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는 성인의 도를 갖고 태어나 배움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광에 조금도 미혹치 않았다. 도덕이 쇠퇴하고 학문이 황폐해가는 시대에 홀로 그런 세태를 거슬러 사신 분이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출가한 개성 영통사에 있는 ‘대각국사비’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기록한 글이다. 의천은 왕자로 태어나 고려 불교 개혁과 [교장] 간행에 힘써 우리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려 왕자 의천, 송나라로 밀항하다.
1085년 4월 초파일 밤, 화려한 연등 속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개경의 밤거리를 남루한 옷차림의 세 사람이 빠져나왔다. 그들은 정주 항구(오늘날 경기도 개풍)에 도착하기 무섭게 송나라 상인 임녕(林寧)의 배에 몸을 실었다. 먼 바다로 나온 다음에야 세 사람은 갑판으로 나와 고려 쪽을 바라보았다. 고려 문종(文宗, 1019~1083)의 넷째 아들이며 즉위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난 순종(順宗, 1046~1083)과 당시 임금 선종(宣宗, 1049~1094)의 동생으로, 고려 불교계 최고위직 승통(僧統)을 맡고 있는 의천과 제자 두 사람이었다. ‘왕의 동생 후(煦)가 몰래 송나라로 빠져나갔다.’ 그 날의 일을 기록한 [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후’는 의천의 휘, 즉 이름이며 본래 법명은 석후(釋煦)였으나 송나라 철종(哲宗) 조후(趙煦)의 이름을 피하여 자(字)인 의천(義天)으로 법명을 삼았다.
1085년 5월 2일, 의천 일행은 송나라 밀주(密州) 판교진(板橋鎭.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에 도착했다. 송나라 철종은 5월 21일 영접사를 보내 의천을 수도 변경(汴京. 오늘날 허난성 카이펑)으로 맞아들였다. 비록 밀항하여 도착했지만 고려 선종의 동생이자 승통인 의천은 송나라 입장에서 국빈이었던 것. 당시 판교진은 고려 상인과 사신을 위한 시설인 고려정관(高麗亭館)이 있을 정도로 고려와 송나라의 교류 거점이었다. 자오저우시 측이 2000년에 세운 고려정관비도 당시 일을 각별히 언급한다.
‘원풍 8년(1085) 고려 왕조 문종의 4남 의천대사가 불법을 구하러 바다를 건너 판교진 부두에 상륙하여 잠시 머물다 변경으로 갔다. 그 후 의천대사는 1086년까지 송나라 조정의 보호 아래 각지의 고승을 방문하여 양국 간 우호관계를 증진하고 한·중 교류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의천이 서쪽으로 간 뜻은?
‘송나라로 들어가는 배들을 바라보면서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죄를 무릅쓰는 신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신은 만 번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험한 파도에 몸을 맡기옵니다.’
송나라로 밀항하면서 의천이 선종에게 남긴 편지 내용이다. 11살 때 개경 영통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13살 때 승통의 지위에 오른 의천은, 이미 19살 때부터 불교 경전 연구를 위해 불서를 수집하러 송나라에 갈 뜻을 밝혔다. 또한 경전과 교리 연구를 통해 고려 불교계의 갈등을 조정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큰 소망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의천은 좀처럼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왕의 동생이자 승통 신분으로 송나라에 가서 머문다는 것에 대신들이 반대했고, 어머니 인예태후(仁睿太后)와 형인 임금도 아들과 동생이 먼 외국으로 떠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반대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균형 외교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는 송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지만, 안보 측면에서는 군사력이 강한 거란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대신들은 왕의 동생 의천이 송나라에 가서 머물다가 자칫 균형 외교 노선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의천이 공식 외교 루트가 아니라 송나라 불교계와 상인의 도움, 다시 말해 민간 루트를 통해 송나라 행을 준비하고 결행했던 것도 이런 사정 탓이었다. 송나라 철종이 의천을 극진히 환대한 것도 고려, 거란, 송나라의 삼국 관계에서 고려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구축, 유지함으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다는 외교적 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연구논문 총서, [교장] 편찬에 힘쓴 의천
대각국사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의천은 황궁 서문 근처 계성원(啓聖院)에 머물며 화엄종의 저명한 승려 유성(有誠)과 각엄사(覺嚴寺)에서 교류했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출신 길상삼장(吉祥三藏)과 만나 산스크리트 불경에 대한 이해를 더했다. 또한 항주(杭州) 혜인원(慧因院)에 오래 머물며 밀항 전부터 서신을 주고받던 정원(淨源)과 깊이 교류했고, 이에 따라 혜인원은 이후 혜인고려사 또는 고려사로 불리게 되었다. 항주에서 의천은 특히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종간(從諫), 용정사(龍井寺)의 원정(元淨)에게 천태학을 깊이 배웠다. 항주는 10세기 이래 중국 천태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의천은 이밖에도 많은 중국 승려들과 교류했는데, 그가 만난 중국 승려들 대부분은 선종(禪宗)이 득세하는 당시 중국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교종(敎宗)의 침체를 우려하는 입장을 취한 인물들이었다.
