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1815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시에 의한 가곡 [들장미]를 작곡했다. 괴테가 22세 때인 1771년 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1절 가사는 비교적 간명하고 소박하다.
소년이 장미를 보았다.
들판의 장미를.
장미는 어리고 아침이어서 아름다웠다.
소년은 달려가서 가까이 보았다.
기쁨에 차서 보았다.
붉은 장미, 장미,
들판의 장미.
No. | 아티스트 & 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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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말러, [8번 교향곡], [신비의 합창], [일체의 무심한 것은(Alles Vergängliche)] /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레오나르 번스타인(지휘) | |
2 |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중 3악장 / Suisse Romande 오케스트라,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지휘) | |
3 | 토마스, [미뇽] 중 [그대가 아는가 남쪽 나라를(Connais-tu le pays)] /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폴 파레(지휘) |
1분 미리듣기 / 음원제공: 유니버설 뮤직
1829년에는 독일 튀링엔의 작곡가 하인리히 베르너가 같은 시에 곡을 붙여 발표했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도자로 활동한 작곡가였지만, 그가 작곡한 [들장미]는 큰 인기를 끌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곳곳의 합창 모임에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노래를 작곡할 시점에는 같은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 슈베르트의 곡을 포함해 무려 100곡이 넘게 나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르너의 곡은 그 중 ‘인기 1등’을 차지했다. 2박자의 경쾌한 선율을 가진 슈베르트의 곡과 달리 베르너의 노래는 6박자의 잔잔하고 애조를 띤 멜로디로 진행된다.
베르너 ‘들장미’의 인기 비결은 외우기 쉽고 합창으로 부르기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괴테의 시가 지닌 놀라운 인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청춘의 실수가 죄책감으로 표현된 ‘들장미’
음악사를 살펴보면 종종 하나의 동일한 가사 또는 명시(名詩)가 여러 작곡가에 의해 음악작품으로 재탄생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똑같은 문학적 상념이 시대에 따라, 작곡가의 개성과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색채와 분위기로 해석되는 점이 비교의 재미를 준다.
여러 명곡으로 거듭 재해석된 텍스트로는 특히 독일이 자랑하는 고전주의 대문호 괴테의 작품이 많아 흥미롭다. 음악사상의 낭만주의 시대인 19세기를 관통하는 괴테의 거대한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괴테 문학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들장미]는 슈베르트와 베르너의 곡 모두 같은 선율을 1, 2, 3절에 사용하는 유절가곡(有節歌曲)이어서 학교나 노래 동호회에서는 1절만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노래의 2, 3절은 흥미를 갖고 들여다 볼만한 가치가 있다. 1절만을 기억하고 있다가는 깜짝 놀랄 ‘반전’이 있는 것이다.
소년은 말했다. “너를 꺾을 거야. 들판의 장미야.”/ 장미는 말했다. “너를 찌를 거야. 네가 영원히 나를 기억하도록.” (2절)
그리고 소년은 꺾었다. 들판의 장미를./ 장미는 찔렀다. 가시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3절)
이 2, 3절에서는 1절에서 예상하기 힘든 상처와 보복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동요풍의 평화로운 정경이 어떻게 해서 ‘피를 보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괴테의 청춘기 체험과 관련된다.
괴테는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있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시를 짓고 열세 살에 시집을 내는 등 일찌감치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였다. 세상은 때로 예술가의 여성편력을 창조력의 원천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괴테의 일생은 이런 시각에 잘 들어맞는다. 시작된 시기도 빨라서 15세의 나이에 그가 사랑에 빠졌던 그레첸이라는 소녀는 훗날 대작 [파우스트]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형상화된다.
21세 때 괴테는 법학 공부를 마치기 위해 오늘날 프랑스령이 된 스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인근 마을에 놀러 갔다가 목사의 딸이었던 프레데리케 브리온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지만 열 달도 못 되어 괴테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 지역을 떠났다. 프레데리케가 상처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청년 괴테 역시 청순한 소녀의 순정을 짓밟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 기억이 상처와 보복의 드라마인 시 [들장미]로 형상화되었고, 수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노래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프레데리케](1928)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폭풍의 청장년기와 ‘그리움을 아는 이 만이’
초년 법조인 겸 아마추어 문인이었던 괴테의 이름이 전 유럽에 알려진 것은 25세 때인 1774년이었다. 이보다 2년 앞선 23세 때, 그는 법원 업무를 맡아 요한 케스트너라는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된다. 케스트너에게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괴테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폭풍과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괴테는 얼마 뒤 한 친구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빠진 뒤 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게 된다. 이 소재에 자신의 체험을 섞어 쓴 소설이 바로 [젊은 베르터(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이 소설은 순식간에 전 유럽을 강타했다.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질풍노도(Sturm und Drang)’란 감정과다 양식에 들어맞았을 뿐 아니라 이 양식 또는 운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기도 했다. 모방작이 속출했고 주인공 베르터를 상상한 옷차림이 유행했으며 베르터를 모방한 자살까지 속출해 오늘날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의 대중적인 성공은 이후 괴테의 이력을 확고하게 만드는 주춧돌이 되었다. 명성은 선순환하기 마련이고, 이후 ‘문인 괴테’의 활동에 전 유럽이 환호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음악작품으로는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터](1892)가 대표적이다.
