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强首, ?~692)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문장가라는 것 외에 유학자라는 점과 육두품 신분이라는 점 등이 있다.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높은 유교적 교양과 학식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신라 사회와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인 것이다. 이 가운데 강수는 시기적으로나 그 언행으로 보나, 유학자라 일컬을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인물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강수의 사랑
때는 7세기, 지역은 오늘날의 충주, 당시 중원경(中原京).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 무르익고 있었다. 남자는 중원경 일대에서 학식이 높고 글 잘 짓기로 소문이 자자한 강수. 그런 강수의 집안은 본래 임나가야, 즉 대가야의 귀족 가문이었으나 진흥왕 23년(562) 신라에 정복된 뒤 중원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강수와 사랑에 빠진 여인은 대장간 집 딸. 강수 집안은 신라 중앙의 진골, 성골 귀족이 아니었음은 물론 이른바 왕경인(王京人), 즉 수도 서라벌에서 행세하는 집안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원경 지역에서는 지방 토착민보다 우월한 신분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대가야가 망한 뒤 신라의 신분 제도에서 육두품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10대 중 후반부터 대장간 집 딸과 깊은 사랑에 빠진 강수는 과연 신분 차이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강수의 부모는 대장간 집 딸과 헤어질 것을 강권했다. 신분이 서로 맞는 집안의 인물 좋고 행실 좋은 여인에게 장가들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강수. 그런 압력을 가하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장간 집 딸과 혼인하게 되면 학식과 글재주가 뛰어난 강수의 앞날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이유 있는 걱정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강수는 부모의 강권을 뿌리쳤다.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고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지금 명성이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미천한 여인을 짝으로 삼으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에 강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워할 바가 아니지만, 도(道)를 배우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부끄러워할 바입니다. 일찍이 듣기를, 옛 사람의 말에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糟糠之妻) 집에서 내보내지 않고, 가난할 때 친하였던 친구는(貧賤之交)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강수는 결국 대장간 집 딸과 부부로 살아가게 되었다. 강수가 물리친 것은 비단 부모의 강권뿐만이 아니었다. 엄격한 골품제도와 신분 질서 속에서 서로 혼인할 수 있는 범위도 철저하게 미리 정해져 있는 신라 사회의 불문율을 물리쳤던 것이다.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출셋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었지만, 강수에게 부끄러운 것은 아내의 낮은 신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현세적 합리주의를 택한 강수
신분이 아니라 도덕적 올바름의 삶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강수의 결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스스로 글을 깨우쳐 책을 읽는 강수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아니면 유교를 배우겠느냐?” 강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는 불교는 세외교(世外敎)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 사람이온데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유자(儒者)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강수의 뜻을 허락했고, 강수는 비로소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 [곡례], [이아], [문선] 등을 본격적으로 읽고 배우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는 불교 국가였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교가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도 막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강수는 불교가 아니라 유교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히고 실천했다. 왜 일까? 불교는 세외교, 즉 속세 바깥에 관한 가르침이며 유교는 속세에 관한 가르침,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루하루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도(道)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외교가 아닌 세내교를 따르겠다는 강수의 결의는 결국 현세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길을 따르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초인간적, 종교적 힘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책임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적 태도는 신라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 핵심 지배층인 진골 귀족의 종교적 권위주의에 대해서, 지배층의 주변부에 해당하는 육두품 신분이자 가야 유민 출신인 강수는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유교적 도덕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지배층 주변부 또는 하위 지배층의 지식인 가운데 비판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비단 강수의 경우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공자(孔子)가 있다.
신라의 외교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강수
강수가 이처럼 합리주의적 태도를 갖고 당시 신라 사회질서를 비판하고자 했다면 그는 제대로 활동하기는커녕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문장가로 부각되면서 신라의 관료로 활동할 수 있었다. 강수가 신라 중앙 정부에 등용되어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합리주의적 비판가로서가 아니라 유교적 교양과 학식에 바탕을 둔 문장을 통해서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당나라 사신이 전해 온 국서에 매우 어려운 곳이 많았다. 이에 무열왕은 강수를 불러 물어보았고, 강수는 무열왕 앞에서 국서를 한 번 읽어보고 막히는 곳 없이 정확히 해석해냈다. 그리고 강수는 당나라 국서에 대한 회신을 지었는데, 역시 무열왕의 의도와 신라의 입장을 훌륭히 드러낸 문장이었다고 한다. 무열왕은 크게 기뻐서 “왜 내가 일찍 이런 사람과 만나지 못했는가”라 말하며 ‘강수’라는 이름을 내렸다. 무열왕이 보기에 그의 머리뼈 생김새가 특이하여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강수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머리에 뿔이 돋은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강수를 낳았으며, 과연 강수는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를 찾아가 물어보니 장래에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강수는 신라의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나라가 억류하고 있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金仁問)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글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을 지어 보내니 당 고종이 크게 감동했고,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문무왕(文武王)의 글도 강수가 지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룬 뒤 강수는 사찬(沙飡) 벼슬을 받고 해마다 녹봉도 해마다 100석에서 200석으로 올려 받게 되었다. 이 때 문무왕은 강수를 칭찬하여 이렇게 말했다.
“강수가 문장으로 임무를 맡아 서한으로 뜻을 중국, 고구려, 백제 등에 전한 고로, 능히 우호를 맺어 큰 공을 이루었다. 선왕(先王)이 당나라에 병력을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에도 말미암은 것인즉,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강수가 받은 대우와 신분적 한계
강수가 신라 외교 분야에서 펼친 활약과 세운 공을 감안하면 신라의 17등 관등 중 제8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은 그리 충분하거나 높은 보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그의 골품이 육두품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한계, 즉 신분적 한계 탓이었을 것이다. 다만 강수의 아버지가 제11등에 해당하는 나마(奈麻)의 지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강수는 자기 집안에서는 가장 높은 관등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강수는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강수가 ‘생(生)을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 즉 ‘경제적 부와 생계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향인 중원경에 어느 정도의 생활 기반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귀족들의 막대한 기반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을 것이다. 그가 받은 매년 200석의 녹봉도 땅을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녹봉을 지급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습될 수 없었다.
실제로 그가 죽은 뒤에 생활이 곤란하게 되자 강수의 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에 대신들은 곡식 1백 석을 하사하도록 왕에게 청하였지만 강수의 처는 ‘남편이 이미 죽은 처지에 나라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더구나 장례식에 왕이 보낸 물품도 모두 다른 곳에 기증했다 하니, 강수의 가족들도 ‘생을 도모하지 않는’ 강수의 뜻을 이어받았던 셈이다.
유학자라 부를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인물, 강수
강수와 같은 육두품 신분의 유교적 지식인이 신라 사회에서 족적을 남기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만일 신라 사회의 어떤 시대적 필요성이 없었다면 강수는 신분적 한계에 갇혀 지방인 중원경에서 일생을 보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중앙 정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물론 통일기 신라의 대당(對唐) 외교의 중요성이 강수와 같은 문장가를 필요로 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더 넓게 보면 통일기와 그 이후의 관료제도의 성장이 중요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진덕여왕 5년(651년)에 설치된 집사부(執事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이 직할하는 일종의 정치행정기구 성격을 지닌 집사부는 전통 귀족 세력의 화백회의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집사부는 왕권을 기반으로 국정을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관료층이 싹틀 수 있는 기반이었다. 이를 통해 육두품 이하의 유능한 관료가 직접 왕의 명령을 받고 왕에게 조언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었고, 강수의 사례도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강수의 활약은 비단 강수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신라의 정치 제도와 질서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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