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윤선거(尹宣擧. 1610∼1669)라는 이름은 그 인물 자체보다도 아들 때문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들은 잘 알듯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이다.
윤선거의 생몰년은 그가 두 차례의 호란과 기해예송(1659년. 효종 10)을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그의 현실적 삶과 역사적 평가를 지배한 사건은 병자호란과 기해예송이었다. 거기서 보여준 그의 행동과 생각은 그 뒤 아들 윤증이 개입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고, 노론과 소론의 분기를 가져오는 거대한 사건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가문적 배경
윤선거는 자가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ㆍ노서(魯西) 등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관은 유서 깊은 명문인 파평이다. 그 가문의 시조는 고려 태조를 도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책봉된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 윤씨는 그뒤 윤선지(尹先之. 벽상공신((壁上功臣))ㆍ윤금강(尹金剛. 상서성 좌복야(尙書省 左僕射))ㆍ윤집형(尹執衡.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등을 거치면서 위상을 높여오다가 유명한 윤관(尹瓘, ?∼1111)에 이르러 명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윤관은 ‘동북9성 개척’이라는 업적과 추충좌리 평융척지 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여기도 그런 업적이 표현되어 있다)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 상주국 영평현 개국백(上柱國鈴平縣開國伯)이라는 긴 관직이 보여주듯이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윤언이(尹彦頤)도 재상(정당문학 판형부사(政堂文學判刑部事))에 오르는 뛰어난 경력을 이뤘다.
파평 윤씨는 조선에 들어와 윤곤(尹坤. 좌명공신ㆍ이조판서)ㆍ윤희제(尹希齊. 판한성부사)ㆍ윤배(尹培. 홍문관 교리)ㆍ윤사은(尹師殷. 곡성(谷城)현감)ㆍ윤탁(尹倬. 한성부좌윤ㆍ동지성균관사)ㆍ윤선지(尹先智.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치면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했다.
윤선거의 직접적인 계보는 증조 윤돈(尹暾. 좌승지에 추증)ㆍ조부 윤창세(尹昌世. 이조참판에 추증)를 거쳐 부친 윤황(尹煌)으로 내려왔다. 윤황은 대사간을 지내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은 비중 있는 인물이었는데, 좀 더 중요한 측면은 율곡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로 추앙받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사위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윤선거는 성혼의 외손으로 서인의 대표적 계보를 형성한 것이었다.
병자호란과 생환
윤선거는 1610년(광해군 2) 5월 28일에 부친이 외직으로 근무하던 전남 영광(靈光)의 관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 공주(公州) 이씨(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딸)와 혼인했고(1626년. 인조 4), 23세 때 소과에 급제했다(1633년. 인조 11).
개인으로서는 순조로운 과정이었지만, 그때 조선은 거대한 국난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정묘호란에서 후금에 패배했지만, 그뒤에도 조선의 국왕과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이념의 선명성과 역사의 정통성에 집착해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외면했다는 표현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윤선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균관에 입학한 그는 병자호란 직전에 후금의 사신을 목베고 화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1636년).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지만,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도 병자호란과 함께 일어났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윤선거는 어머니ㆍ부인 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는 거기서 권순장(權順長)ㆍ김익겸(金益兼)ㆍ김상용(金尙容) 등과 순절(殉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하기로 약속했다. 이듬해 1월 실제로 그들과 윤선거의 부인 이씨는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처음의 계획을 바꿨다.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부친과 함께 죽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남한산성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절개를 꺾고 살아남았다.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은 없다”는 유명한 경구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모든 사실의 내면은 복합적이다(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법정의 공방은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어떤 판단과 행동을 명료하게 비판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그 원인과 동기를 깊이 알거나 오래 생각하면 그런 일은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그때 27세의 윤선거의 판단과 동기는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 그것이 그때 조선을 지배하던 이른바 ‘의리’와 어긋났다는 사실은 뚜렷했다. 어떤 개인적 사정과 역사적 명분이 있었든지, 사회의 통념과 배치된 이때의 행동은 그 뒤 윤선거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리고 거기서 빚어진 갈등은 아들 윤증과 그 뒤의 시대까지 끊임없는 영향을 주었다.
은거와 연구
1637년 3월 윤선거는 부친이 충청도 영동(永同)으로 유배가자 따라갔다. 이듬해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충청도 금산(錦山)에 은거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이듬해(1639년. 인조 17) 부친 윤황이 별세했고, 그는 삼년상을 치렀다(1641년).
그 뒤 평생동안 윤선거는 충청도 일대에서 학문, 주로 예학 연구에 몰두했다. 호란 이후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한 학문은 예학이었다. ‘예악(禮樂)’으로 병칭되는 분야에서 음악은 화합의 도구인 반면 예학은 엄격하고 정교한 질서와 차별의 논리다. 이 시기에 예학이 발달한 까닭은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복잡해 진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논리에 따라 편제할 필요성도 크게 작용했지만, ‘오랑캐’에게 무너진 현실과 정신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동기도 중요했다.