이후 26세 때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바이마르로 향한다. 18세로 군주 자리를 이어받은 바이마르의 칼 아우구스투스 공작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는 문인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와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를 이곳으로 불러들여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 작은 나라였지만 힘을 다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그는 10년 만에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 3년간의 긴 여행에 몸을 맡긴다. 이탈리아에서 본 수많은 로마시대 예술품의 균형미는 그가 만년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6년, 이제 47세를 맞이한 괴테는 독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전범으로 평가되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완성한다. 한국어에서 ‘교양’이란 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뜻하는 ‘상태’적인 개념이지만, 독일어의 ‘교양(Bildung)’은 한 사람이 자신을 쌓아(bilden)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개념을 동반한다. 젊은이가 세상 체험을 거치면서 성숙하거나, 혹은 좌초하기도 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그리는 장르가 ‘교양소설’이다.
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제목 그대로 빌헬름 마이스터가 주인공이다. 괴테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듯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빌헬름은 연극배우가 되고자 집을 떠난다. 그는 떠돌이 흥행 곡예단에서 자그마한 소녀 미뇽을 구해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미뇽은 다음과 같은 노래로 대답한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그늘진 가지 아래 금빛 오렌지 익어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푸른 하늘에서 불어오는 곳,
미르테 나무가 높이 가지를 뻗고 서있는 곳을?
그대 아는가?
그곳으로, 그곳으로
사랑이여, 함께 가고파라!
이 시에 의한 가곡으로는 슈베르트의 [미뇽의 노래] Op.62가 알려져 있으며 베토벤과 리스트, 프랑스의 앙리 뒤파르크도 같은 가사에 의한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 시에 의한 가장 유명한 노래는 프랑스의 앙브루아즈 토마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소재로 1866년 발표한 오페라 [미뇽]의 아리아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나라를(Connais-tu le pays)]이다. 플루트의 아늑한 전주에 이어 미뇽 역의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하는, 동경에 가득 찬 6박자의 선율이 펼쳐진다.
그러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가장 많이 음악 작품으로 형상화된 시는 미뇽이 부르는 [그리움을 아는 이 만이(Nur wer die Sehnsucht kennt)]다. 내면의 불타는 열정과, 그 열정이 가져오는 고통을 작은 소녀의 노래답게 소박하게 형상화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탈리아’라는 곳에서 한없는 밝음을 생각하지만, 20세기 초의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로 괴테 역시 ‘이탈리아’라는 관념으로부터 때로 음울하기까지 한 어지러운 열정을 떠올렸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안다.
모든 기쁨에서
홀로 동떨어져
저 창공을 바라본다.
아, 나를 사랑하고 아는 이
먼 곳에 있구나!
어지럽고, 속은 타들어가는 듯.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안다.
빈 고전주의 시대의 베토벤을 비롯해 중기 낭만주의의 슈만, 20세기 초의 볼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이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을 남겼다. 슈베르트는 심지어 이 가사로 가곡을 네 곡이나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나중에 작곡된 D. 877-4의 번호가 붙은 곡이 가장 널리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독일어권 작곡가들의 [그리움을 아는 이 만이]를 넘어 가장 사랑받는 곡은 놀랍게도 러시아의 대가 차이콥스키의 것이다. 그는 작곡 생활 초기인 1869년 이 곡을 ‘6개의 로망스’ 작품 6의 마지막 곡으로 발표했다. 러시아어 번역시에 곡을 붙였지만 독일어 원시에도 선율은 잘 들어맞는다. 특히 차이콥스키가 이후 일생 동안 ‘비탄, 슬픔, 좌절’을 나타낼 때 즐겨 사용한 일곱 음표의 하행 선율을 눈에 띄게 사용해 깊은 인상을 준다.
인간구원을 추구한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
살펴보았듯, 또한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괴테의 작품세계는 자기 자신의 삶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 초기의 [들장미]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자신과 사랑의 열정 밖에 몰랐던 젊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는 개인의 발전이라는 문제에 눈을 돌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인간 구원’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몰두하게 된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60년이 걸린 대작 [파우스트]다.
이 작품 역시 젊음과 육욕이라는 철두철미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 좌절한 노박사 파우스트는 청춘을 되찾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를 한다. 악마가 청춘을 되돌려주는 대신 이후에 너무도 완벽한 시간이 주어져서 그가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는 거래다.
