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정치적 야심에 희생된 비운의 소년 국왕 - 단종

히메스타 2017. 3. 27. 14:44

 

단종 이미지 1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정하다. 그 핵심적인 까닭은 그것이 재력과 함께 가장 큰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강력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빼앗겼거나 노리는 사람은 그런 목적을 이루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가장 첨예하고 거친 충돌과 투쟁이 전개되는 국면은 권력의 공백기다. 그때 권력을 노리는 개인과 집단은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수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 1441~1457, 재위 1452~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창된 지 꼭 60년 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국왕은 권력의 공백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출생과 즉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438에 위치한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태실지. 태실지는 왕, 왕비, 왕자와 공주 등이 출산했을 때에 그 태()를 봉안하는 태실이 있던 곳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종은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했다. 부왕 문종도 적장자였고, 자신도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운명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단종이 밟은 과정은 순조로웠다. 1448년(세종 30) 4월 3일 왕세손에 책봉되었고(7세), 2년 뒤 문종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가 되었다(1450년 7월 20일).

운명의 변화는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로 붕어()하자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했다. 왕통은 이었지만, 이때의 상황은 권력의 공백기로 급변할 수 있는 객관적 정황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국왕은 너무 어렸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숙부들은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수양대군은 35세, 안평대군은 34세였다). 그리고 그들은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대의 인재들이었다. 삼정승은 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남지(),김종서()였고, 그 아래의 실무진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 등으로 대부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계유정난의 발발과 폐위

단종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일어났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이었다. 그것은 태종이 일으킨 제1․2차 왕자의 난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은 황보인․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거사했고, 그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했다.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殿) 겸 판이병조사() 중외병마도통사(使)라는 유례 없이 길고 어마어마한 관직은 그런 권력의 크기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정난의 가장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던 안평대군은 즉시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1453년 10월 18일). 1455년 6월 또 다른 위협 인물인 금성대군()도 유배되었다. 이로써 위협이 될만한 인물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이 갖지 못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권위는 왕위였다. 1455년 윤6월 11일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를 받아들여 국왕으로 등극함으로써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목상의 권위까지 모두 인수했다. 정변의 성공부터 최종적 완성까지 1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이런 과정은 500여 년 뒤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두 번의 군사 쿠데타와 집권 과정의 어떤 역사적 선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로써 단종은 자신보다 24세나 많은 숙부의 상왕이 되어 수강궁(. 창경궁의 전신)으로 물러났다.

사육신 사건과 승하

앞서 말했듯이 단종의 운명은 계유정난으로 사실상 결정되었지만, 사육신 사건은 거기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1456년(세조 2) 6월 2일에 발생했다. 권력의 생리상 그 사건이 아니었어도 단종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육신 사건의 과정과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세조의 신하들은 역모의 근본적 원인은 상왕이라고 지목했다. 세조의 신하들에게 그것은 논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주청에 따라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 곳의 지형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으로는 절벽인 천혜의 유배지였다.

단종의 최후는 곧 찾아왔다. 한달 뒤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세조의 신하들은 다시 한번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촉구했다. 그 결과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영월로 갔다. 실록에 따르면 10월 24일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의 처리도 비참했다. 야사에 따르면 시신이 청령포() 물 속에 떠있는 것을 호장()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현재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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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 단종의 능으로 규모나 형식이 매우 단출하다. 사적 제196호로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무덤인 남양주 사릉(). 역시 규모나 형식이 간단하다. 사적 제209호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넘게 걸렸다. 1681년(숙종 7) 7월 숙종은 그를 일단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뒤 1698년(숙종 24) 11월 정식으로 복위시켰다.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이고, 단종이라는 묘호는 이때 추증된 것이다.

비인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운명도 기구했다. 송현수()의 딸로 남편보다 한 살 위였던 그녀는 1454년 1월 22일 국혼했지만, 16세로 붕어한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1521년(중종 16)에 세상을 떠났다.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단종의 일생은 권력의 비정함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유배되고 최후를 맞았고 영면하고 있는 영월에는 장릉․청령포․자규루() 등 어린 국왕의 슬픈 운명이 서린 유적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