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뻗은 뿔 때문에 가시덤불에 걸려 사자의 먹이가 된 사슴의 우화처럼, 때로는 빼어난 재능이 불행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전근대에서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집단은 왕족과 서얼일 것이다. 전자는 너무 높은 신분 때문에, 후자는 어머니의 낮은 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학문과 예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자신보다 더욱 커다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에게 희생된 불운한 왕자였다.
출생과 성장
안평대군의 이름은 이용(李瑢)이고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 등이다. 잘 알 듯이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이었다. 세종은 정비(소헌왕후) 1명과 빈 7명에게서 모두 18남 4녀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그밖에도 일찍 사망한 2녀가 있었다). 대군(大君)만 8명이었는데,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특히 1~3남이 가장 유명한데, 순서대로 문종(1414년 출생)·세조(1417년 출생)·안평대군(1418년 출생)이다.
안평대군은 1418년(세종 즉위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인 1428년(세종 10)에 안평대군으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1월 20일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 영일(迎日) 정씨와 혼인했다. 1430년(세종 12)에는 형 수양대군, 동생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상찬했다고 한다.
문무의 경력들
성인이 된 뒤부터 안평대군은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우선 세종의 북방 개척과 관련된 사실이다. 1438년(세종 20) 3월, 세종은 새로 확보한 사진(四鎭)의 백성을 서용하고 경재소(京在所)를 설치했는데, 그 업무를 종친에게 맡겼다. 이때 안평대군은 회령(會寧)을 맡았다.
그가 좀더 두드러진 실력을 발휘한 분야는 문한(文翰- 문필에 관한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1441년 수양대군과 함께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을 감독했고,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등이 [운회(韻會)]를 번역하는데, 세자인 문종과 함께 그 일을 관장했다. 이듬해에도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감수해 3년 만에 완성했다. 대군이라는 지위상 자료의 조사나 집필·번역 등을 직접 맡지는 않고 감독이나 감수만 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이 없다면 아무리 왕자라도 그런 임무를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뛰어난 예술적 성취
널리 알려졌듯이 그가 가장 출중한 능력을 보인 분야는 서예를 포함한 예술이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에 특히 뛰어났는데, 중국 황제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8월 중국 사신 윤봉(尹鳳)과 정선(鄭善)은 황제가 안평대군의 글씨를 구하니 얻어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역대제왕 명현집], [왕희지 진행초(眞行草)] 등의 서법 판본을 바쳤고,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부왕 세종의 영릉(英陵) 신도비에 글씨를 썼다(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지었다).
대군이라는 특수한 지위가 적지 않게 작용했겠지만, 뛰어난 서예가답게 안평대군은 많은 서화를 수장하고 발주한 예술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다.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 <화기(畵記)>에 따르면, 그는 200점이 넘는 서화를 수장했는데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 서화가의 명적(名蹟- 이름난 유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솜씨를 연마했고, 때로는 친분이 있는 인물들에게 빌려주어 당시 예술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의 글씨. [몽유도원도] 발문의 부분으로, 작품의 제작 과정을 적어두었다.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제목 및 시문.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
그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방금 말한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 것이다. 그 그림은 1447년(세종 29) 4월 20일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닌 꿈을 안견에게 말해 그려진 작품이다. 그의 설명을 들은 안견은 사흘만에 그림을 완성했고, 그 그림에 안평대군은 발문 (跋文)1)을 적었다. 지금은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되어 있지만, 그 작품은 조선시대의 회화와 서예가 가장 행복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계유정난과 죽음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를 사실상 결정지은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다. 수양대군 일파는 안평대군이 황보인ㆍ김종서 등 대신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려는 음모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거사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이 제시한 증거는 1년 전 6월 김종서가 안평대군에게 주었다는 한편의 시였다.
큰 하늘은 본래 고요하고 공허하니, 현묘한 조화를 누구에게 물으랴(大空本寂寥, 玄化憑誰訊).
사람의 일이 진실로 어그러지지 않으면, 비오고 볕나는 것이 그로 말미암아 순응한다(人事苟不差, 雨暘由玆順).
바람을 따라 도리(桃李)에 부딪히면, 화사하게 꽃소식을 재촉한다(隨風着桃李, 灼灼催花信).
촉촉한 윤기가 보리밭을 적시면, 온 땅이 고르게 윤택해지리(沾濡及麥隴, 率土均澤潤).
그들은 이것이 김종서가 안평대군에게 인심을 모아 반역을 꾀하라고 몰래 재촉한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남이(南怡)가 역모로 처형된 빌미가 된 두만강 시처럼, 이 시에서도 모반의 의지를 읽어내려면 매우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안평대군 태실. 야사에 따르면 세조가 계유정난 후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자신에게 반대한 형재들의 태실과 비석을 파괴했다고 한다. 현재의 유적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소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아무튼 정난 이후 안평대군의 운명은 즉시 결정되었다. 그는 당일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8일만에 36세의 나이로 사사된 것이다(1453년 10월 18일). 단종과 마찬가지로 그가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안평대군은 1747년(영조 23) 복관(復官)되었고, 1758년(영조 34) 시호와 제사가 올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 때 절의를 지켰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봉사손(奉祀孫-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과 후손을 등용케 하고 장릉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었다.
안평대군이 실제로 모반의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가장 정확한 사실은 그때 가장 적극적인 권력 의지를 가진 부류는 세조와 그의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뛰어난 젊은 예술가ㆍ수장가는 ‘안평(安平)’이라는 자신의 이름과는 반대로 정치 투쟁에 희생되는 비극적 운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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