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조선에서 끌려간 일본 자기의 시조 - 이삼평

히메스타 2016. 12. 9. 10:35

 

이삼평 이미지 1

왜군에 사로잡혀 이삼평에서 가나가에 산베이로

일본이 자랑하는 사가()현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 출생년 미상~1655). 그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히젠 국() 사가 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 1536~1618)의 군대에 사로잡혔다. 나베시마는 임진왜란 때에도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삼평이 조선에 살 때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출생지가 충남 공주(1990년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기념비가 세워짐)로 추정되지만, 경남 김해설과 전북 남원설도 있다. 공주 근처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도편()들과 아리타 지역의 초기 도편들이 같다는 점이 공주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나베시마의 사위이자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이삼평은 가나가에 산베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는데, 출신지 공주의 금강()에서 한자를 바꾸고 ‘삼평’이라는 조선 이름의 발음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가나가에 산베이, 즉 이삼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653년경의 기록으로, 이삼평 자신이 다쿠 가문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삼평은 일본에 도착한 다음 몇 년간 다쿠 야스토시를 위해 일했으며, 18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쿠 지역에서 아리타로 1616년에 이주했다.

일부 학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에도 큐슈 사가현 북부 가라쓰()의 하타() 가문 영지에 조선인 자기장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다 가라쓰의 하타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생산 시설이 파괴되고 장인들도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 앞서 언급한 기록에는 이삼평과 함께 이주한 18명 중 ‘다쿠에 본래 있던 도공들’ 3명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에 와 있던 조선 자기장들이라는 추측이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이삼평이 본래 자기장이 아니었으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기술을 배웠으리라 보기도 하지만 근거가 희박한 추측이다.

이삼평의 일본 최초 자기 생산과 아리타 자기의 발전

이삼평이 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 나베시마의 영지 일대를 전전하다가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에서 자기의 태토(- 도자기를 만드는데 바탕이 되는 흙)가 되는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하고, ‘덴구다니요()’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기를 생산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이삼평이 도조()로 추앙받는 이유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이 요(-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를 연지 300주년이 되던 1917년에 이삼평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을 시작으로 아리타 지역에는 자기 가마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에 나베시마번 측은 어지러워진 생산 체계를 정리하고 자기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자기장들을 중심으로 13개의 가마로 재편했다. 또한 가마들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효율적인 분업 체계를 만들었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 이후 나베시마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ㆍ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0년 1백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했다. 일본 최초의 자기 수출이었다. 이후 1659년에는 5만6천7백 개의 아리타 자기를 주문했다. 유럽에 대량 수출된 아리타 자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일본 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세기 중후반 당시 중국은 이른바 명청() 교체기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오삼계()의 반란까지 일어나 자기 생산과 수출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정세도 아리타 자기의 유럽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아리타 자기를 이마리() 자기라고도 하는데, 아리타에서 가까운 이마리 항구로 옮겨 출하했기 때문이다.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개의 아리타 자기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독일의 츠빙거 궁전을 재현해 만든 아리타 포세린파크(Arita Porcelain Park). 도자기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로,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들을 전시해놓았다. <출처: (cc) mahlerw at commons.wikimedia.org>

오늘날 아리타의 아리타 포세린파크(도자기공원)에는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궁전을 본 딴 전시관이 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아우구스트 2세)는 동양 문물에 심취하여 츠빙거 궁전 안에 인도궁, 일본궁 등을 조성하고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수집했다. 이 가운에 일본궁은 오늘날 도자 갤러리 구실을 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도자 수집품 가운데 아리타 자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리타 자기는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동양 취미 붐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까지 도자기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앞선 생산기술을 보유한 조선과 그렇지 못한 일본의 관계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끌려간 조선 자기장들을 바탕으로 기술 혁신을 이룬 일본에서 도자기 산업이 번성하면서부터 그 관계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19세기 유럽에서 자동화된 생산기계를 수입하여 대량 생산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조선과의 격차를 넓혔다. 결국 19세기 말부터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도자기 제품이 조선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도자기 전쟁’과 조선의 자기장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할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자기장들을 사로잡아 데려가고 조선의 도자기를 가져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자기 전쟁’에서 범위를 넓히면 ‘문화 약탈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도서부(전적), 공예부(장인), 포로부(한의사, 젊은 남녀), 금속부(병기, 금속 예술품), 보물부(금은보화), 축부(가축) 등의 별도 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과 인력을 약탈했던 것이다. 다카도리야키(), 사쓰마야키(), 아카노야키() 등 일본의 많은 주요 도자기 생산지들이 끌려온 조선 자기장들에 의해 발전했다. (‘도공’이라는 표현은 주로 일본에서 많이 쓰며 자기장, 사기장, 장인 등의 표현이 적합하다는 주장이 있다.)

아리타 도잔 신사에 위치한 도조 이삼평 비. 1917년 아리타 자기 3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출처: STA3816 at en.wikipedia.org>

아리타 지역에서도 이삼평 외에 조선에서 끌려온 김해 출신 여성 자기장 백파선()이 활동했다. 백파선은 김해의 자기장 김태도()의 아내였다. 이들은 사가현 서부 다케오() 지역에서 자기장 집단을 이끌며 생산을 하다가 김태도가 세상을 떠났고, 아리타 지역을 집중 육성하려는 나베시마번 측의 결정으로 아리타로 이주했다. 아리타의 호온지()에는 백파선의 후손이 세운 법탑()이 서 있다.

조선 자기장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일본은 도기 생산에 만족해야 했고 기술적으로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생산 재료, 가마의 구조, 제작 기법, 안료 개발 등 많은 측면에서 조선 자기장들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을 혁신시켰다. 이마리에는 조선 자기장들의 넋을 기리는 도공무연탑()이 서 있다. 이삼평이나 백파선처럼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자기장은 극소수였고, 대다수 조선 자기장들은 끌려간 타향에서 문자 그대로 무연(), 즉 이름도 자취도 연고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왜군에 적극 협조하고 자진하여 일본에 갔다는 주장

‘분로쿠(祿) 원년(1592)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의 분로쿠의 역() 당시 히젠() 번도 전쟁에 참가했다. 그 때 공(이삼평)은 우리 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 비문의 일부다. 일본에서 ‘분로쿠의 역’은 임진왜란을 뜻하며 정유재란은 ‘게이초()의 역()’이라 불리기도 한다. 비문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부분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이삼평이 왜군에 적극 협조한 탓에 나중에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일본에 가기를 원했다는 일본 측 기록도 있다.

이삼평이 왜군의 강압으로 길을 안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왜군이 스스로 원하는 사람만을 일본으로 데려가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놓아주었을 리도 없다. 요컨대 이삼평 자신의 뜻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의 운명은 오로지 왜군 손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비문에 나오는 ‘매우 적극적으로’라는 표현은 엄연히 일본인으로 살아 온 후손들이나 일본 측 입장과 관점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광해군 9년(1617)에 일본에 간 이경직(()이 남긴 [부상록]()에는 “교토에 도착하여 조선인 여럿을 만났지만 귀국을 바라는 이는 극히 적었다. 거듭 간곡하게 타일렀지만 의혹을 푸는 이도 극히 드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끌려갔지만 이미 일본 땅에 20년 가까이 정착한 상태에서 귀국하는 것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었던 것이다.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한 이들의 처지가 매우 어렵고 조선 조정이 별다른 배려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