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국가나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 지리적 조건이라면,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는, 그런 지리적 조건을 포함해서, 시대적 환경일 것이다. 물론 인간과 그 인간들의 집합체인 국가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전제에 도전해서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지만, 그런 시도 또한 결국은 그런 규정적 조건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는 태평한 성세를 살았을 때와 빈곤과 전란에 허덕이는 쇠망의 시기에 활동했을 때, 그의 삶이 그리는 궤적은 분명히 크게 다를 것이다.
모든 국가의 종말은 대부분 혼란스럽고 비참하다. 국가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변동에는 언제나 복잡한 국내외의 원인들이 작용하며,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행동 또한 어느 때보다 첨예한 이해관계의 충돌에 따라 극도로 거칠고 파괴적으로 전개된다. 전근대 한국사의 마지막 왕조 교체인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하는 과정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명멸한 여러 주요한 인물들 중에서도 이색(李穡, 1328~1396)은 특히 중요하고 두드러진 존재였다.
훌륭한 가문적 배경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 충청남도 서천)이고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의 외형적 조건과 개인적 경력은 고려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특별히 빼어났다고 말할 만했다.
먼저 그의 아버지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2품)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고 문효공(文孝公)에 책봉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고, 어머니는 요양현군(遼陽縣君)과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에 책봉된 김씨였다. 긴 관직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이곡은 탁월한 능력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원(元)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그는 19세 때인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내내 그곳에 체류한 것은 아니었고 본국을 오가며 혼인 등의 중대사를 치렀지만, 1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공부한 뒤 그는 1333년(충숙왕 복위 2) 원의 제과(制科, 천자가 직접 주관하는 과거)에서 차석으로 합격해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 검열관(檢閱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원이 차지했던 정치적 영향력이나 학문적 수준을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한 성취였다. 그 뒤 이곡은 원에서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는 직책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 등을 역임했으며, 고려에서도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도첨의찬성사 등의 요직을 맡았다.
전근대의 주요한 정치인이 대부분 뛰어난 문인이자 학자였듯이, 이곡도 그러했다. 그는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보완하고, 충렬·충선·충숙왕 3대의 실록을 편찬했다. 그와 관련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는 [죽부인전(竹夫人傳)]일 것이다. 고려 후기에 유행한 가전체(假傳體) 소설의 대표적 작품인 그것은 대나무를 절개 있는 부인으로 의인화해 칭송한 내용이다. 이곡의 문학적 능력과 위상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능력과 성취도 탁월했지만, 아들은 여러 측면에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다. 거기에는 물론 아버지가 닦아놓은 가문적 배경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겠지만, 이제 보듯이 이색의 자질과 능력은 분명히 뛰어났다.
영민한 능력과 순조로운 출세
이색은 1328년(충숙왕 15) 5월 9일 영해부(寧海府, 지금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났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곡은 학업과 직무로 원에 체류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훈육을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색은 자신이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 4)부터 한산 숭정산(崇井山)에서 독서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독서처가(讀書處歌)] 서문). 6년 뒤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시에 합격함으로써 영민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1341, 충혜왕 복위 2). 그때 아버지는 연경(燕京)에 체류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학문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부터 17세까지 이색은 열심히 학문을 연마했다. 성균관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공부했고, 삼각산(三角山), 감악산(紺嶽山), 청룡산(靑龍山), 대둔산(大芚山), 목단산(牧丹山) 등에서 독서했으며, 성균관 동당(東堂)에서 치르는 과거에도 응시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학문에 더욱 매진하라고 격려하는 시를 연경에서 보내기도 했다(1345, 충목왕 1).
시대에 따라 적절한 연령과 그 개인적·사회적 의미는 상당히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중요한 전기는 직업의 획득과 배우자의 선택일 것이다. 이색은 18세 때 안동 권씨와 혼인했다(1346, 충목왕 2). 그녀의 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종1품 문관의 품계)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達)이고, 조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右政丞, 정1품)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이었다. 가문과 경력에서 이색의 처가는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더욱 중요한 경험은 처음으로 원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혼인 1년 뒤 이색은 원에 체류하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뵈려는 목적에서 연경으로 갔다가 그곳의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해 [주역]을 배웠다(1347, 충목왕 3). 이듬해에는 원에서 벼슬하고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자감(學子監)에 생원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이색은 당시 중요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학자감에서는 월과로 제출한 이색의 부(賦)를 높이 평가했다(1348, 충목왕 4).
