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敬과 義의 선비 정신을 실천한 칼을 찬 처사 - 조식

히메스타 2016. 12. 14. 10:10

 

 

조식 이미지 1

조선시대 학자들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라면 학문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대표한 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성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조식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의 탄생

남명() 조식()은 1501년(연산군 7년)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삼가현 토동() 외가에서 조언형(,1469~1526)과 인천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이며, 호가 남명이다. 18년간 살았던 김해에 ‘산해정()’이라는 집을 지어 후진을 양성한 까닭에 산해선생이라고도 불린다.

조식의 집안은 증조인 조안습() 때부터 삼가의 판현()에 살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집안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는데, 안습의 경우 문관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생원시()에 그쳐 가문의 중흥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조안습의 꿈은 조식의 부친인 조언형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조언형과 조언경 두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부친 언형은 생원시와 전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요직인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가문이 창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조식의 숙부 조언경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가솔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부친 조언형 역시 말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조식의 외조부는 충순위 이국()이다. 조식의 외가인 인천 이씨 집안은 고려 때 6대조 이작신()이 삼가로 유배 온 이래 이곳 토박이가 되었다. 외가의 집터는 풍수적으로 상당히 명당이었다고 전한다. 한 예언가가 지나가면서 그 집터를 보고 “신유년(1501)에 이곳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라 예언했다고 한다. 이후 조식의 부모가 처가에 들렀다가 누런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이씨 부인이 임신을 했고, 예언처럼 신유년 음력 6월 26일에 이곳에서 조식을 낳았다.

벼슬살이를 했던 부친 덕분에 어린시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5세까지 삼가에 있는 외가에 살다가 부친이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부친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조식은 연화방()이란 곳에 살면서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부친인 조언형은 언론과 감찰 업무를 담당한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각각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언론과 감찰 업무를 맡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우대를 받았던 관직이다. 그들은 고과(- 업무평가)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의 우대를 받았다. 특히 국왕에게 직언을 하는 사간원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에 비추어 음직이 아닌 문과 출신자만 선발되던 자리다.

벼슬길을 버리고 진정한 학문의 길을 찾다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임명되자 단천으로 이주한 조식은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학·병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를 했다. 그가 실천과 비판 의식을 지닌 선비로 성장한 데는 지방관 생활을 한 부친의 영향이 있었다. 어린 조식은 지방 관아에 생활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조식은 젊은 시절 [좌전()]과 유종원(- 당송8대가 중의 한사람)의 고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1518년 18세에 조식은 부친을 따라 서울 장의동(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로 이주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성운()·성우() 형제의 집과 가까웠다. 성운은 훗날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형이 화를 당하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은거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웃사촌이었던 조식과 성운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인격을 수양해갔다. 평온하게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중인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가 사사되었는데, 이때 조식의 숙부인 조언경도 화를 당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은 벼슬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운 형제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연이은 사화를 지켜보면서 벼슬길에 회의를 갖기도 했지만, 곧장 과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520년(중종 15년)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초시에 모두 급제한 조식은 이듬해 문과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 후 과거 준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그에게 일생의 항로를 바꾸는 전기가 찾아왔다. 과거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허형(, 1279~1368, 원나라 학자)의 글이 그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이후로 조식은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에 전념하였다. 실생활에서도 유학의 성현이자 대유()들인 주렴계, 정명도,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아침마다 절을 올릴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했다.

경()과 의()를 실천한 지리산 처사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였다. 경과 의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 )”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1526년 갑작스레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른 뒤 조식은 벗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벗 성우는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시골에서 게을리 공부하면 금방 뒤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식은 모친의 허락을 받아 의령 자굴산으로 들어가 공부에 전념했다. 2년간의 산속 생활을 끝낸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집 근처 언덕에 산해정()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했다.

남명 조식이 30년간 강학하던 산해정. 경남 김해시 대동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조식이 김해에 독서당과 집을 지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벗인 성운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친구들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학문에만 전념하여 쌓은 내공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 나갔다. 그의 명성은 급기야 중앙 정계로까지 알려졌다. 1538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헌릉참봉이라는 말단 참봉자리를 제안했다.명분은 재야 지식인을 등용하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왕실 무덤이나 지키는 자리였다. 그는 이 제안을 뿌리쳤다. 혹자들은 관직 자리가 낮아 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조식은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물리쳤다.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조식의 명성을 듣고 만남을 청했으나, 이 또한 피했다. 높은 벼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시골처사가 마치 벼슬자리를 구걸해 보이는 오해라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날로 혼탁해져가는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식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번번이 사양했고, 1553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퇴계 이황의 권고도 물리쳤다.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실천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천철학이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다. 1561년 조식은 김해에서 다시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이사하여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말년을 보냈다. 오덕계·정한강·곽재우등 수많은 인재들이 그와 인연을 같이 했다.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세력이 활보하던 명종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졌다. 새로운 세상이 온 듯 했으나,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다. 1572년 2월 남명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이지 묻자, 조식은 ‘처사()’라 하라고 답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제자 가운데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 많이 나왔던 것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남명 조식의 정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정왕후를 ‘과부’라 칭하다

1555년 조식은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받았다. 그간 윤원형을 비롯한 간신들이 가득한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던 그에게 사양하기 힘든 벼슬자리가 단성현감이었다. 조정은 조식의 거주지와 그리 멀지 않은 단성현의 현감자리라면 사양할 명분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국왕을 향해 그간 가졌던 재야 인사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것이 곧 [단성소()]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를 받아본 국왕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명종이었다.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피붙이인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 등 국내외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혼란기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겼다. 그는 국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했다. 또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학문적 라이벌, 남명과 퇴계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 조식은 당대의 유학을 영도하던 위치에 비해 남긴 저술이 많지 않은데, 이것은 저술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했던 학문적 입장에 따른 이유와, 남긴 원고 대부분이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사림()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다.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이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와 영남좌도를 대표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이 잘 지적되어 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를 앞세웠다.”

이익은 지리산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다.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이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다.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다. 정구·김우옹·정탁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정인홍(, 1535~1623)의 경우 이황을 비판한데다가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처형당하면서 조식의 명망이 퇴계에 비해 빛을 잃게 되었다. 훗날 정조()는 “영남에서 절의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조식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평했다.

1571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은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하였다. 이 말처럼 조식 또한 일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따르면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이황의 유언을 들은 조식이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한다.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를 학문의 실천지표를 삼은 인물이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에는 조식의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조식의 핵심 사상인 ‘경’과 ‘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명정신을 대변하던 제자 정인홍이 반역으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발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