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명 재상 - 유성룡

히메스타 2016. 12. 8. 14:06

안동을 대표하는 퇴계의 제자

서애(西) 유성룡(, 1542~1607)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유운룡(1539-1601)이다. 부친인 유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학자가 될 꿈을 갖고 성장하던 중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1562년 가을, 21세의 유성룡은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유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 김성일(,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유성룡은 스승인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스승인 이황 선생을 통해 유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 [근사록()]이었다. [근사록]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와 여조겸()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근사록]은 향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출세 가도를 달리다

과거시험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유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시험인 생원과 진사시에 ,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울러 인종(, 조선 12대왕. 중종의 장남)을 문소전(왕의 신주가 모셔진 곳)에 배향하는데 있어 공론을 형성했던 공로도 작용했다. 30세 때는 병조좌랑에, 그리고 이조좌랑을 거치는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상을 마친 1576년 유성룡은 사간원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유성룡은 타고난 경세가()로 알려져 있는데, 1607년(선조 40)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할 때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하여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고, 귀국한 뒤에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생활에서 승문원권지부정자라는 첫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으며,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성룡이 벼슬살이 하는 동안 조정은 동인()과 서인(西)으로 갈라져 논란이 생기는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47세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는 이때를 전후로 고위관료가 되는데, 이 무렵 동인계의 기축옥사(정여립()의 반란)가 일어났다. 정여립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정은 서인 천하가 되었다. 선조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에 속하는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서인의 좌장격인 정철이 귀양을 가면서 동인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러한 정국에서 유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유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유성룡은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했지만, 이는 뒷날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는 빌미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낙향

서애 유성룡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안동 병산서원.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존덕사’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유성룡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벼슬에 올라 풍원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은 유성룡은 영의정 자리를 되찾아 1598년까지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억울함을 안고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으나,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

고향인 하회에서 은거하는 동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관직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아 7년간 왕의 부름에도 거절하며 고향을 지켰다. 그러는 가운데 1601년 청백리에 녹선(錄- 벼슬을 추천하여 관리로 뽑음)되었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의 저술을 마쳤다. 그리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라는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가 모친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시 하회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가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유성룡은 “사람들이 이욕()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곳이든지 살 수 있다”라며 자식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도 했다.

1607년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향년 66세로 그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유성룡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승지를 직접 보내 조문하도록 했다. 상인들은 4일간 장사를 하지 않으며 경세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또 서울 옛집이 자리했던 묵사동에는 약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현재 병산서원ㆍ남계서원ㆍ도남서원ㆍ삼강서원ㆍ빙계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 등 전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1712년 조정에서 이 책의 일본 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성룡은 선견지명적인 인재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출사()하여 최고 관직까지 오른 탓에 비교적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업적 또한 평가절하 당한 면이 많다. 그러한 배경에는 붕당싸움()과 임진왜란이라는 내우외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에게 더욱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훈련도감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5군영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영으로 성장했으며,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그의 선구적인 정책 또한 훗날 대동법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왜란을 통해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국가 개혁을 위해 생각했던 것은 실로 방대하였다.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새로운 시책을 추진했고, 염업, 수산물 유통 등 물자의 수급조절과 품질향상에 관련된 실용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보낸 것은 선견지명이었다.

위로는 퇴계 이황의 사상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조선 후기 실학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한 경세가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재상으로서 그가 가진 경험과 식견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