이색은 학자감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뒤 1350년(충정왕 2) 가을에 귀국했지만, 학업을 계속하려는 목적에서 12월 다시 도원(渡元)해 이듬해 1월 학자감에 거듭 입학했다(1351, 충정왕 3). 그러나 그 해 1월 1일 아버지 이곡이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는 한 달만에 전해졌고, 이색은 즉시 귀국했다. 그때 그는 23세의 약동하는 청년이었지만, 고려는 멸망을 41년밖에 남기지 않은 노쇠한 나라였다. 이런 선명한 대비(對比)는 그의 삶을 일차적으로 규정한 시대적 환경이었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다
고려 후기에 가장 중요한 국왕과 시대는 공민왕(恭愍王)과 그의 치세였다. 고려의 멸망을 41년 앞둔 시점에서 즉위한 공민왕은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실패했고, 그 자신은 암살당했다. 24년에 걸친 그의 치세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고려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된 것이었다.
이색은 그때 가장 주목받던 대표적인 젊은 인재였다.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추진되던 중요한 시기에 출중한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젊은 인재에게는 언제나 큰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기 마련이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색은, 그의 정견과 행동에는 상반된 견해가 있겠지만, 시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민왕의 개혁은 재위 5년(1356)의 반원정책과 14년 신돈(辛旽)을 등용한 내정 쇄신이 그 핵심을 구성했다. 국왕은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가장 강력한 제약인 원의 영향력을 일단 약화시킨 뒤 내부의 개혁을 추진한 것이었다. 공민왕의 시대에 이색은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간에 고려 후기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을 통과한 것이었다.
그 시기 이색의 활동과 위상은 그가 역임한 관직에서 가장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는 이부시랑(吏部侍郎, 정4품), 병부낭중(兵部郎中, 정5품), 우간의대부(정4품), 지공부사(知工部事), 지예부사, 지병부사(이상 정3품), 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 대제학(정2품), 지춘추관사, 대사성(정3품), 정당문학(종2품) 등 국정과 문한(文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런 관직을 거치면서 그는 고려의 가장 중요한 문신으로 자리 잡았다.
공민왕대의 중요한 위기는 1361년(공민왕 10) 11월부터 2년 동안 자행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이었다. 국왕이 수도 개경을 떠나 복주(福州, 지금 경상북도 안동)로 몽진해 14개월만에야 환도할 정도로 그 피해는 혹심했다. 그런 국난을 극복하는 데는 물론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정세운(鄭世雲) 등 무장들의 활약이 가장 컸지만, 이색도 문신으로서 국왕을 성실하고 성공적으로 보필했다. 전란이 마무리된 뒤 그는 그 공로로 벽상단성보리공신(壁上端誠保理功臣,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얼마 뒤에는 문충보절찬화동덕(文忠保節贊化同德)공신의 칭호가 더해졌다.
이색은 뛰어난 학자로서도 다채롭게 활동했다. 그는 이전부터 지제교(知製敎)로서 여러 교서를 작성했는데, 특히 중요한 사례는 [삼원수를 처벌하는 교서](죄삼원수교서(罪三元帥敎書))를 지은 것이다. 그 사건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뒤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 세 장수가 왕명을 사칭해 총사령관인 상장군(上將軍)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한 큰 변란이었다. 공민왕은 그들을 즉시 사형에 처했는데, 그런 중요한 교서를 이색이 지은 것이다.
학자로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것도 특기할만하다. 1366년(공민왕 15) 쇠퇴한 문풍을 진작시키려는 목적에서 옛 숭문관(崇文館) 터에 성균관을 새로 지었는데, 이색은 그 기관의 첫 번째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었다. 그는 지공거(知貢擧)로서 홍언박(洪彦博), 윤소종(尹紹宗), 권근(權近), 이숭인(李崇仁) 등 뛰어난 인재들을 발탁했으며, 신돈을 탄핵하다가 국왕의 분노를 산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를 옹호하기도 했다.
