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17세기 한류를 이끈 실학의 선구자 - 이수광

히메스타 2016. 12. 6. 14:26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다

조선시대 문화백과사전의 효시라 평가받은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1563~1628)은 조선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 그리고 후대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1628년 12월 26일자 [인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수광의 졸기(- 인물이 사망한 뒤 기록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 됨됨이가 잘 드러난다.

“약관의 나이(23세)에 급제하여 청현직()을 두루 거쳤으며, ‘교유()를 일삼지 않고 전랑()이 된 사람은 수광뿐이다.’”

이수광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이에 기대지 않고 실력으로 입신양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옷을 감당하지 못할 듯이 약했으며 매우 과묵한 인물이었고,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악과 여색, 이욕(- 사사로운 이익을 탐내는 욕심)에 대해서도 담담하여 좋아하지 않았다. 편당 짓는 것을 싫어하고 담백하였으며,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벼슬살이 44년 동안 여러 차례 변란을 겪었음에도 흠결이 없어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실록 편찬자가 평한 것으로 보아 지성과 함께 인품도 갖춘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수광의 자는 윤경(), 호는 지봉()이며 본관은 전주로 그의 집안은 왕족의 후예였다. 태종과 후궁(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녕군() 이비(, 1395? ~1458)가 바로 그의 선조이다. 왕족의 후손들이 그렇듯이 이비의 후손들 역시 벼슬길이 막혀 거의 100년간 평민처럼 살았다. 이비의 후손이 벼슬길에 오르게 된 것은 이수광의 부친인 이희검(, 1516~1579)때부터다. 부친인 이희검은 삼사() 다시 말해 언론을 책임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호조, 병조, 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로도 유명하다.

청백리 혈통을 이어받은 지식인

이수광의 모친은 유씨부인으로 세종대 청백리 정승으로 유명한 유관(, 1346~1433)의 후손이다.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에 있던 유관의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초가집이었다. 담장도 없었던 이 집은 비가 오면 유관이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씨부인이 유관의 후손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희검은 이 집에서 살았다. 사실 유씨부인은 이희검이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다. 일찍이 이희검은 강호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일찍 요절했다. 그 후 다시 유씨부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1남 4녀를 낳았다.

이수광은 부친의 임지였던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났으나, 유년 시절은 유관이 살았던 ‘비우당()’에서 살았다. 당호인 비우당은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수광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재건축한 뒤 지은 이름이었다. 이수광의 호인 ‘지봉()’은 집 부근에 있는 상산()의 한 봉우리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가 자랐던 비우당은 바로 지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수광은 외가 5대조인 유관과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청백리 정신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그 유지를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수광은 16세에 초시()합격을 시작으로 20세에 진사시를 거쳐, 23세에 대망의 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승문원을 시작으로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요직을 거쳐 28세의 나이에 병조좌랑이 되고 문장력을 인정받아 임금의 교서를 짓는 지제교()를 겸직하였다. 조선시대 문관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은거 생활과 [지봉유설]의 집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지봉 이수광의 묘.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이 때의 기록을 토대로 [지봉유설]을 집필, 서학을 소개하고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 49호. 경기 양주시 장흥면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이수광이 살아간 시대는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0세가 되던 1592년 이후로 그의 삶은 평화롭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참상을 경험하며 정치인으로서 뼈아픈 반성을 해야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광해군대의 정치적 혼란이 그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출세가도를 달렸던 선조대와 달리 광해군과는 사이가 좋지 못해 정치적 부침이 있었다.

당색을 멀리하며 중도의 입장을 취했던 이수광은 광해군이 생모인 공빈김씨를 공성왕후로 승격시키자 홀로 예의에 어긋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 일을 계기로 광해군과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이수광은 1614년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비우당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광해군은 대사성의 벼슬을 내리며 회유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그의 명저 [지봉유설]은 비우당으로 은퇴한지 1년만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완성된 것이다.

