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인정권 시기 극심한 수탈과 차별에 저항하여 들고 일어난 민란의 지도자 김사미(金沙彌, ? ~ 1194)는, 1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의 활동 외에 자세한 신상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이끈 민란은 무인정권 시대 고려 사회의 모순과 질곡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대의 거울과 같다.
민란의 깃발이 오른 고려 무인정권 시대
‘얇은 베옷으로 몸을 가리고는 매일같이 얼마나 많은 땅을 가는지. 벼 싹 파릇파릇 돋아날 때 고생스럽게 호미로 김을 맨다. 풍년 들어 많은 곡식 거둔들, 관청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어쩌지 못하고 모두 빼앗겨 하나도 갖지 못하고 풀뿌리 캐먹다가 굶주림에 쓰러진다.’
무인정권 시대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의 [동국이상국후집]에 실린 시의 일부다. 당시 농민들의 힘겨운 삶이 잘 나타나 있다. 1170년부터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무인정권 시대에 70건이 넘는 민란이 일어났다. 예컨대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시작되어 충청 지방을 휩쓸며 이듬해까지 계속된 된 망이·망소이의 난이 있다. 그리고 1193년 7월에는 경상도 운문(오늘날 청도)에서 운문사 (雲門寺)를 거점으로 김사미의 난이 일어났다.
김사미의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사미(沙彌)라는 말이 하나의 단서가 된다. 사미는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기는 했으나 아직 비구가 지켜야 할 구족계(具足戒)를 받지는 않은 남성 불교 수행자를 뜻한다. 김사미가 운문사에서 사미로 지낸 적이 있거나, 운문사 소유 땅을 소작하는 농민이자 일종의 재가 수행자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밖에 김사미가 경주의 유력 가문 출신이지만 몰락하여 운문으로 피신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무인정권 실력자 이의민과 내통하다
김사미는 같은 해 초전(草田, 오늘날 울산 또는 밀양)에서 반란을 일으킨 효심(孝心)과 연합했다. 그리고 영천, 경산, 청도, 밀양, 언양, 경주 일대를 휩쓸며 기세를 올렸다. 고려 조정은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보냈으나 진압군은 반란군에게 연전연패했다. 반란군이 고려 정규군에게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경주 일대 주민들의 호응을 얻은 대다가, 당시 무인정권의 실력자로 경주 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이 반란 세력과 사실상 내통하고 있었다.
[고려사]의 해당 부분을 보자.
‘이의민은 자신이 경주 출신이므로 비밀리에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김사미, 효심 등과 통하니 적도 또한 많은 재물을 보냈다. 이지순은 한없이 탐욕스러워 적의 재물을 끌어들이고자 몰래 적과 내통하면서 의복, 식량, 신발, 버선 등을 보내니 적도 또한 금은보화를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군대의 동정이 바로 누설되어 여러 번 패배하였다’([고려사] 이의민전)
이지순은 바로 이의민의 아들이다. 이에 따라 토벌군 총사령관인 전존걸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결국 전존걸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며 자살하고 말았다.
“반란의 무리와 내통하는 이지순을 법대로 다스리면 그 아비 이의민이 장차 나를 해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란군이 더욱 성할 것이니 죄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의민은 경대승(慶大升)이 자신을 죽일 것을 걱정하여 한 때 경주로 피신하여 지냈을 정도로 경주가 자신의 지역 기반이었으니, 경주 일대의 호응을 얻은 김사미의 반란을 하나의 기회로 여겼을 법하다. 경대승이 죽은 뒤 명종(明宗)이 이의민을 조정에 다시 불러들인 것도, 그가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의민과 김사미의 내통에 대해서는 1196년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고려의 역적으로 몰기 위해 꾸며낸 시나리오라는 관점도 있다.
항복하여 참수 당한 김사미와 사로잡힌 효심
1193년 11월 고려 조정은 상장군 최인(崔仁)과 대장군 고용지(高勇之) 등으로 진압군 지휘부를 바꾸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 반란군의 간부급 인물인 득보(得甫)가 개경으로 와서 항복했다. 이듬해 1194년 2월에는 김사미가 항복해왔다. 김사미는 진압군 군영에서 곧바로 참수 당했다. 반란군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급작스런 투항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이의민과 내통하는 것을 두고 반란군 내부 의견이 갈라지며 김사미의 리더십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다.
