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선율

모든 걸 잃은 여인의 아리아 - 희곡 앙젤로, 파도바의 폭군과 오페라 라 조콘다

히메스타 2016. 12. 21. 09:58

 

 

174센티미터의 키에 90킬로그램을 웃도는 거구의 그리스계 소프라노가 1947년 6월 미국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 소프라노는 오페라의 신대륙에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단 한 건의 공연 계약도 성사되지 못했다. 시카고에서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투란도트(Turandot)]에 출연하기로 하고 리허설까지 마쳤지만, 합창단 노조에서 출연료 지급에 필요한 보증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막판에 공연이 무산되고 말았다.

음악리스트
No. 아티스트 & 연주
1 폰키엘리, 오페라 [라 조콘다] 중 [자살(Suicidio)] / 몽세라 카바예, 내셔널 필라모닉 오케스트라, 브루노 바르톨레티(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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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조콘다] 리허설 장면, 1979년

신의 계시와 같은 오디션 무대

 

실의에 빠져 있던 이 소프라노에게 이탈리아 베로나 페스티벌(Verona opera festival)에 출연할 성악가를 뽑는 오디션에 참가해보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축제 예술감독인 이탈리아의 테너 조반니 체나텔로(Giovanni Zenatello, 1876-1949)가 아밀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 1834-86)의 오페라 [라 조콘다(La Gioconda)]에서 여주인공을 맡을 소프라노를 찾는 것이었다. 기원후 1세기에 건립된 베로나 오페라 극장은 빼어난 음향으로 최대 3만 명까지 수용 가능한 야외 공연장이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그리스 아테네 음악원에서 공부했던 이 소프라노는 그때까지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무대를 밟아본 경험이 없었다.

이 소프라노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라 조콘다]의 아리아 [자살(Suicidio)]을 불렀다. 오디션에서 노래를 듣던 체나텔로는 일흔의 나이도 잊은 채 오페라 악보를 넘기더니 테너와 소프라노의 4막 이중창을 함께 불렀다. 체나텔로는 “오디션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받은 듯했다”라고 회고했다. 신인 소프라노는 그 자리에서 오디션에 합격했다. 당시 24세의 이 소프라노의 이름은 안나 마리아 소피아 칼로게로풀로스. 훗날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77)였다.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극장의 모습

마리아 칼라스의 두 남자

 

고대했던 이탈리아 데뷔 무대였지만, 공연 직후의 리뷰는 다소 엇갈렸다.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며 개성적 특징을 지닌 금속성 목소리”라는 호평처럼, 칼라스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고음은 당시에도 두드러졌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보다 중요했던 것은 칼라스가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그 한 남자가 칼라스의 진가를 처음으로 알아본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 1878-1968)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칼라스의 첫 남편이 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 1896-1981)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지낸 세라핀은 칼라스의 목소리를 들은 뒤 “이처럼 풍성한 성량과 배짱을 지닌 소녀라면 베로나 같은 대형 야외무대에서 엄청난 충격을 출 것이라 확신했다”라고 말했다. 실제 베로나 공연 직후, 칼라스는 세라핀의 지휘로 베니스 오페라 극장에 서면서 이탈리아 음악계에서 발판을 다졌다.

베로나 출신의 메네기니는 이탈리아 전역에 10여 개의 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건축 자재업자이자 오페라 애호가였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독신남이었지만 그는 첫 만찬 이후 27세 연하의 칼라스에게 후원자를 자처하며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다음 날 입을 옷이 없어서 저녁마다 단벌 블라우스를 빨곤 했던 칼라스가 쇼핑의 즐거움에 빠져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들은 1949년 결혼했고 그 뒤 칼라스는 마리아 메네기니 칼라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1959년 칼라스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떠날 때까지 10년간 지속됐다.

