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폭력과 참혹한 피해를 수반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교류에도 중요하게 기여한다. 그리고 역사상 많은 영웅들은 전쟁의 산물이었다. 이런 모순적 진실은 인간과 역사의 양면성을 착잡하지만 또렷하게 보여준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란은 임진왜란이었다. 흔히 양란이라고 불리는 호란과 그것은 전쟁의 기간, 전장의 범위, 피해의 규모, 전개의 과정, 결과와 영향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사뭇 달랐다. 호란과 달리 왜란은 전면적이었고 장기전이었으며, 따라서 피해와 파괴의 결과도 그만큼 거대했다.
권율(權慄, 1537~1599)은 거의 멸망할 뻔한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하게 기여한 대표적 장수였다. 그가 지휘한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승전의 하나로 손꼽힌다.
훌륭한 가문
권율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그의 9대조는 고려 후기의 유명한 문신인 권부(權溥)였다. 권부는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며, 특히 당시의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의 장인이었다.
권율의 조부는 강화부사(정3품)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1503~1578),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영의정이라는 관직이 상징하듯이, 권철은 명종 때부터 선조 초반까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신하였다.
권율의 가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그의 사위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었다는 것이다. '오성과 한음'으로도 널리 알려졌듯이, 이항복은 영의정까지 역임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신이었다.
다소 늦은 출세
권율의 출세는 다소 늦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에 4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의 평균 수명과 보통 30세 전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통계에 비추어 이것은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성적도 상위가 아니라 중후위에 걸쳐 있는 병과(丙科, 11~33등)였다.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 정9품)로 벼슬을 출발해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사헌부 감찰(監察, 종6품)·예조좌랑(정6품)·호조정랑(정5품)·전라도 도사(都事, 정5품)·경성판관(종5품) 등의 관직을 거쳤다. 급제한 나이로 보나 이런 관력으로 보나 그의 출세가 그리 화려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당시의 나이로 보면 노년일 55세 때 자신의 일생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거대한 영향을 준 전란을 맞았다. 그는 거기서 출중한 전공을 세웠고,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
왜란의 발발과 승전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권율은 호조정랑이었다가 서북 지역의 최변방인 의주(義州)목사로 발령되었지만 이듬해에 해직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왜란이 일어났을 때, 관직을 떠나 있던 것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광주(光州)목사에 제수되었다. 아마도 이전에 전라도 도사였던 경력이 참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잘 알듯이 왜란의 초기 전황은 도성이 개전 한 달 만에 함락될 정도로 속수무책의 패배였다. 왜군의 침략에서 무사한 지역은 전라도밖에 없었다. 권율은 거기에 일익(一翼)을 담당했다.
권율은 처음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으로 배속되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수원·용인 부근에 이르렀을 때 권율은 지공(遲攻)을 건의했지만, 이광 등 수뇌부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패였다. 권율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물러나 기회를 기다렸다.
처음이자 중요한 전공은 이치(梨峙, 배재) 전투였다. 개전 석 달 째인 1592년 7월 8일, 권율과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은 금산(錦山) 서쪽의 이치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을 맞았다. 그때 일본군은 전주(全州)를 함락시키기 위해 웅치(熊峙)와 금산으로도 진군하고 있었다. 두 곳에서는 왜군에 패배했지만, 이치에서는 황진이부상당하여 후방으로 후송되는격전 끝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권율은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치 전투의 승리는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승전의 공로로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두 번째의 승전은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 전투였다. 같은 해 12월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해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 주둔했다. 거기서 그는 우키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과 접전해 다시 승리를 거뒀다. 권율은 도성 수복을 위해 다시 전진했다. 그가 선택한 거점은 행주산성(幸州山城)이었다.
행주산성의 대첩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 내에 있는 충장사. 권율 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1841년 지어졌을 때의 이름은 기공사(紀功祠)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 보수하면서 현재의 충장사가 되었다. |
행주대첩비. 1602년 권율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것이다. 비문은 최립이 짓고 한호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뒷면은 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썼다. 행주산성 내에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권율이 행주산성을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조방장 조경(趙儆)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병 1천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그러나 총 병력은 수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 오전 6시 무렵 시작되었다. 왜군은 우키타(宇喜多秀家)의 지휘 아래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 등이 3만 여명의 군사를 7개 부대로 나누어 진격했다. 그러니까 병력으로 보면 조선군은 4~5배 정도의 열세였다. 그때 조선군은 활·칼·창 같은 일반적인 무기 외에 화포와 석포(石砲- 돌을 날려보낼 수 있는 대포) 등의 특수 무기가 있었으며, 성책을 이중으로 만든 상태였다.
왜군은 고니시(小西行長)·이시다·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끈 1~3대가 차례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제1성책을 넘지 못하고 격퇴되었다. 총대장 우키다는 격노했고, 직접 자신의제4대를 이끌고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많은희생자를 내면서도 전진했고, 제1성책을 넘어 제2성책까지다가왔다. 그러나 권율의 독려로 조선군은 다시 반격했고, 우키다와 이시다를 집중 포격해 부상을 입혀 격퇴시켰다.
왜군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제5대장 깃카와(吉川廣家)와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해 일부를 불태웠다. 조선군은 위기에 몰렸지만, 처영이 이끈 승군의 활약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제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 형태도 사력을 다한 백병전으로 바뀌었다. 왜군의 마지막 공격은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끌었다. 그들은 승병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성 가까이까지 진격했다. 전투의 승부처인 이때 조선군과 백성들은 권율의 지휘로 합심해 행주산성을 지켰다. 무기가 떨어진 조선군은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짧게 잘라 거기에 돌을 운반해 전투를 도왔다.
'행주치마'라는 유명한 이름은 바로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지만,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이미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덧입는 작은 치마"라는 의미로 '치마'라는 단어가 실려있다는 증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로 볼 때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조선군은 격전에서 승리했고, 권율은 중요한 장수로 급격히 떠올랐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자군의 시체를 불태워 없애버렸기 때문에 노획한 시체는 2백여 구밖에 되지 않았지만, 타다만 시체는 셀 수 없었으며 노획물도 매우 많았다.
앞서 말했듯이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결정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왜란의 종결과 별세
권율 장군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소재. 경기도 기념물 제2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행주대첩 이후인 1593년 중반부터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권율은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명원(金命元)의 후임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도원수는 그 명칭대로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관이었다. 권율은 주로 영남에 주둔했는데, 그 뒤 한성부 판윤·호조판서·충청도 관찰사로 옮겼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이후 권율은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장(明將) 마귀(麻貴)와 울산으로 진격했지만, 역시 명의 장수인 양호(楊鎬)가 퇴각을 지시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서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역시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패했다.
임진왜란의 중심적 장수였던 권율은 전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한 뒤 그 해 7월에 62세로 별세했다. 전쟁의 영웅에게 수여한 국가의 추숭(追崇)은 성대했다. 그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선무(宣武) 1등공신과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841년(헌종 7)에는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해 그곳에 배향되었다. 그가 왜란에서 활약한 공훈은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율은 다소 늦은 나이로 출사한 문신이었지만, 거대한 전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구국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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