치세 말엽 공민왕은 이색을 정당문학에, 이성계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종2품)에 임명한 뒤 “문무에서 모두 최고의 재상을 얻었다”고 만족스러워했다(1371, 공민왕 20). 그때 이색은 44세였다. 이처럼 인생의 중반에 다다랐을 때 이색은 정치와 학문에서 부동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조국의 운명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고려의 멸망을 지켜보며 세상을 떠나다
우왕(禑王) 이후 고려의 역사는 멸망으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명이 일어나(1368) 노쇠한 원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런 변화에 따라 국내에서는 친원과 친명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두 세력의 가장 결정적인 이해관계는 물론 고려의 잔존과 새 왕조의 수립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다.
중년 이후 이색에게 다가온 가장 큰 변화는 건강의 악화였다. 68세로 상당히 장수했지만 이때부터 이색은 병고로 자주 사직했고, 그때마다 조속히 다시 출사하라는 국왕들의 간곡한 부탁이 거듭되었다. 공민왕이 붕어한 뒤 우왕 초년까지 그는 신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우거했다. 이색은 녹봉을 사양했고, 궁핍해진 그의 생활은 이 무렵 그가 지은 시편들에 언뜻언뜻 보인다. 1379년(우왕 5) 이색은 정당문학 대사성이자 국왕의 사부(師傅)로 복귀했다.
잦아들던 고려의 명운이 사실상 종결된 해는 1388년(창왕 1)이었다. 그 해 4월 명은 사신을 보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대신으로서 이색은 사신을 만나 고려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러나 회담은 결렬되었고, 최영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은 요동정벌을 목표로 출병했다.
그 뒤의 역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달 뒤인 5월 위화도(葳化島) 회군이 단행되었고, 다음 달 우왕이 폐위되었다. 후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색은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옹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왕통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391년(공양왕 3) 조준(趙浚) 등이 주도한 전제개혁이 단행되어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되고, 이듬해 7월 17일 마침내 조선이 건국됨으로써 고려의 역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색은 위화도 회군 직후 수상인 문하시중(종1품)에 올라 쓰러져가는 왕조를 끝까지 지탱했지만, 국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대신으로서 그가 파직과 낙향과 유배의 고초를 겪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색은 함창(咸昌), 한산을 거쳐 경기도 여주에 유배된 상태에서 조선의 건국을 지켜보았다. 그 직후 그는 서인(庶人)으로 폐출 되어 본관인 한산으로 돌아왔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보다 7세 연하로 오랫동안 함께 관직생활을 해온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왕조를 수립한 뒤 옛 선배를 후대했다. 위험의 요소가 거의 사라졌고, 그동안의 정리를 생각한 배려였을 것이다. 1395년(태조 4) 태조는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하고 과전 120결과 곡식 100곡(斛), 소극 5곡을 하사했다. 조선에서 정1품 관원에게 지급되는 과전이 150결이었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색은 이듬해인 1396년 5월 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제비여울(연자탄)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향년 68세였다. 그 죽음이 출사하라는 태조의 부탁을 거절하고 낙향하던 도중에 일어났다는 정황에서 타살의 가능성이 적지 않게 제기되기도 했다. 아무튼 태조는 매우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을 지탱한 대정치가이자 학자의 생애는 끝났다. 국정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던 낡은 왕조를 수호하려고 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정치적 선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가 훌륭한 가문적 배경과 탁월한 개인적 능력으로 우뚝한 업적을 이룬 인물이었다는 평가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잘 알듯이, 고려 후기의 유명한 인물 중에는 ‘은(隱)’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아마도 거기에는 당시의 복잡한 국내외의 정세에서 벗어나 조용히 은거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겼을 것이다. 그의 호를 보면 이색도 목가적 생활을 영위하며 숨어 살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뛰어난 인물에게 그런 운명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이색은 자신을 규정한 일차적 조건인 시대적 환경을 성실히 감내한 위대한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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