폰키엘리,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교

 

칼라스에게 이탈리아 데뷔 기회를 선사한 [라 조콘다]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폰키엘리의 작품이다. 스트라디바리(Stradivari)와 과르넬리(Guarneri) 같은 현악기 제조 명가의 본산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의 인근 파데르노가 작곡가의 고향이다. 인구 1400여 명의 이 마을은 작곡가를 기념해서 지금도 ‘파데르노 폰키엘리’로 불린다. 크레모나 오페라 극장도 1907년 작곡가의 이름을 따서 ‘폰키엘리 극장’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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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파데르노에 자리한 폰키엘리 극장 외관

2 폰키엘리 극장 내부 모습

폰키엘리의 초상

지역 성당 오르간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난 폰키엘리는 9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고 이듬해 첫 교향곡을 작곡한 전형적인 음악 영재였다. 하지만 음악원 졸업 직후의 초반 경력은 보잘것없었다. 고향 크레모나 등에서 오르간 연주자나 브라스밴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200여 곡의 관악 합주곡을 틈틈이 썼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국부()’로 추앙받았던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점도 작곡가로서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는 총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지금까지 오페라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는 작품은 [라 조콘다] 한 편뿐이다. 하지만 스승으로서 그는 1881년 모교인 밀라노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 뒤, 푸치니와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요컨대 폰키엘리는 음악적으로 베르디와 푸치니 세대를 이어주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교 역할’을 했다.

[시간의 춤], 화려한 볼거리

 

그의 출세작이자 유일한 성공작으로 남은 [라 조콘다]는 오페라 여주인공인 여가수의 이름이자 ‘즐거운 여인’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콘다는 제노바의 공작 엔초를 사랑하지만, 엔초는 베니스 종교재판관 알비세의 부인이 된 라우라를 잊지 못한다.

여기에 종교재판관 알비세까지 얽히면서 오페라는 팽팽한 4각 관계를 형성한다. 작품의 비중이 한두 명의 주역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음역이 다른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인 긴장 관계를 구성하면서 치밀한 심리 드라마를 빚어내는 건, 베르디 중후기 걸작의 특징이기도 했다.

오페라 [라 조콘다] 대본의 표지, 1876년

정작 작품에서 관객을 매료시켰던 건 3막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발레곡인 [시간의 춤]이었다. 오페라 중간에 발레를 삽입해서 화려한 볼거리를 강조하는 특징은,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극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가로막고 표면적인 효과만을 노린다는 비판 때문에 19세기 말에 자취를 감췄지만, 이 작품에서는 결말 직전의 클라이맥스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1922년 소설 『율리시스』에서 주인공이 떠올렸던 선율도, 1940년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환타지아] 가운데 타조와 하마, 악어와 코끼리의 군무 장면에서 흘렀던 곡도 [시간의 춤]이었다. 시쳇말로 ‘불세출의 히트곡’이 된 것이었다. 예전에는 콜레스테롤의 주범으로 인식됐던 소고기의 지방이 육류 등급 분류의 기준인 마블링이 된 것처럼, 프랑스의 구시대 음악 유산이 오히려 작품을 살려주는 매력 포인트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라 조콘다]에 스민 베르디의 흔적

 

폰키엘리의 이 작품은 베르디 오페라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 유력한 물증이 원작자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85)와 대본 작가인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 1842-1918)였다. 셰익스피어와 월터 스코트 등 문학 작품에서 오페라의 소재를 즐겨 찾았던 베르디는 『에르나니(Ernani)』와 『환락의 왕(Le Roi S’amuse)』 등 위고의 희곡도 빼놓지 않고 오페라로 옮겼다.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는 위고의 희곡 『앙젤로, 파도바의 폭군(Angelo, Tyrant of Padua)』을 원작으로 보이토가 쓴 대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보이토는 [오텔로(Otello)]와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 등 작곡가의 말년에 두 차례 호흡을 맞췄던 대본 작가다. 어쩌면 위고 원작과 보이토 대본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최고의 ‘흥행 공식’인지도 몰랐다. 폰키엘리는 “오직 진정으로 뛰어난 대본만이 작곡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며, 그럴 때 작곡가는 대본에 전념해야 한다”라고 편지에 적었다.