내통으로 얻는 실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나 내통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감이 일어났을 수 있다.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증이 커졌을 수도 있다. 수도 개경으로 진군할 전망이 보이거나 최소한 고려 조정과 협상할 수 있는 전망이라도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반란 세력의 구성 자체가 중앙에서 밀려난 인사, 몰락한 지방 유력자, 정규군 이탈자, 농민, 천민 등으로 다양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사미가 참수 당한 뒤에도 반란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지만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버렸고 일부는 울진, 삼척 방면으로 북상하다가 강릉 근처에서 진압군에 저지당했다. 그렇다면 효심 세력은? 김사미가 참수 당하고 두 달 뒤인 1194년 4월 저전촌(오늘날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일대)에서 진압군과 맞붙어 7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참패했다. 같은 해 8월 효심은 부하 4명을 개경으로 보내 항복하도록 했다. 이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리고 효심 자신은 12월에 진압군에 사로잡혔다. 이로써 김사미와 효심의 난은 막을 내렸다.
김사미는 이의민과 정말로 내통했을까?
김사미의 난에 관한 한 가지 큰 의문은 이것이다. 김사미의 난이 1193년 7월에 일어나고 9월에 이의민은 문하시중이 됨으로써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며, 이듬해 1월에는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김사미와 이의민이 내통했다면, 반란이 진행된 시기에 이의민이 어떻게 승승장구하며 최고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명종이나 반(反)이의민 세력으로서는, 민란 세력과 내통한 이의민을 누를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의민의 권력 기반이 도전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데다가, 경주 일대에서 호응을 얻은 대규모 민란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이의민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통설이 사실이라면 김사미는 이의민의 권력욕과 정략에 이용당한 꼴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이의민의 권력과 위세가 높았다 하더라도 민란 세력과 내통하는 것은 큰 위험부담을 안는 일이다. 만일 이의민과 김사미 내통설이 반(反)이의민 세력에 의한 일종의 조작이라면, 이의민이 자신의 출신지 일대에서 일어난 민란에 대해 회유책으로 대처하려 했던 것을 내통으로 과장, 조작했을 수 있다. 반란 초기 이의민은 아들 이지순을 진압군 장군으로 보내 김사미를 회유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강경 진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관점이다. 내통 조작설을 따른다면 개경 귀족 중심의 지배 질서에 대해 신라 부흥을 명분 삼아 반발하는 동경(東京), 즉 경주 세력에 대한 배제와 억압이라는 구도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사미와 효심의 난을 포함하여 1190~1233년 시기 경주, 밀양, 청도, 울산, 진주 일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민란들을 통틀어 ‘동경민란’으로 일컫기도 한다.
고려 무인정권 시대 민란의 배경
무인정권의 정치적 역학관계나 신라 부흥이라는 복고적 명분 등은 무인정권 시대에 일어난 잦은 민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시대 민란은 본질은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 및 차별로 삶을 보전하기조차 어려워진 농민과 천민들의 저항이다. 예컨대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사찰을 기반으로 농민들에게 고리대를 놓고,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의 땅을 빼앗아 토지를 더욱 늘려가는 수탈 방법을 썼다.
농민 입장에서는 수확한 곡식 중 세금과 공물을 내고 나면 적자를 볼 수밖에 없고, 빚을 내어 적자를 메우려다 이듬해 수확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땅을 빼앗겨야 했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걸어야 했던 운명은 소작농이 되어 입에 풀칠하며 연명하거나 떠돌이 걸식 생활을 하거나 아예 도적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비참한 상황에서 헐벗고 굶주려 죽을 것인가, 아니면 들고 일어나 싸우다 죽을 것인가.’ 적지 않은 농민들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배경은 유혈 정변으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치열한 권력 다툼과 혼란스런 정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하극상(下剋上)의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예컨대 최충헌 집권 시기에 일어난 만적의 난에서 만적(萬積)은 ‘정중부의 난(무신 정변) 이후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천한 신분에서도 많이 나왔으니,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농민에 대한 수탈과 천민에 대한 차별이 무신정권 시대에만 이뤄졌던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전부터 쌓여 온 고통과 불만이 무인정권 시대의 혼란 속에서 민란으로 크게 폭발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고려 무인정권 시대는 곧 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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