1085년 11월 송나라에 온 고려 사절단이 아들 의천의 귀국을 바라는 어머니 인예태후의 간곡한 뜻을 전해왔다. 이듬해 4월 의천은 항주로 다시 가서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심 국청사(國淸寺)가 있는 천태산을 방문하여 고려 천태종 개창을 맹세한 뒤, 수집한 불서 3천 권을 갖고 1086년 5월 12일 귀국길에 올랐다. 의천은 허락 없이 떠난 죄를 청하는 글을 올렸지만 큰 환영을 받았다. 이후 의천은 개경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앞으로 간행할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펴냈다. 이 목록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의천은 이후에도 고려 국내는 물론 송나라, 거란, 일본에서도 계속해서 불서를 수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10부 4,740권의 [교장]을 간행했다. [교장]은 동아시아에서 한자로 기록된 불교 연구논문을 모은 총서이자 전집으로서, 당시까지의 동아시아 불교 연구의 총집성이다. 의천이 간행한 [교장]은 현종, 선종 때 이룩한(1011~1087) 일명 [초조대장경]에 이은 후속편을 뜻하는 ‘속장경’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대장경과 달리 불교 경(經), 율(律), 논(論)에 대한 연구논문을 모은 독자적인 편찬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목록 제목을 감안할 때 [교장]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의천의 [교장]이 ‘속장경’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10년대 이후 오노 겐묘(小野玄妙),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 몇몇 일본 학자들이 그렇게 일컬었던 것을 그대로 따른 탓이다. [교장] 목판본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다가 몽골 침입 때 불타버렸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몇몇 사찰과 박물관에 극히 일부만 남아 전해진다.
천태종을 개창하여 교선(敎禪)일치를 추구하다
치욕 속에 여러 해를 서울에 살면서도, 교문(敎門)에 쌓은 공이 없어 부끄럽구나.
도를 행한 것이 괜한 수고였으니, 어찌 산골에서 성정을 즐기는 것만 같으랴.
일이 지난 뒤 몇 번이나 탄식했던가. 해가 지나도 군친(君親)의 은혜 갚을 길 없구나.
40살이 되던 해 흥왕사 주지에서 물러나 해인사로 내려간 의천이 해인사에서 지은 시다. 안타까움과 회한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의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천은 귀국하고 3년 뒤 1089년 인예태후의 도움으로 천태종의 중심이 될 국청사(國淸寺) 건립에 박차를 가했지만 국고를 보관한 창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국청사 건립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1092년과 1094년에 인예태후와 선종이 세상을 떠났다. 귀족 세력과 그들이 후원하는 법상종(法相宗) 측에 밀려 해인사로 떠나야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의천은 이듬해 숙종이 즉위한 뒤 개경 흥왕사로 돌아왔고 국청사도 1097년에 완공될 수 있었다.
당시 고려 불교계는 개경 흥왕사와 의천을 중심으로 한 왕실 측의 화엄종(華嚴宗)과 개경 현화사와 김제 금산사, 그리고 유력한 인주(仁州) 이씨 가문 출신 소현(韶顯)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의 법상종, 여기에 선종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의천은 화엄종과 선종 세력을 합쳐 천태종을 개창하려 했고, 결국 국청사 완공과 함께 그곳에서 천태학을 강설하면서 선종 승려 천여 명이 천태종으로 옮겨옴으로써 의천의 계획은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 서서 천태학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용함으로써,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 이후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전통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원효를 해동교주(海東敎主)라 일컬으며 크게 존경했다.
임금과 더불어 나라의 큰일을 논의한 의천.
의천은 우리 화폐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이미 996년 고려 성종(成宗) 때 건원중보와 철전을 만들었지만 유명무실했다. 숙종 때 의천과 윤관(尹瓘)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097년 주전관, 1101년 주전도감을 설치하여 이듬해부터 해동통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킨 것이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주화 유통이었다. 의천은 주화 사용이 물자 운반의 수고를 덜고 재화 보관을 편리하게 만드는 등 현물 유통에 비해 지니는 장점을 주장했다.
의천의 이러한 생각은 송나라에서 화폐 경제의 편리성과 효율성을 경험한 것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지만, 현물 거래에 따른 물자 부족, 곡식에 다른 것을 섞는 폐단, 귀족들이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기는 현실 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판단이기도 했다. 귀족 세력이 상업과 경제를 장악하는 현실을 고쳐서 국가가 이를 주도하도록 하는 정치, 경제 개혁안이었던 것이다. 의천은 이처럼 나라의 큰일을 임금과 논의하고 조언하는 역할까지 했다. 1101년(숙종 6년) 의천은 개경 총지사(摠持寺)에서 47살의 나이로 입적했다. 숙종은 의천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의천을 국사(國師)로 책봉했고 이후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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