위고의 희곡과 베르디의 오페라는 등장인물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차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희곡의 제목에 등장하는 앙젤로는 베니스에서 파도바로 파견한 총독으로, 오페라에서는 알비세에 해당한다. 사랑과 욕망, 배반과 음모가 뒤엉켜 파국으로 치닫는 드라마의 전개 방식은 위고 희곡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고결한 여성상

 

오히려 이 희곡에서 두드러진 차별점은 여주인공인 티스브(오페라의 조콘다)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티스브는 로돌포(오페라의 엔초)를 사랑하지만, 로돌포는 파도바의 독재자 앙젤로의 아내인 카타리나를 잊지 못한다. 결국 티스브는 카타리나와 연적() 관계가 됐지만, 카타리나가 자신의 눈먼 어머니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티스브는 이들의 탈출을 도운 뒤 죽음을 택한다. 특히 티스브의 고결한 희생은 극중 남성들이 그 어떤 고뇌나 갈등도 보여주지 않는 평면적인 인간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의 꼽추 카지모도와 『환락의 왕』의 궁정 대처럼 위고의 작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여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희곡에서만큼은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었다.

악보를 연구하는 마리아 칼라스의 모습

작곡가 폰키엘리는 음악적으도 오페라의 기존 공식을 뒤집었다. 이전까지 오페라에서는 음역이 높은 소프라노가 공주 역할, 상대적으로 음역이 낮은 메조소프라노는 시녀나 악녀 역할을 맡는 것이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하지만 폰키엘리는 [라 조콘다]에서 거꾸로 소프라노에게 조콘다 역을, 메조소프라노에게 라우라 역을 맡겼다. 이런 반전()을 통해 이전 오페라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소프라노 배역이 탄생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양보하고 목숨까지 희생하는 고결한 여인상이었다. 이전까지 소프라노의 역할은 모든 걸 갖고도 고마운 마음조차 내색하지 않는 ‘깍쟁이’가 많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라 조콘다]를 통해 이탈리아에 데뷔했던 칼라스는 평생 13차례 이 작품을 무대에서 공연했다. 1952년과 1959년 두 차례 전곡 음반으로도 녹음할 만큼 애정을 쏟았다. 칼라스의 전성기는 눈부셨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1959년 7월 메네기니와 칼라스 부부는 선박왕 오나시스의 초청으로 3주간의 요트 여행에 동승했다. 5층 높이의 이 대형 요트는 프랑스와 그리스 전문 요리사와 웨이터, 재봉사와 안마사까지 60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바다 위의 궁전’이었다. 칼라스의 가방에는 벨리니의 오페라 악보가 들어 있었지만, 칼라스는 그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이 여행에서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불과 넉 달 뒤에 메네기니와 칼라스는 10년간의 부부 관계를 청산했다.

이 사랑의 치명적인 역설

 

그 무렵 칼라스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어서 그런지 활기차고 매력 넘치는 오나시스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던 그날,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된 듯했다"라고 설레는 감정을 기록했다. 노래 대신에 사랑을 택한 셈이었지만, 정작 노래하지 않는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사랑의 치명적인 역설이었다. 칼라스는 1965년 파리와 런던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극장에 이른 작별을 고한 이후에는 리사이틀 무대에만 간간이 섰다.

오나시스는 2년 뒤 칼라스를 떠났고, 이듬해인 1968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식을 올렸다. 칼라스는 인터뷰에서 “그의 곁에 있으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된다. 맨 처음에는 체중을 잃었고, 그다음에는 목소리를 잃었으며, 이제는 오나시스마저 잃었다”라고 말했다. 칼라스는 오랜 친구인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1974년 한국과 일본이 포함된 마지막 순회공연을 마친 뒤 파리의 아파트에 칩거했다. 그녀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비극적 오페라가 된 것이었다. 1977년 칼라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 전 남편 메네기니가 공개한 칼라스의 메모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너뿐이구나. 너만 나를 유혹하는구나. 내 운명의 마지막 목소리, 내 여행의 마지막 십자가여.”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아리아 [자살]이었다. 이탈리아 베로나 축제의 출연자를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에서 칼라스가 불렀던 바로 그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