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내리는 이런저런 평가일 것이다. 작은 사실, 그것도 정확치 않은 풍문에 기대어 발설되고 어느새 널리 퍼져있는 비방을 들을 때, 그 당사자는 절망하거나 분노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신중한 판단과 섬세한 표현은 어떤 사람에 관련된 평가에 특히 중요하다. 짧은 내용이지만, 이런 종류의 글을 쓰면서 그런 민감성을 자주 생각했다.
빼어난 자질과 능력
신숙주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참판이라는 벼슬이 보여주듯 신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사장(詞章) 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死因)이 되었다(세종 15년 2월 8일).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屈原)과 송옥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세조와의 만남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에게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뒤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그전에도 서로 알고 일정한 교류는 있었겠지만, 운명이라고 말할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35세 때인 1452년(문종 2)이었다. 그때 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그 사행은 야심이 큰 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시키려는 좌천의 의미가 큰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가장 핵심적인 신하가 되는 신숙주의 만남을 실록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8월 10일 세조는 정수충(鄭守忠)이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집 앞을 지나갔다. 세조는 “신 수찬(申修撰)”이라고 그를 불렀고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셨다. 그때 신숙주는 수찬이 아니라 직제학이었지만, 세조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눴다. 세조는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고 화답했다. 세조는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갑시다.”(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 짧은 대화는, 세조와 한명회(韓明澮)의 만남과 함께,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 뒤 서장관으로 수행한 사행에서 세조와 신숙주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흉금을 터놓고 국가의 대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구했던 ‘구국의 방안’들은 한 해 뒤인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구체화되었다..
화려한 출세
신숙주 초상화. 비단에 채색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초상화 중 흉배(胸背)형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가로 109.5센티미터, 세로 167센티미터. 보물 제613호. 충북 청원군 가덕면 구봉영당 소장. <출처: 한국사기초사전>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62년, 세조 8).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구치관(具致寬)과 함께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예종이 급서하고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 가까이 재직했다(성종 2년 10월 23일~성종 6년 7월 1일, 45개월). 어린 국왕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행된 이때의 정황은, 마치 단종 때의 국면처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훈구대신 들과 함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화려한 관력 외에도 그는 정난(2등), 좌익, 익대, 좌리(이상 1등)공신에 책봉되는 유례 없는 훈력(勳歷)을 누렸다. 이런 관력과 훈력은 당시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대신이었던 한명회와 더불어,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국제적 안목
그의 경력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을 가졌다는 측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그는 젊은 시절 서장관으로 일본과 중국에 다녀왔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과 통신 수단이 작동하던 그때, 그런 여행은 전 세계를 체험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신숙주는 다시 중국에 주문사(奏聞使)로 파견되어 임명 교서를 받아왔으며, 관직 생활 전체에 걸쳐 중요한 외교문서를 대부분 작성하고 검토했다.
이런 폭넓은 국제적 안목이 산출한 중요한 업적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저술이다. 그 책은 앞서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지어 세종에게 올린 것으로, 1471년(성종 2)에 간행되었다. ‘해동의 여러 나라’는 일본 본토와 큐슈, 쓰시마(대마도), 이키도(壹岐島), 류큐국(琉球國)이다. 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인 그 책은 조선 전기와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의 한일 관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기초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해동제국기]의 표지와 본문 일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밖에도 신숙주는 1460년(세조 6) 강원ㆍ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 정벌에 뛰어난 전과를 올렸으며, [세조실록]과 [예종실록],[동국통감],[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을 주도하는 학문적 업적도 남겼다.
그에 대한 평가
세조는 이런 그를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魏徵)에 견주었고,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신숙주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고 격찬했다(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단종을 저버리고 세조를 선택한 결정일 것이다. 세조의 정난은 도덕적 명분이 희박한 정치적 야심의 소산이 분명했다. 복잡한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현실과 정연한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은 거의 언제나 대립한다. 인간의 선택은 그러므로 대부분 그 사이에서 이뤄진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숙주가 그 모의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성공시킨 사람은 다 알 듯이 한명회였다.
신숙주에게 세조의 집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졌던, 그러니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공식적 삶의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30대 후반의 인재에게 그런 선택은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무의미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그의 경력은 아부나 언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학식과 실무적 능력과 국제적 감각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업적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삶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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