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의 정치를 규정하는 용어는 ‘세도정치’였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수렴청정’이었다. 잘 알듯이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릴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정무를 대신 처리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비의 가문, 즉 외척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소지를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가 만연한 것은 그 시기에 수렴청정이 특히 자주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두 제도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그녀의 청정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화려한 가문적 배경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5월 15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과 청송 심씨(정랑(正郞) 심건지(沈健之)의 딸)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1800년(정조 24) 2월 26일 초간택, 윤4월 9일 재간택)그 직후에 정조가 승하(6월 28일)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한 뒤 바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802년(순조 2) 10월 13일).
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 김씨(본관 경주)였다. 그 때 그녀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다. 그 권력의 크기는 스스로 ‘여주(女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1800년 7월 20일). 정순왕후는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1805년 1월).
그 공백을 메운 것은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그 첫 인물은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었다.
그의 가계는 대단히 화려해서,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7대조)부터 시작해서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5대조)·김창집(金昌集. 고조.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김제겸(金濟謙. 증조. 예조참의)에 이르는 선조들은 서인(노론)의 가장 굵은 줄기를 이뤘다. 조부(추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와 부친(서흥(瑞興)부사 김이중(金履中))은 고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조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런 침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19세기 중엽의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국어사적으로도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
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
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逌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인물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명 재상 - 유성룡 (0) | 2016.12.08 |
---|---|
대리청정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비운의 세자 - 효명세자 (0) | 2016.12.08 |
17세기 한류를 이끈 실학의 선구자 - 이수광 (0) | 2016.12.06 |
확국의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 희빈 장씨 (0) | 2016.12.01 |
현실론으로 국가와 백성을 구하다 - 최명길 (0) | 2016.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