윤선거는 1642년에 마하산(麻霞山. 현재 충청남도 금산군 소재)에 산천재(山泉齋)를 짓고 예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류했다. 스승으로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 있었고, 비슷한 연배로는 권시(權諰, 1604∼1672)ㆍ송시열(宋時烈, 1607∼1689)ㆍ유계(兪棨, 1607∼1664)ㆍ이유태(李惟泰, 1607∼1684)ㆍ윤휴(尹鑴, 1617∼1680) 등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3세 연상의 송시열이었다.
이 시기 10여 년 동안 윤선거의 주요한 학문활동은 유계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고(1642년), 송시열ㆍ이유태ㆍ유계와 고례를 연구했으며(1644년),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성혼과 정철(鄭澈)의 연보를 편찬하거나 교정한 것 등이었다(각 1648년, 1650년). 그동안 윤선거는 왕자 사부ㆍ지평ㆍ장령ㆍ시강원 진선ㆍ사업(司業) ㆍ상의원 정 등의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비교적 평온하게 유지되던 윤선거의 은거생활과 학문연구는 중요한 고비를 맞았다. 그것은 조선의 정치와 학계를 뒤흔든 예송이었다.
기해예송과 송시열과의 갈등
1660년(현종 1) 이른바 기해예송이 일어났을 때 윤선거는 50세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그 예송은 효종이 붕어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입어야 하는 복제(服制)를 두고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례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을 적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판단에 관련된 것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효종이 종통을 이었지만 차자라는 사실을 중시해 1년복을 주장했고, 허목ㆍ윤휴를 비롯한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적장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3년복을 주장했다. 결과는 서인의 승리였다.
이때 서인에게 가장 강력히 도전한 인물은 윤휴였다. 그는 이전부터 서인과 갈등을 빚어왔는데,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던 주희의 주석 대신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했다.
예송에서도 윤휴는 종통설에 입각해 송시열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송시열은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윤선거에게 그와 절교하라고 종용했다.
사실 윤휴를 둘러싼 윤선거와 송시열의 견해 차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나타났다. 윤선거는 1653년(효종 4) 황산(黃山)서원에서 송시열을 만났을 때도 윤휴를 배척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결국 이 사안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윤증 때 와서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뒤 윤선거는 앞서처럼 공부하고 저술하는 삶으로 돌아왔다. 정철을 천장(遷葬: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할 때 만사(輓詞: 죽은 이를 슬퍼하며 지은 글)를 지었고 민유중(閔維重)의 부탁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유고를 교정했으며(1665년. 현종 6), [우계속집(牛溪續集)]을 편찬하고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의 문집을 교정했다(1667년). 저술의 대상이나 청탁한 인물로 미뤄볼 때 이런 활동은 윤선거가 서인의 주류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유의서와 별세
윤선거는 기해예송이 일어난 10년 뒤인 1669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별세하기 몇 달 전 그는 한 통의 편지를 작성했다. 송시열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남인 윤휴와 허적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는 우회적인 충고를 담고 있었다(기유년에 썼고 실제로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유의서〔己酉擬書〕’라고 부른다). 그 뒤 이 편지는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墓碣銘: 무덤 앞 비석에 새기는 글)을 부탁하면서 전달해 알려졌고(1673년), 송시열과 윤증이 결별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후의 부침
별세한 뒤 윤선거는 영의정에 추증되고(1710년. 숙종 36)되고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711년).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후의 지위도 급격하게 부침했다.
첫 하락은 문집 때문이었다. 1714년 1월에 문집인 [노서유고(魯西遺稿)]가 세상에 나왔는데, 그해 7월 신구(申球)라는 인물이 거기에 효종을 무함한 내용이 있다고 고발했다. 치열한 논란 끝에 결국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서원의 사액을 철거하며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하라는 숙종의 ‘처분’이 내려졌다(병신처분. 1716년. 숙종 42).
그러나 지위는 곧 회복되었다.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하자 관작은 회복되고 서원도 다시 설치되었다(1722년. 경종 2). 50여 년 뒤 윤선거의 지위는 다시 한번 앞서와 동일하게 추락했다가(1776년. 정조 즉위년) 곧 회복되어 그대로 유지되었다(1782년. 정조 6).
첫머리에서 말한 대로 그는 장남 윤증이 개입하면서 노소 분당의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었다. 대립과 갈등, 상처와 분열이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없을 것이다. 관건은 그것이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났고, 그 뒤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측면일 것이다.
예송이 단순한 복제의 논란이 아니었듯, 노소의 분당도 복잡하고 심층적인 문제가 개입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체적이고 절실한 정책이나 현안에 관련된 논쟁보다 사람에 관련된 평가와 대립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 시대와 인물의 내면을 깊이 알지 못하지만, 짧은 글을 쓰면서 아쉬운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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