 같았다.
이 부자유한 강이 하류 쪽으로 강폭을 넓혀가며 마침내 바다에 닿는다.
김포 쪽에 노을이 비치어 강은 멀고 아득하다.
o 밤섬에 사람이 거주한 역사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경영하던
목장이 있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밤섬은 전체가 수십리의
흰 모래밭이다. 주민들은 매우 부유하고 번창하다”라고 기록했다.
- 그와 거의 동시대의 대사헌 김재찬은 밤섬의 삶의 풍경을 “밭 가운데서도 조개를
캐고, 울타리 아래로 배가 닿는구나”라고 노래했다.
o 밤섬은 강물 속의 섬이다. 내륙이면서도 육지가 아니다. 뭍과 매우 가깝지만,
알맞게 떨어져 있다. 밤섬은 적당한 격리감으로 아늑하다. 이 거리가 삶을 윤택하게
하고 풍속을 자유롭게 했던 모양이다.
< 조강에 이르러 한강은 자유가 된다 - 여의도에서 조강까지 >
o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
o 상류에서 바라본 서울의 산은 멀고 우뚝하지만, 도심을 빠져나가면서 하류 쪽에서
바라본 서울의 산은 도시를 동서로 출렁거리며 길어진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 건너의 산들은 점점 커진다. 산들은 커지면서 흐름을 다하는 벌판 끝 쪽으로
수그러진다. 사람의 시야 속에서 그 산들은 멀어질수록 커지고, 커질수록 순해진다.
< 요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