결국 파우스트는 ‘멈추어라 순간이여’를 외쳐 악마에게 끌려간다. 어떤 완전한 순간이 그를 몰아의 순간으로 데려갔을까. 결국 육욕이었을까, 또는 재산이나 명예였을까.
모두 아니었다. 모든 쾌락에 싫증이 난 파우스트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시작한다. 공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땅을 일구고 행복하게 살 것을 예감하면서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외친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혼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함께 하는데 있다는 것을 괴테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생을 거쳐 육체적 쾌락과 예술적 성취, 권력까지도 모두 가져보았던 그가 일생을 투입해 완성한 역작의 결론이었다.
악마에게 끌려간 파우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던 그레첸의 청원을 성모가 받아들여 그는 구원을 얻는다. 청원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의중이었던 듯, 작품 속에서 천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분투하는 한 길을 잃는다. 끊임없이 분투하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이 대작은 [신비의 합창(Chorus Mysticus)]으로 끝을 맺는데, 그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모든 지나갈 것은
한낱 비유이니
다다를 수 없는 것
여기서 실현되었고
형용할 수 없는 것
여기서 이루어졌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
이 명문이 뜻하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을 포용하는 힘, 성모와 같은 자비로움,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일까? 그 해석은 수 세기 동안 이 문장을 붙들고 분투해온 괴테 연구자들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괴테는 이 필생의 거작을 1831년 탈고했고 사후에 발표하도록 지시한 뒤 이듬해 83세로 사망했다. 25년 뒤인 1857년, 리스트가 3개 악장으로 된 [파우스트 교향곡]을 발표했다. 각 악장은 ‘파우스트’, ‘그레첸’, ‘메피스토’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으며 3악장 마지막에 합창단이 가세해 [신비의 합창]을 노래한다. ‘신비의 합창’이라는 표현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해 테너 솔로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를 강조하듯이 노래한 뒤 점차 고조되어 끝을 맺는다.
이 곡으로부터 53년, 괴테의 [파우스트] 완성으로부터 79년 뒤인 1910년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이른바 ‘1000명의 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8번]을 발표했다. 독창자만 8명에 완전 편성의 성인합창단 둘, 별도의 어린이 합창단, 표준적인 2관 편성 오케스트라의 2.5배 규모인 5관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필요해 그야말로 수백 명이 연주에 필요한 대곡이었다. 전 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반 2부에서 말러는 파우스트가 구원을 받는 괴테 파우스트 2부 종막(終幕)의 장면을 가사로 사용했다. 이 장면의 끝에 [신비의 합창]이 나오므로 괴테의 가사를 사용한 규모는 말러의 곡 쪽이 훨씬 많다.
리스트의 곡과 비교되는 마지막 [신비의 합창]은 전체 합창이 극도로 음량을 줄여 ‘숨 쉬듯이’ 고요히 시작한다. ‘이끌어 올리노라’라는 가사를 두 소프라노 독창자가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켜 전체 합창과 관현악이 온 힘을 다해 펼쳐내는 침착한 템포의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간다. 말러 자신은 이 곡에 대해 지인에게 “우주가 메아리치고 소리를 내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라고 설명했다.
괴테 작품 외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인 텍스트
물론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인 시 또는 문학작품으로 괴테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uckert, 1788~1866)는 동양어학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여러 민족 사이에서 보편적인 정서를 시로 형상화하고자 했고, 슈만과 슈베르트, 브람스 등이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여러 가곡을 작곡했다. 슈만의 가곡집 [미르테 꽃], 말러의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이 뤼케르트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말러의 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중 마지막 곡의 제목은 ‘그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이다.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한다면,/ 오 나를 사랑하지 마셔요!/ 태양을 사랑하셔요./ 금빛 머리카락이 있으니까!’라는 1절을 비롯해 젊음 때문에 사랑한다면 봄을, 귀함 때문이라면 차라리 진주를 많이 가진 인어를 사랑하라는 가사가 이어진다. 말러에 앞서 슈만의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으며 여성 작곡가로는 희귀한 존재였던 클라라 슈만도 같은 시에 피아노 반주를 붙여 발표했다.
같은 가사에 의한 여러 다양한 작곡가들의 작법을 본격적으로 감상하려면 레퀴엠(장송미사곡)을 포함한 미사곡을 듣는 것도 권할 만하다. 미사곡에는 [키리에(자비를 베푸소서)], [글로리아(하느님께 영광)], [크레도(사도신경)], [상투스(거룩하시다)], [아뉴스 데이(신의 어린 양)] 등 가사가 정해진 다섯 부분의 통상문이 있어 미사곡을 작곡하는 모든 작곡가는 이 텍스트를 음악으로 표현하게 된다. 레퀴엠의 경우 [글로리아]와 [크레도]가 빠지며 [디에스 이레(분노의 날)]로 시작해 [라크리모사(눈물의 날)]로 끝나는 세쿠엔차(속창)이 들어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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