52세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 책은 비우당으로 은퇴한지 1년 만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기간을 걸쳐 이루어졌다. 세 차례에 걸친 명나라 사행 경험과 평생 동안 수집해 온 국내외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곧 [지봉유설]이다. 이는 이수광의 독서량과 부지런함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권으로 이루어져있는 이 책에는 천문·지리·역사·정치·경제·인물·시문·언어·복식·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3,435 항목에 달하는 사전적 지식이 망라되어 있다.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이라는 체제적 특성 외에도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하는 실로 방대한 책이다.

1616년 4년간의 칩거 끝에 이수광은 중앙 관직 자리로 복귀하지 않고 지방관이 되어 전라도로 내려갔다.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에 내려간 이수광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3년간의 순천부사 임기를 마친 뒤 57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중앙 정계와 멀리하며 수원에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이수광이 다시 재기한 것은 광해군과 대북() 세력이 실각한 1623년이다.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지내다 1628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 있다.

이수광은 안동 김씨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올랐고, 차남인 민구는 대사성까지 올랐다. 두 아들이 고관을 지냈던 탓에 이수광의 문집인 [지봉집]은 1633년에 순탄하게 간행될 수 있었다.

조완벽이 증언한 베트남의 한류 바람

[지봉유설]에는 <조완벽전()>이라 불리는 개인의 전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경남 진주의 선비였던 조완벽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597년, 정유재란의 발발과 함께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중 한문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일본인 무역 상인에게 다시 팔려갔다.

베트남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주인의 배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베트남에 가게 된 조완벽. 그는 여기서 조선의 문인, 지봉 이수광의 시가 베트남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훗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 온 조완벽은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수광은 1597년에 사신으로 연경(, 지금의 북경)에 갔다가 안남(베트남) 사신 풍극관()과 옥하관(조선 사신들의 숙소)에서 50여 일간 함께 머물며 시를 지었고, 이후 두 사람의 시는 각 나라에 소개되어 회자되었다. 두 사람의 옥하관 창수(- 시가나 문장을 지어 서로 주고받음)는 그로부터 2세기가 지난 1790년(정조 14) 열하에서 서호수()를 만난 안남 사신 반휘익()에 의해 "천고의 기이한 만남"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왜 실학의 선구자인가

1708년(숙종 34)에 조선에서 그린 곤여만국전도.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한 세계지도이다.
<출처: 실학박물관>

조선후기 저술의 특징 중 하나는 ‘유서()’라 불리는 백과전서류가 편찬되었다는 점이다. 그 효시는 물론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실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1930년대 국학자들은 이수광을 실학의 선구자로 인식했다. 이수광은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실천에 힘써야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실천과 유용성에 학문의 가치를 둔 것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초에 살았던 이수광은 조선인이 아니라 세계인이었다. [지봉유설] 권2의 제국부 <외국>조에는 안남(베트남)으로부터 시작하여 진랍국(캄보디아), 회회국(아라비아), 불랑기국(포르투갈), 대서국(이탈리아) 등 유럽 나라들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다. 그는 3차례에 걸친 명나라 사행을 통해 신간 서적 및 세계 정보를 입수했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지봉유설]에는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와 함께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가 최초로 소개되어 있다. 17세기 초 서양의 종교와 문물은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에 의해 본격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수광은 1590년과 1597년, 1611년에 각각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 시기는 마테오 리치의 본격적인 동양 선교 시기와 맞물린다. 이수광은 [천주실의] 외에도 1602년에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가 이듬해 조선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봉유설]에 밝혀두었다. 둥근 구형의 지구에 5대륙을 그린 <곤여만국전도>는 동아시아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세계지도이다.

명나라 수도 연경에서 이수광은 동남아에서 온 사신들과 더불어 서양 선교사들과도 만났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외국 문물을 객관적으로 이해했고 포용했다. 중국 속의 조선이 아닌 세계 속의 조선,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조선을 자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